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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프란치스코 교황님 추모미사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5-04-25 조회수 : 522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25년 4월 21일(월) 오전 7시 35분(로마 현지시각) 선종하셨습니다.


이에 춘천교구는 주교좌 죽림동성당에 분향소를 마련하였고, 2025년 4월 25일(금) 오후 3시 주교좌 죽림동 예수성심 성당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 추모미사'를 춘천주교 김주영 시몬 주교의 주례로 교구사제단 공동집전으로 봉헌하였습니다.


오늘 미사중에는 김주영 주교의 강론과 영성체 후에는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교구장 비서 겸 홍보실장)가 프란치스코 교황님 삶의 자취를 글로 풀어내어 함께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고,  이어 내빈 소개와 교구 9일 기도인 '교황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한 기도문' 을 함께 바쳤습니다. 미사 후에는 참석한 모두가 줄지어 교황님 영정에 참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 교황(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은 로마시각 2013년 3월 13일 저녁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추기경이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 교황님 선종 관련 안내  https://www.cccatholic.or.kr/news/diocese/14273

* 분향소 모습 사진  https://www.cccatholic.or.kr/news/photo/14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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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의 자취 - 김도형 신부>

하늘 아래 가장 겸손한 이름으로 꼽히는 ‘프란치스코’. 세상은 언제부턴가 그 이름을 들으면 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순박한 미소와 투명한 눈빛으로 사람을 품었던 이, 바로 우리가 이 자리에서 애도하며 기억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그는 가톨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라틴 아메리카 출신이자 예수회 출신 교황으로 선출되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지위가 아닌 ‘삶으로 증명한 겸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연대기적 약력 소개보다는, 교황님의 삶의 자취를 함께 되새기고자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본명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는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의 장남으로, 그는 한때 나이트클럽 경비원과 청소부로 일하며 생계를 돕고, 화학 기술자로 안정된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스물한 살 무렵, 폐렴으로 생사의 경계에 선 순간, 그는 신앙의 부르심을 느끼고 1958년 3월 11일, 예수회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리고 33세가 되던 1969년 12월 13일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언제나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청빈하고 단순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나는 죄인 중 가장 큰 죄인”이라 고백하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타인의 고통에 민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동행, 약자들에 대한 깊은 연민은 그가 나아가는 길을 언제나 밝혀주는 등불이었습니다.


  1992년 주교품을 받고, 또 2001년 추기경에 서임된 이후에도 고급 승용차 대신 지하철을 이용하고, 빈민가를 방문하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모습. 신발이 닳은 노숙자에게 새 신발을 벗어주고는 정작 자신은 맨발로 돌아온 일화. 이 모든 장면은 그가 진심으로 ‘가난한 자들의 벗’이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게 소박하고 작은 사람으로 살았던 그를 크게 주목하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013년 3월 13일,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갑작스런 사임이후 새로운 교황의 탄생을 지켜보던 세상은 예상치 못한 말을 듣게 됩니다. 

“새 교황의 이름은 프란치스코”. 

  그리고 이내 흰색 수단을 입고, 놀람과 의심에 쌓인 군중들 앞에 나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을 그저 “로마의 주교”라 소개하며, 군중 앞에서 그들을 먼저 축복하지 않고 “여러분이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 겸손한 한 마디에 세상은 울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교황궁 대신, 소박한 게스트하우스인 ‘산타 마르타의 집’에 머물며, 직접 식사 줄에 서고, 작은 방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는 “교황도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 똑같습니다.”라고 말하며 교회의 문턱을 낮췄고, 세상과 교회를 더욱 가까이 이끌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17세 때 체험한 하느님의 자비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처음으로 사제성소를 느꼈던 날, 곧 9월 21일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의 성무일도에 기록된 베다 성인의 강론말씀 중 한 구절인 ‘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를 평생동안, 주교직에서부터 교황직에 이르기까지 –이례적으로- 한결같은 ‘사목 표어’로 삼았습니다.


  그의 교황명도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따르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교황직을 시작하며 반포한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져도 거리로 나가는 교회를 택하겠다.”

  그는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그 신념을 실현했습니다. 즉위 후 9일 후, 로마의 한 교도소에서 첫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를 봉헌하고 재소자들의 발을 씻어 주며 “왜 저 사람들이고 내가 아닌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교황께서 선종 직전, 당신의 생애 마지막 성 목요일이었던 2025년 4월 17일에도 로마의 교도소를 방문하시며 똑같이 던졌던 이 질문은 교황의 신념과 사목적 시선을 드러낸 명백한 고백이었습니다.

  또한 교황 즉위 후 첫 방문지로 난민과 이주민의 비극을 상징하는 이탈리아 람페두사 섬을 택했습니다. 이곳에서 미사를 집전하며 “우리는 아직 충분히 울어주지 않았다.”고 말하며, ‘무관심의 세계화’를 강하게 질타했고, 이 비극의 문화의 공범인 우리 모두에게 연대의 책임을 촉구했습니다.


  이처럼 프란치스코 교황의 리더십은 때로 다정하면서도 때로는 단호했습니다. 그는 전통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습니다. 난민 문제, 기후 위기, 성소수자 인권, 가난과 배제의 문제 등에 대해 그는 일관되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병원처럼 아픈 사람을 돌보는 곳이어야 한다.” 

  교황의 이러한 메시지는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되었고, 때로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했습니다. 2015년에는 환경에 관한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발표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자고 촉구했습니다. 

“지구는 우리의 공동의 집입니다.” 

  교황의 이 한마디는 신자와 비신자를 넘어 전 인류에게 전하는 생명의 외침이었습니다. 창조 질서 수호를 위한 국제적 연대의 사명을 일깨우며, 정교회가 1989년부터 지내 온 9월 1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을 2015년부터 가톨릭 교회 기념일로 지정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기도하고 행동하는 날로 만들었습니다.


  2020년 3월,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고통받던 어느 날. 교황은 텅 빈 성베드로 광장에서 홀로 비를 맞으며 기도했습니다. 그 침묵의 기도는 팬데믹에 두려워 떠는 세상의 심금을 울렸고, 다시금 인간의 작음과 하느님의 위대함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그는 회칙 ‘모든 형제들’을 통해 “우리는 모두 형제”라고 강조하며, 인종, 종교, 국경을 초월한 보편적 사랑을 말했습니다. 그는 정치인도, 과학자도 아닌 ‘신앙인’으로서 세상의 갈라진 틈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였고, 전염병의 공포를 뛰어넘는 형제적 연대를 역설하였습니다. 교황은 또 현대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한 관심을 제도화하여 '세계 가난한 이의 날(11월, 전례력 연중 제33주일)'과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7월 마지막 주일)'을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한국인에게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잊지 못할 존재입니다. 2014년 8월, 재위 2년차 교황은 첫 아시아 순방지로 한국을 택했습니다. 제6회 아시아 청년 대회 폐막 미사에서 “잠자고 있는 사람은 춤출 수 없다”는 말로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 미사를 주례하면서 한국 순교자들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를 시복했으며,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나 위로하며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노란 리본을 내내 달고 있던 모습을 지적하던 이들을 향해,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이란 없다”는 단호한 한 마디로 모든 정치적 훈수, 정의의 문제를 뛰어넘는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국 주교단이 교황에게 지역교회 현황을 직접 알리고 논의하는 ‘사도좌 정기 방문’(Visita ad limina)에서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을 향한 사랑을 전했습니다. 

  2015년 방문 중에는 한국 주교들에게 한국 사회의 현안을 묻는 한편, 현지에서 봉헌된 124위 시복 감사 미사에 부쳐 “평신도에 의해 시작됐고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한국 교회가 안락한 신앙을 버리고 아시아 교회의 빛이 되기”를 당부했습니다. 2024년에는 “분단된 한국, 고통의 상황이 속히 개선되고 종결되도록 기도할 것”을 약속하며, “젊은이들에게 신뢰를 주는 교회, 열린 분위기의 교회를 만들어 나가자”고 독려했습니다.


  또 교황께서는 재임 기간 내내 세계 평화를 위한 실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2013년 7월 브라질부터 2024년 12월 프랑스까지 47회, 70여 개국을 사목 방문했고, 전쟁 지역인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교황 특사를 파견했으며,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와 단식의 날’을 여러 번 선포했습니다. 특히 교황은 2019년 4월, 남수단의 정치지도자들에게 땅에 붙을만큼 엎드려, 무릎을 꿇고 발에 입을 맞추며 평화를 위해 노력해 달라고 당부했던 장면은 그야말로 ‘파격’이자 ‘충격’으로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황의 그 입맞춤에는 평화를 위한 간절한 희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연대를 청했습니다.


  평화를 위한 교황의 기도는 병상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교황은 서면으로 발표한 2025년 2월 23일 주일 삼종기도 연설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3년을 언급하며,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중동, 미얀마, 수단 등 분쟁 지역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청했습니다. 병세가 완화된 24일에는 가자 지구의 본당신부에게 전화로 위로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을 향한 교황의 마지막 메시지 또한 “전쟁을 끝내고 굶주린 이들을 도우라”는 것이었고, 2025년 3월 23일 로마 제멜리 병원에서 퇴원한 뒤에도, 교황은 생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주님의 양 떼인 신자들과 함께했습니다. 


  비록 휠체어에 의지한 모습이었지만, 교황은 퇴원하던 날에도, 4월 6일 병자와 의료 종사자를 위한 희년 행사 현장에도, 성주간의 첫날인 4월 13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도, 17일부터 이어진 파스카 성삼일과 20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도,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신자들에게 직접 찾아가 인사를 건넸습니다. 즉위 직후 2013년 3월 28일(성주간 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 때 사제들에게 권고한 대로, 교황은 끝까지 주님의 양들 가운데에 있었던 “양 냄새 나는 목자”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전 생애는 ‘가난한 이,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공감과 희생’이었고, 이를 위협하는 물신이라는 우상, 금융, 자본주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격렬한 비판을 쏟아내었던, 하느님께서 이 시대의 교회를 위해 보내신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여정이었습니다. 


  2025년 가톨릭 교회의 정기 희년을 선포하며 ‘희망’이라는 키워드를 세계인의 가슴에 새기고, 희년의 부활 대축일을 지낸 후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프란치스코 교황. 


  2013년 3월 교황 즉위 후 월급은 단 한 푼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남기고 간 재산은 고작 100달러, 우리돈 약 14만원이었습니다. 소탈함은 장례까지 이어졌습니다. 장식없는 관을 쓰고 이름 한 글자만 적인 묘에 묻어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소탈한 마음, 그러나 그 어느 것보다 크나큰 사랑을 세상에 남기고 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마지막 뜻이 담긴 유언장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유언]


‘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의 이름으로, 아멘.


저의 지상 삶이 저물어 감을 느끼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은 희망 안에서, 제가 묻힐 자리에 대한 마지막 바람을 전하고자 합니다.


저는 언제나 저의 삶과 사제직, 주교직을 우리 주님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거룩하신 성모 마리아께 맡겨드려 왔습니다. 그러므로 제 육신이 부활의 날을 기다리며 교황 대성전인 성모 대성전에서 쉬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저는 제 마지막 지상 여정이 이 유서 깊은 성모 성지에서 끝나기를 바랍니다. 저는 모든 사도 여정의 시작과 끝마다 이곳에 들러 기도하며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저의 지향을 온전히 맡기고 그분의 자애로운 모성적 보살핌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저의 무덤은 앞서 언급한 교황 대성전의 파올리나 경당(로마 백성의 구원 경당)과 스포르차 경당 사이에 있는 측면 회랑의 안치 공간에 마련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는 첨부 자료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무덤은 지면 아래 있어야 하며, 단순하고 특별한 장식 없이 ‘Franciscus’(프란치스코)라는 이름만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제 무덤을 마련하는 데에 드는 경비는 한 은인의 후원금으로 충당할 것입니다. 저는 이미 그 후원금을 성모 대성전으로 송금하도록 조치해 놓았고, 이 리베리오 의전 사제단 특별 책임자인 롤란다스 마크리카스 몬시뇰에게 적절히 지시했습니다.


저를 사랑해 주셨고 저를 위하여 계속 기도해 주실 분들에게 주님께서 마땅한 상급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제 삶의 마지막에 맞이하는 고통을, 온 누리의 평화와 만민의 형제애를 위하여 주님께 봉헌합니다.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2022년 6월 29일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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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론 - 김주영 시몬 주교 >

한국교회는 이번 달 71년간 선교사로서 기쁘고 떳떳하게 멋지게 사시다가 하느님 품에 안기신 드봉 주교님에 대한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선종으로 또 한 번의 슬픔을 겪고 있습니다. 누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요? 드봉 주교님과 교황님을 잃은 슬픔을 우리 삶 안에서 승화시켜 복된 희망을 품고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은총을 구합시다. 오늘 특별히 도정, 시정으로 바쁘신 중에도 우리 가톨릭 신자의 영적인 아버지의 추모 미사에 함께 해주신 정계인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운이 좋게도 세 분의 교황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한국에 2번이나 오셨지만, 저는 그때 학생이었기에, 요한 바오로 2세는 저에게 그저 어려운 분이었습니다. 사제가 되어 로마에서 유학할 때, 3번 알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인사 정도 나누는 개인 알현이었습니다. 당시 교황님은 파킨슨병으로 힘들어하셨지만, 한국인이라고 인사드렸더니 정확한 발음으로 ‘찬미 예수님’하고 인사하셨던 기억은 지금도 선합니다. 교황님 중에 제일 많이 전 세계를 누비며 사목 방문을 하셨던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람들에게 교황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알리고 또 영향을 준 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추기경 시절 제가 로마 유학시절 머물던 신학교에 오셔서, 강연을 해 주셨는데, 즉문즉답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신학적으로 폭이 굉장히 넓은 분이시라고 느꼈습니다. 후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개인 알현을 하였을 때, 한국에 대해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선출 때부터 특별히 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분이었습니다. 교황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정하시며 교회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알려주셨고, 2022년 로마에서 있었던 주교연수 때에 훈화와 알현을 통해 주교의 직무가 무엇인지 진지한 대화로 이야기해주던 분이었습니다. 2024년 10월에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는 한국교회 주교단에게 작금의 세상에서 우리 교회가 직시해야 할 점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말씀해주시면서 희망을 주신 분이셨습니다.


저는 부활절을 맞기 바로 전날 회의를 하면서 저를 돕는 꾸리아 신부님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자서전 ‘희망’이라는 책을 선물했습니다. 그 전에 Let us Dream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의 이 강론을 준비하는 자료가 될지 몰랐습니다. 


희망의 책에 마음에 남았던 문장은 “희망이 피어나는 데는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그 한 사람이 당신일 수 있습니다.”라는 대목이었는데 그 한 사람중에 첫째의 한 사람으로 사셨던 그분의 삶에서 저는 ‘행동하는 희망’을 발견하였습니다. 희망은 그저 서서, 앉아서 그리거나 생각하는 것에 그치면 안된다는 것, 내 작은 희망의 행동으로 세상이 바뀔 수는 없지만 그런 행동하는 희망으로 내 자신에게 끊임없는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같이 있는 이들에게는 희망을 일구도록 격려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라는 주제로 희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순례라는 말이 그렇듯이 인간은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계획 없이 떠돌거나 목적 없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라는 우리 존재의 근원을 담고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 근원부터 하느님에게서 와서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지극히 육적이며 영적인 존재입니다. 물론 가만히 앉아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해서 묵상하며 침묵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함께 모여 좋은 방향으로 가야 할 우리 인류공동체에 교황님께서는 회칙 「모든 형제들」에서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셨습니다. 이는 단지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분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분은 사제 때나 주교, 추기경 때에도 늘 하느님 백성 안에서 행동하는 희망으로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자서전을 보면, 노숙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노숙자가 되었고, 버려진 상자와 종이를 모아 생계를 잇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 종이를 주웠고, 자기가 가진 은붙이를 팔아 무료급식소에 내어놓았으며, 큰 차가 아닌 작은 차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하였습니다. 2014년 우리나라 방문 때에도 방탄차 대신 ‘소울’이라는 소형차를 의전차량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대중교통과 대중의 음식으로 하느님 백성과 함께하기를 원하셨던 교황님은 모든 이가 하느님 앞에 똑같은 한 형제자매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시며 희망을 일구셨습니다. 전례복과 수단도 전임 추기경의 것을 고쳐 입으시던 그분은 결국 100달러 남짓한 돈을 남기시고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교황이 되어 처음 방문한 곳은 북아프리카의 난민들이 밀입국하는 항구인 이탈리아 남부 람페두사였습니다. 그분은 희망의 행동으로 난민들에게 희망을 잃지 않기를 강조하셨고, 또한 영원한 생명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신 분이셨습니다.

교황님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억울함, 어려움,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에게는 본인 할 수 있는 한에서 직접 전화를 걸어 위로하거나 때로는 직접 문제를 해결해 주는 행동으로 그들에게 희망을 일구어주셨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매번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몸소 고해성사를 베풀기 전에 그 자신이 영적인 아버지이시지만 한 나약한 인간으로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한 사제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에 대해 하느님의 자비를 구했던 행동으로 희망을 보여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바닥 밑으로 묻어달라고 하신 것도, 누구나 죽으면 지상에 남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여정으로부터 지나가는 나그네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석관이 아니라 목관에 그리고 바닥 밑에 묻혀있기를, 그리고 교황이라는 칭호는 쓰지 않고, 한 나약한 사람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새겨 모든 이들의 기도를 청했던 행동으로 죽을 운명에 처한 모든 이에게도 희망을 일구신 분이셨습니다.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도 함께 하심으로써, 함께 걷는 여정으로 교회가 희망을 일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 각자의 신앙 감각 안에 계신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면 교회는 물론이고 세상은 분명 좋은 세상이 될 것임을 믿고 평신도 수도자들과 함께 자리하여 열심히 경청하셨던 희망의 행동은 교회 공동체 안에 희망의 빛을 밝히신 분이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그립고 허망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분을 위해 기쁨과 찬사의 박수를 보내야 합니다. 주님의 품에 안기시기 전날 마지막으로 공적으로 하신 말씀은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부활을 축하드립니다.”라는 부활 축하 인사였습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복된 희망을 품고 그분의 ‘희망의 행동’이 우리 안에 살아있도록 합시다. 그것이 아마도 그분이 인류에게 바라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지상의 순례 여정을 ‘행동하는 희망’으로 평생 헌신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 한 인간으로 자신의 삶과 사제직을 우리의 도움이시며 사도들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의탁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영원한 안식을 얻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주님! 복된 희망을 품고 지상의 순례 여정을 마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영원한 안식을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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