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교구와 언론
교구와 언론

교구와 언론

기타[고별 인터뷰] 천주교 춘천교구장 물러나는 張勉 전 총리 3男 張益 주교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10-03-22 조회수 : 2686
[고별 인터뷰] 천주교 춘천교구장 물러나는 張勉 전 총리 3男 張益 주교

 

“난 하나의 물음으로 신앙의 길을 찾아나선다”

 

“하느님은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안 보이고 계실 것 같으면서도 안 계신, 그래서 찾아나서는, 찾아 묻게 되는 존재”

⊙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張勉 전 총리의 3男. 서른 살 때 사제 서품.
    미국·벨기에·오스트리아·이탈리아·타이완 등지에서 수학
⊙ 1984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한글 가르쳐 ‘103위 한국 순교 성인’ 미사집전 이뤄내
⊙ 교황의 특사로 여러 차례 방북. “북한의 김일성 부자(父子) 우상화, 솔직히 겁난다”
⊙ “신앙이란 심연(深淵)의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것과 같아”

張益
⊙ 1933년 서울 출생.
⊙ 경기중 5학년 당시 한국전쟁 발발로 중퇴. 미국 메리놀대 인문학 학사, 벨기에 루뱅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박사과정 수료,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 대학원 석사, 국립 타이완대 대학원 수학.
⊙ 1963년 3월 사제 서품. 1976년 서울대교구장 비서실장, 서강대·가톨릭대 교수, 1994년 춘천교구
    주교로 착좌, 2006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역임.

 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김포공항에 도착,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락호아(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라며 공자 말씀으로 시작된 방한(訪韓) 성명을 우리말로 읽어 내려가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교황의 우리말 성명 초안을 잡고, 직접 교황에게 한글을 가르친 이가 바로 장면(張勉) 전 국무총리의 3남(男) 장익(張益·78) 주교다. 1933년 11월생인 그는 서른 살 때 사제(司祭) 서품을 받았다. 경기고 5학년 때 6·25가 터져 학업을 중단하고 당시 미국 대사로 있던 아버지를 따라 도미(渡美), 미국 메리놀대(인문학 학사), 벨기에 루뱅대(철학과 박사과정),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신학과 석사)를 거쳤다. 20대를 해외에서 철학과 신학을 배우며 편력한 뒤에는 4·19, 5·16 등 모국(母國)의 정치 격변으로 귀국하지 못했다. 2공화국 붕괴와 장 총리의 실각을 가슴 아프게 지켜봐야 했다.
 
 사제가 된 뒤 귀국해서는 당시 서울대교구장이던 고(故)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의 비서(1976년에 비서실장이 된다)가 됐고 1978년부터 15년 동안 맏형 장진(張震)과 함께 서강대 강단에서 종교학을 가르쳤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당시 로마 그레고리안대에서 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는 바오로 2세의 우리말 미사 집전을 돕고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을 탄생시켜 한꺼번에 100명이 넘는 성인을, 로마 교황청 밖에서 시성(諡聖)하는 첫 기록을 남길 때 한국 천주교회와 교황청 간 메신저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94년 11월부터 천주교 춘천교구 주교로 착좌(着座)했다. 3월 25일은 교구장으로서 마지막 날이다. 주교가 된 지 꼭 16년 만이다.
 
 추기경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성덕(聖德)과 학식(學識)을 겸비한 장 주교는 춘천교구장에서 물러나고서도 강원도에 머물며 사제가 없는 공소(公所·본당보다 작은 교회단위)에서 미사를 집전할 계획이다. 기자는 장 주교의 삶과 그가 만난 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춘천 효자동 성당으로 향했다.
 
 ―춘천교구장이 함흥교구장을 대행하는 자리인데. 함흥엔 가 보셨나요?
 
 장 주교는 여러 번 방북할 정도로 북한과 인연이 남다르다. 1987년 6월 평양에서 개최된 비동맹 정상회의 때 교황청의 옵서버 자격으로, 이듬해 10월에는 교황청 파견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하는 등 바티칸과 북한의 관계 증진에도 크게 공헌했다. 또 2007년 10월에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함께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방북했다.
 
 “함흥엔 못 가 보고 원산엔 가 봤죠.”
 
 ―북한과 인연이 특히 깊다고 하던데요.
 
 “인연이라기보다는 심부름을 좀 했죠.”
 
 장 주교는 1997년부터 춘천교구 차원에서 대북지원사업인 ‘한솥밥 한식구’ 운동을 펴왔고 남북적십자사가 합의한 ‘지정기탁제’를 활용해 교회 내에서 처음으로 ‘북(北) 강원도(휴전선 북쪽 강원도)’를 지원해 왔다. 그 덕분에 ‘DMZ 평화상’(강원도 제정)을 수상했다.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가 겁나”
 
 ―통일이 언제 될까요.
 
 “허허, 그걸 누가 알아요. 그렇게 물으시면 답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요.”
 
 ―북한에도 예수님이 계시겠죠.
 
 “허허. 그거야… 그렇죠. 북쪽 땅에 천주교의 옛 터전을 되찾겠다거나 천주교 세(勢)를 확장해야겠다는 게 목표가 아니에요. 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있는 게 아니잖아요. 모든 것을, 모든 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북한과 북한 사람을) 품 안에 안으려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외국에서는 북한을 김일성(金日成)·김정일(金正日) 부자를 믿는 종교집단으로 보는 시각이 있잖습니까.
 
 “체제 유지를 위해 그렇게 몰고 가는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북한) 체제나 저들이 명분으로 내세우는 얘기하고, 북한 주민들의 삶과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일성 부자를 신처럼 우상화한다는 점은 어떻게 보세요.
 
 “겁나요, 솔직히 말해 겁이 나요. 그렇게 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평생 사제의 길을 걸었는데, 세례를 베푼 이들 중 기억에 남는 분이 있습니까.
 
 “누구 하나를 떠올리라고 하면 쉽지는 않은데… 이름 없는 분 중에서 나름 참다운 삶을 사시고 고통받던 중에 어떻게 어떻게 세례를 받은 분들이 기억에 남죠.”
 
 ―문인(文人) 중에 한운사(韓雲史) 선생에게 영세를 줬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그렇기는 한데, 그분을 잘 몰라요. 문인 중에선 구상(具常) 선생을 존경했지요. 끔찍이 저를 생각해 주시고. 뭐라고 할까, 마음이 통했다고 할까?”
 
 ―시인 김광균(金光均) 선생에게도 직접 세례를 줬다던데, 기억 나십니까.
 
 “그 어른도 구상 선생과 친분이 남다른 사이였어요. 저와 처음 만날 당시 와병(臥病) 중이셨는데 구상 선생이 가끔 찾아뵈라 하셔서 여러 차례 뵙고 성북동 성당에서 영세를 주었지요. 그 광경을 보고 다른 문인들이 많이 놀랐습니다. 쉽사리 영세받으실 분이 아니셨기 때문인가 봐요. 그분은 문학은 물론, 현대사의 시대적 갈등이라든지 인간의 삶과 종교에 대해 깊이 생각하셨고 병고(病苦) 중에도 책을 얼마나 많이 읽으셨는지 몰라요. 오랜 사색 끝에 영세를 받겠다고 하셔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으셨지요.”
 
 ―그때 구상 선생이 대부(代父) 역할을 하셨다지요?
 
 “네. 영세를 받으실 때 후배 문인들이 많이들 오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