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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증인
신앙의 증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에 대한 시복 시성을 추진하였고, 2014년 8월 16일 교종 프란치스코에 의해 서울 광화문에서 시복되었다. 춘천교구에는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그의 아들 홍인 레오가 있다.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38 - 1801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교만의 입교 시점은 명확하지 않으나 포천으로 이주해서 사는 동안 권일신과 교유하며 신앙을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아들 홍인에게 교리에 대해 자세히 들은 후 1794년 주문모(周文謨, 아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1801년 체포되어 서소문에서 순교하였다.
홍인(洪鏔) 레오
1758 - 1802
홍인(洪鏔) 레오
홍교만의 아들로 포천에서 태어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부친 홍교만을 설득하여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신유박해 당시 체포되어 포도청을 거쳐 포천으로 이송되어 1802년 순교하였다.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시복 시성을 추진한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 중 1차 대상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 시복되었고, 2차 대상자에 대한 시복이 추진 중이다. 이벽 요한 세례자와 심능석 스테파노가 포함되어 있다.
이벽(李蘗) 세례자 요한
1754 - 1785
이벽(李蘗) 세례자 요한
이벽은 포천 화현리에서 태어났다.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자 가족들에 의해 배교를 강요당하였고, 천주 신앙과 효(孝) 사이에서 신앙을 증거하며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심능석(沈能錫) 스테파노
1819 - 1868
심능석(沈能錫) 스테파노
심능석은 횡성 출신으로 1838년 샤스탕(Chastan) 신부에게 세례, 1845년 페레올(Ferréol)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계촌으로 피신하였다가 1868년 서울의 포교들에 의해 체포되었고, 포도청에서 형 집행 전 물고(物故) 즉 형 집행 전 순교했다.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이들을 한국 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으로 선정하고 시복 시성을 추진하고 있으며, 현재 교황청의 시복추진에 장애없음 판정을 받고 시복 추진 중이다.
춘천교구에는 이광재 티모테오, 김교명 베네딕토, 백응만 다마소, 고 안토니오, 라 파트리치오, 진 야고보, 손 프란치스코 신부가 포함되어 있다.
이광재(李光在) 티모테오 신부
1909 - 1950
이광재(李光在) 티모테오 신부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는 1936년 3월 28일 사제 서품을 받고 풍수원 본당 정규하 신부의 보좌로 사목을 시작하였다. 1939년 양양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여 사목활동을 하면서 월남하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도와주었다. 1950년 6월 초 김봉식 마오로(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 소속) 신부가 피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목자 없는 양들을 위해 이북으로 간 이광재 신부는, 6월 24일 체포·수감되었다가 10월 9일 순교하였다.
김교명(金敎明) 베네딕토 신부
1911 - 1950
김교명(金敎明) 베네딕토 신부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는 1939년 6월 24일 춘천교구의 첫 번째 사제로 수품되었다. 서품 직후 풍수원 본당에서 보좌 신부로 사목을 시작한 김교명 신부는 1942년 5월 평양교구로 파견되었다. 평양교구의 사제들이 계속 체포 또는 납치되고 평신도 지도자들도 속속 월남하여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여의치 못함에도 김교명 신부는 성가대를 직접 지도하며 제한된 환경에서 묵묵히 사목활동을 하였다. 1950년 6월 26일 새벽 2시경 정치보위부원들에 의해 연행되어 의주 보안서에 일주일간 억류되었다가 신의주 보안서로 이송되었는데, 그 후 소식은 알 수 없다.
백응만(白應萬) 다마소 신부
1919 - 1950
백응만(白應萬) 다마소 신부
백응만 다마소 신부는 1945년 11월 21일 명동에서 사제품을 받고, 북강원 이천 본당 출신 사제가 되었다. 서울 혜화동 본당 보좌로 사목을 시작했으나,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 박해받고 있는 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1947년 7월 초 평강 본당으로 부임했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평강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백응만 신부는 1949년 4월 초 사제관에서 체포되었고, 원산으로 끌려가 투옥된 후 다시 평양으로 압송되어 모진 고초를 당하다가 1950년 1월초 감옥에서 병사하여 순교했다.
고(Anthony Collier) 안토니오 신부
1913 - 1950
고(Anthony Collier) 안토니오 신부
고 안토니오 신부는 1939년 한국에 입국하여, 강릉(현 임당동) 본당과 횡성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지내며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사목구 주임의 본당 사목을 도왔고, 1950년 1월 소양로 본당의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다. 부임 직후인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미군 장교가 피신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본당을 지키다가 6월 27일 공산군에게 체포, 피살되어 순교하였다.
라 파트리치오(Patrick Reilly) 신부
1915 - 1950
라 파트리치오(Patrick Reilly) 신부
라 파트리치오 신부는 1948년 한국에 입국하여 원주(현 원동) 본당에서 주임 신부로 사목 하다가 1949년 묵호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부임한 지 일 년이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피란할것을 권유하는 신자들에게 ‘양들을 버리고 목자가 혼자 도망갈 수 없다.’면서 성당을 지켰다. 이후 남봉길 전교회장의 계속되는 권유에 결국 남회장의 집 골방에 숨어지내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의 밀고로 남회장과 함께 체포되었다. 다른 포로들과 함께 강릉으로 이송되던 중 옥계면 밤재골 앞에서 공산군에 의해 피살되어 순교하였다.
진 야고보(James Maginn) 신부
1911 - 1950
진 야고보(James Maginn) 신부
진 야고보 신부는 1936년 입국하여 광주에서 사목하다가, 1939년 4월 춘천교구가 설립되면서 북강원도 평강 본당에서 사목을 시작하였다. 일제에 의해 1941년부터 1945년까지 가택 연금되는 고초를 당하였고, 해방 후 1947년까지 홍천 본당 주임을 역임했다. 1949년 본국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서 삼척(현 원주교구 성내동) 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사목활동을 하다가 1950년 7월 2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었다. 공산군에게 신앙을 포기할 것을 종용받았지만 진 야고보 신부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고, 7월 4일 공산군에게 피살되어 순교하였다.
손 프란치스코(Francis Canavan) 신부
1915 - 1950
손 프란치스코(Francis Canavan) 신부
손 프란치스코 신부는 1949년 입국하였고,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교구장 퀸란 (Thomas F. Quinlan, 具仁蘭) 몬시뇰과 함께 지내면서 사목활동을 위해 한국말을 배우고 있었다. 퀸란 몬시뇰은 자신은 양들을 지키기 위해 피란을 거부하면서도 손 프란치스코 신부에게는 떠날 것을 권했으나, 손 프란치스코 신부는 떠나지 않았다. 7월 2일 퀸란 몬시뇰과 함께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을 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폐렴에 걸려 고생하던 손 프란치스코 신부는 자신을 위로하는 동료에게 “나는 성탄절 만찬을 천국에서 먹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1950년 12월 6일 압록강변 수용소에서 선종,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