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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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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복음의 전래

강원도지역의 천주교 전래는 1791년 신유박해 직후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방계 선조가 집안 식구들을 이끌고 강원도 홍천으로 이주하여 홍천 학익동과 횡성 풍수원에 모여 살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신유박해를 피해 신태보(베드로)와 함께 강원도로 피신한 이들과 신유박해로 체포된 이들 중 북강원 이천(伊川), 강릉, 양양, 정선, 평창, 양구, 화천 등지로 유배된 이들이 강원도에 자리잡았다.
1815년에는 김강이(시몬)가 강원도 울진에서 잡혀 원주 감영으로 이송되었고, 1839년에는 회양 출신 조신철(가롤로)이 잡혀 순교하였다. 병인박해 당시에는 강릉에서 잡힌 심능석(스테파노)을 비롯하여 홍천에서 잡힌 박 마르타 등 강원지역 관련 인물 50여 명이 확인된다. 또 1876년 김기호(요한) 회장이 블랑(Blanc, 白圭三) 신부를 모시고 이천, 평강, 춘천, 낭천, 철원의 공소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어, 박해를 피해 이주한 이들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복음의 전래

II. 본당의 설립과 확대

본당의 설립과 확대
1884년 파리외방전교회 드게트(Deguette, 崔東鎭) 신부는 이천을 중심으로 원산과 낭천 등에서 사목활동을 담당하고 있었다. 1884년 4월 이천 본당의 설립을 시작으로 1888년 횡성 풍수원, 1896년 포내(浦內), 원동, 1904년 용소막 본당이 설립되었다.
본격적으로 강원지역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1920년대로, 1920년 9월 곰실에 춘천 본당이 설립되는 것을 시작으로 양양, 금광리, 주문진, 홍천 본당이 차례로 설립되었다. 춘천 본당은 약사리로 이전하면서 현재 죽림동 주교좌 성당의 기틀이 되었고, 양양과 금광리, 주문진, 홍천은 이후 여러 본당을 분가시키면서 지역 교회의 모본당(母本堂)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III. 춘천지목구의 설정과 시련

1939년 4월 25일 춘천지목구가 경성대목구에서 분리․설정되면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광주지목구장 오웬 맥폴린(Owen McPolin) 신부가 초대지목구장을 겸임하였으나 임지사목(臨地司牧)은 하지 못하였다. 1940년 퀸란(Thomas F. Quinlan) 신부가 제2대 지목구장이 되었는데 당시 본당은 11개였으며, 신자 수는 약 9,000여명이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퀸란 지목구장을 비롯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들이 연금되면서 원활한 사목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춘천지목구장으로 복귀한 퀸란 신부는 그동안 침체되었던 지목구의 활성화를 위해 새로운 본당을 설립하면서 교세를 확장하였다. 1948년 6월 묵호를 시작으로 홍천 물구비, 삼척 성내동, 소양로, 동명동 본당 등 1965년 3월 22일 원주교구 분리 이전까지 19개 본당을 설립하면서 교세를 확장해나갔다.
1969년 5월 한국천주교회의 관할구역에 재조정되면서 춘천교구내 횡성군과 평창군의 평창면, 방림면, 미탄면, 대화면이 원주교구로 편입되었고, 포천군과 가평군의 포천, 청평, 가평 본당이 춘천교구에 편입되었다.
교구 설정 당시부터 춘천교구에서 사목활동을 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퀸란 주교와 박 토마스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제들은 묵호의 남호고등공민학교, 강릉 성심중학교를 설립하고, 춘천 성심여자대학교 등을 유치하는 등 교육 선교에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한국전쟁 직후 열악한 의료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1955년 11월 춘천의 성 골롬반의원을 시작으로 삼척 성 요셉의원, 강릉 갈바리의원, 포천 평화의 모친 의원을 개원하여 무의촌 순회 진료 등 지역 의료 환경을 개선하였으며, ‘행복한 가정 운동’및 가정 호스피스 활동을 통한 의료선교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문화가 다르고 언어적 소통도 자유롭지 못한 환경 속에서도 춘천교구에서 사목하는 55년 동안 신앙 안에서 신자들과 하나되어 41개 본당을 설립하며 교세를 확장하였다.
춘천지목구의 설정과 시련

IV. 새로운 도약

1994년 11월 1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장익(張益, 십자가의 요한) 신부를 제6대 춘천교구장 주교로 임명하였다. 교구 설정 55년 만에 한국인 주교로는 처음 춘천교구장에 임명된 장익 주교는 교회의 뜻과 규범에 따라 춘천교구의 체제를 체계화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전개하였다. 더불어 교구청을 신축하여 이전에는 주교관에서 이루어지던 교구청 업무가 보다 전문화 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새로운 도약 1
춘천교구 사회복지회 법인을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복지사업을 전개하였다. 또한 ‘한 솥밥 한 식구’ 운동을 실시하여 현재도 진행하고 있으며, 북녘 동포의 식량난 해결을 위한 ‘빵도 하나 우리도 한 몸’이라는 호소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장익 주교는 재임 기간 동안 성서 사목의 활성화와 소공동체 그리고 가정사목에 관심을 기울이며 현대사회에서 급속하게 증가하는 무관심과 가정 붕괴를 막기 위해서 교회가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강조 하였다. 또 재임 기간 15년 동안 16개의 본당을 신설하며 춘천교구가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010년 1월 28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김운회(金雲會, 루카) 주교를 제7대 춘천교구장 주교로 임명하였다. 김운회 주교는 재임 기간 동안 6개 본당을 신설하였으며, 복자 홍인(레오)의 순교터와 교구 성직자 묘역, 그리고 양양 성당을 교구 성지로 선포하여 이곳을 순례하는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을 따를 수 있도록 하였다.
김운회 주교는 분단된 교회의 현실 속에서 춘천교구장과 함흥교구장 서리로서 남북 화해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헌신했다. 또한, 수십 년간 청소년 사목에 몸담으며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사제 양성에 큰 관심을 기울였고, 이를 통해 예비 신학생 기숙사를 운영하며 춘천교구와 함흥교구의 성소자들을 다수 배출했다.
사목 표어인 “사랑으로 하나 되어(UNANIMES CHARITATE)”는 김운회 주교의 사목 철학을 잘 드러내는데, 그는 재임기간 중 사랑을 중심으로 춘천교구 공동체의 일치를 이루는 데 힘썼다. 2020년 11월 21일, 춘천교구장 및 함흥교구장 서리직에서 퇴임한 후, 현재는 고(故) 장익 주교가 머물렀던 춘천 실레마을 공소 사제관에서 거주하고 있다.
새로운 도약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