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을 넘긴 시어머니가 계시는 요양원 방은 정갈하고 밝은 햇살이 방안 가득 들어차 있었다. 수녀원에 딸린 요양원은 수녀님들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 있어 마음 한켠 요양원에 계시게 한 데 대한 죄송함이 조금은 감해지는 듯하다.
치매가 조금씩 진전되어서 아주버님 부부가 일하러 나가면 혼자 계시는 것이 위험하다 싶어 아주버님 집에서 걸어서 7~8분 거리의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요양원으로 들어가셨다. 그러나 치매가 점점 심해져서 우리 얼굴도 못 알아보게 되었다. 그날은 남편과 둘이서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머리카락은 전보다 한층 더 하얗고 더욱 바짝 마르셨다. 오랜 세월의 고된 일로 마디 굵은 마른 큰 손만이 크게 두드러져 보였다. 잠든얼굴은 창백하고 파리한데 광대가 드러나고 볼은 움푹 팬 채 미동도 않고 눈만 강고히 감고 있었다. 굵은 이마의 주름과 자글거리는 얼굴은 어머니의 살아오면서 겪은 고단하고도 애달픈 순간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희고 고왔던 피부와 총기 가득했던 눈동자는 세월이 다 가져가고 의식은 영혼을 떠난 듯 웅크린 등이 굽은 가엾은 몸이 애처로이 떠 있는 듯하다.
착잡하다. 시집와서 30여 년 동안 어머니 곁에서 함께 했던 순간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순간 어머니의 눈이 반짝 떠졌다. 나는 어머니 옆으로 바짝 다가가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지 처음에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어머니, 어머니, 저 지우 엄마에요”.
그러자 미간이 힘들게 찌그러 들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다 점점 커지는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신다. 우리 둘은 그렇게 얼마간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서로 마주 본다. 가슴이 아프다. 정신의 한쪽은 혼미하고 한쪽은 의식을 끌어올려 나를 알아보신다. 가슴 속에서 통곡이 터져 나온다. 너무 죄송하다. 나는 정말로 내가 미련했구나 하는 생각에 주저앉아 울고 싶어진다. 몇 달 전에 손주들을 보고 싶어 우리 집을 오셨다. 연금을 받으면 무조건 온 식구들에게 용돈을 주신다. 돈을 가지고 우리 집에 오셔서 아이들 셋과 우리 부부에게 용돈을 주신다.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어 주셨다. 아이들이 먹고 싶다고 하면 무엇이든 만들어 주신다. 빼어난 음식 솜씨, 분명히 기억력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을 텐데 맛나게 만들어 주셨다. 큰 댁 손주 셋, 우리 집 손주 셋은 모두 이 헌신적인 할머니를 너무 좋아했다. 따스한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겨울철에 솜 이불 두르듯이 두르고 쑥쑥 잘 커서 지금은 다 잘살고 있다. 우리 아이 셋은 서른이 넘을 때까지 냉담 한번 없이 성당에 잘 다니고 묵주기도도 잘 바친다. 할머니의 기도 생활을 바로 옆에서 잘 보아왔기 때문이리라.
어머니는 새벽 4시쯤에 일어나서 기도를 시작한다. 새벽 기도를 끝내고 새벽 미사를 다녀와서 잠시 쉬었다가 또 기도를 이어간다. 나는 중간중간에 깨어 어머니의 기도하면서 내는 기침 소리며, 가끔씩 소리내어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단잠에 빠진다. 아침을 드시고 또 기도한다. 커다란 성서를 펼쳐놓고 성서를 읽으신다. 점심 먹고 또 기도하시고 반찬을 이것저것 만든다. 그리고 또 기도한다. 저녁 드시고 또 기도한다. 이런 수도자, 은수자와도 같은 기도인의 성서는 하도 읽고 필사해서 다 낡았다. 신심 서적도 쉬임없이 읽고 모르면 나에게 물으신다. 사실 체계적인 묵상 기도와 성서교리 공부 없이 어떻게 이렇게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의지하는지 놀랍기만 했다. 막내며느리인 내가 신앙생활에 열심이라고 무조건 믿고 예뻐해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얘야, 오늘 새벽 미사 때 성전 안에서 이상한 일이 있었어. 성전에서 갑자기 장미향이 나는 거야“ 나로서도 신기한 일이었지만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께 주님께서 위로해 주셨나 보다 하고 그냥 지나쳤는데 다음 날도 성전에서도 집에서도 장미향은 계속되었다.
90평생 혼자 식당에 가서 맛난 것을 사 먹어 본적이 없다고 하셨다. 역사 내 어묵 떡볶이집에서 어묵 한두 꼬치 사 드신 게 그나마 최고의 호사였다. 친구들이랑 나들이나 식사도 다 거절하셨다. 나중에 들으니 돈을 다 모아 우리에게 주고자 하셨다 한다. 돈을 모아 아주버님과 형님의 고가 옷을 마련해 주고 손주들 사업자금도 마련해 주고 우리 아이들의 대학 학비도 대 주셨다. 올라오시면 나를 대동하고 백화점에 가서 자식들과 손주들의 옷을 장만하신다. 거짓을 모르는 어머니의 총기 있는 눈빛은 꼿꼿한 허리와 함께 그렇게 계속되었다. 나는 어머니의 온몸과 영혼에서 당신의 세례명(로사)처럼 장미향은 물론이고 백합향도 나는 듯했다. 지금도 나는 어머니를 향기로서 기억한다.
가끔씩 나를 옆에 앉히고는 당신이 기부하는 단체의 소식지나, 영수증, 감사 편지 등을 보여 주신다. 돈이 들어오면 무조건 기부하는 단체나 병원, 나자로 마을에 먼저 보냈다. 후원처가 대 여섯 곳은 족히 되는데, 거르는 달이 없었다. 후원한 지가 이 삼십 년은 족히 되는 것 같다. 그런 어머니가 일생일대의 큰 어려움을 만났다. 기도문의 끝부분들이 생각이 잘 안 난다고 책을 보면서 기도하시는 것이었다. 삼 사십 년을 매일 그렇게도 많은 같은 기도문을 바쳤는데 기도문이 생각 안 난다고 한다. 나이가 드시니까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넘겼다. 그러나 어느 날은 아파트와 마주한 언덕배기에 여우와 늑대가 나타난다며 굉장히 무서워하셨다. 나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언덕에 박힌 돌더미며 잡목과 나무숲 사이를 살피곤 했다. 그러나 이내 나이가 드니까 마음이 많이 약해지셨나 보다 하고 또 넘겼다.
그러다가 “오늘 지우는 왜 안 오니? 몇 시에나 오니?”하고 큰딸의 귀가를 걱정한다. 저녁 7시도 안 되었는데. “조금 있으면 와요.” 그런데 20분도 채 안 지나 또 오셔서는 “지우가 왜 안 오니? 몇 시에 오니? 하고 또 묻는다.” 30분쯤 있으면 들어 올 거에요.” 그런데 10분쯤 있다가 또 오셔서는 “지우가 안 온다. 몇 시에나 오니?” 5단 묵주를 한 손에 늘어뜨리고 많이 불안해하신다. 나는 드디어 짜증을 냈다.” 조금 있으면 온다니까요”하고 화를 내며 어머니의 죽 늘어뜨린 묵주와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그때 정말 바보 천치였다. 가까운 가족 일가친척 중에 치매를 앓는 분을 본 적이 없어서 어머니의 증상이 치매라는 것을 상상도 못 했다. 무식한 최소한의 상식도 없는 지금도 생각하면 미치도록 후회되는 일이다. 빨리 병원에 모시고 갔어야 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며칠을 지내고 시댁으로 내려가셨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양반이 어떻게 시골 시댁까지 무사히 찾아갔을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부끄럽고 아찔하다.
이후 어머니의 치매는 더욱 나빠져만 가서 결국 요양원에 입소한 것이다. 그래서 이날 남편과 찾아와 어머니와 며느리는 함께 눈물을 흘린다. 어머니와 나는 영적 동지였고 영적 자매였다. 어머니와 나는 오랫동안 시댁과 우리 가정이 성가정이 되게 해 주십사하고 기도해 왔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항상 맛있는 밥을 지어 차려주고는 또 기도하신다. 수십 년 동안 매일매일 묵주기도를 몇십 단 씩 바쳤으니 성모님 앞에 쌓인 장미 송이는 몇 송이나 될까?
그런데 그 좋아하는 성모송의 끝부분이 생각나지 않고 급기야는 성모송 전체를 잊으셨다. 목숨 걸고 온 존재를 다 해 사랑해 왔던 주님과 그의 어머니에 대한 기도문을 조금씩 잊어가면서 얼마나 두려웠을까? 이제는 묵주를 알아보지도 못하니 쥘 수도 없고 우리가 끼워드린 팔찌 묵주만 헐겁게 덩그러니 바싹 마른 팔 위에 무심히 끼워져 있다. 사실 우리 부부도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만날 수 있었다. 슬슬 노총각이 되어 가던 막내아들의 결혼을 지향하고 ‘묵주의 54일 기도’를 바치고 난 후 우리는 다니던 본당에서 만나서 일사천리로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다. 나는 서른이 넘는 그때까지 어떤 남자에게도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의 남편을 성당활동 중에 만났는데 이 사람과 함께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남자였다. 예수그리스도의 향기, 그것은 어머니께도 나는 향기였는데 그에게서도 어머니의 냄새가 났다. 우리의 결혼을 위해 기도해 주신 어머니 덕분에 사십여 년이 되어가는 우리의 결혼생활은 쭉 행복할 수 있었다.
아버님은 젊어서부터 아주 오랫동안 바깥으로 나돌며 집을 비우셨다. 자연히 생활비며 육아며 교육은 전부 어머니 몫이었다. 그 고통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것이다. 열심히 억척같이 돈을 벌어 두 아들을 착하고 바르게 신앙심 깊은 아들들로 키워내셨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집안을 전혀 돌보지 않는 아버님에 대해 불평하는 말을 다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미움과 원망과 눈물을 가슴 속에 다 쌓아 놓았을까? 그것은 아니었다.
아버님이 늙고 병들어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버님의 병간호를 하면서 아버님이 대세를 받도록 이끌어 주셨다. 우리 막내딸이 아버님을 쏙 빼닮았다고 예뻐하셨다. 평생 당신을 힘들게 했던 아버님을 닮았다고 예뻐하다니!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어머니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는 이해가 불가하다. 아버님은 편안히 임종하시고 얼마 있다가 어머니는 당신이 돌아가시면 아버님과 함께 합장해 달라고 하신다. 어머니의 사랑은 정말 무섭도록 올곧고 이해타산이 전혀 섞이지 않은 신비로운 것이었다. 어머니를 많이 힘들게 했던 친척들이 있었는데 그들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는 법도 없이 그저 기도해 주셨다. 오히려 그들을 칭찬하고 안쓰러워하셨다.
삼 사십 년 교회 안에서 이런저런 신심 단체며 성서공부를 하면서 나도 크고 작은 상처로 괴로워 잠 못 이루는 밤도 꽤 많았다. 이해하려고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형제자매들. 집안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릴 듯이 흔들어 대는 그들을 바라보며 항상 침묵과 기도로 인내하며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두 어머니 덕분이다.
성모님의 일생을 묵상하며 마음을 다해 드리는 로사리오는 살아계신 성모님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 주었다. 성모님의 음성을 듣는 듯 성령의 힘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또 한 분은 우리 시어머니시다. 당신을 괴롭히는 아버님과 친척들에 대해 험담 한 번 안 하고 오히려 가여이 여기시며 기도 안에서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그 올곧은 사랑은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자꾸 떠올리게 했다. 나에게 상처를 준 형제자매들에 대해 어머니처럼 조건 없이 온전히 사랑해 버리는 그 사랑이 되지 않을 때 어머니를 떠올린다. 어떤 방해도 분한 마음도 없이 천상 아버지 대전에 화살처럼 일직선으로 쏘아 올리는 화살.
일러스트=문채현
그런 할머니의 순결하고 따뜻하고 깊은 사랑을 받은 당신의 여섯 명의 손주들은 할머니의 기도 덕분에 다 잘살고 있다. 지금은 서른을 넘긴 우리 아들은 할머니를 너무 좋아했다. 중학교 때 할머니가 큰댁으로 내려가셨다는 말을 현관에서 듣고서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떨구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날은 하루종일 슬퍼했다. 그런 아들이 군대를 갔는데 어느 이른 새벽에 부대의 소대장이라며 전화가 걸려왔다. 할머니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하루종일 너무 슬퍼하며 아무 일도 못해서 혹시나 탈영하지 않을까 상관들이 많이 걱정하고 있으니 휴가를 보내면 아들을 잘 살펴달라는 것이었다. 급히 휴가를 나와서 할머니를 방문했는데 바짝 마르고 치매로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자 많은 충격을 받고 너무 괴로워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들에게 어리석은 물음을 해 보았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니? 조금 생각하더니 엄마가 서운하겠지만 자기는 할머니를 제일 좋아하고 그다음이 엄마란다. 아! 손주를 그렇게 사랑하더니만 그 손주도 할머니를 제일 좋아한단다. 어머니의 손주를 바라보는 눈길, 미소, 빨래며 맛 나는 음식을 해 주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지금도 아들이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곧 임종하실 것 같다고 수녀원에서 연락이 왔다. 남편과 나는 착잡하고 떨리는 마음을 누르며 수녀원 측에서 내준 임종자를 위한 방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계신다. 의식은 없고 손에 차고 있는 오래된 헐거운 팔찌 묵주만이 당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내고 있다. 평생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며 하루종일 기도로 주님과 함께했던 어머니는 생사기로에서도 그저 순하고 순한 순종적인 어머니!
형님 내외와 우리 부부 넷은 한밤중 병실에서 묵주기도를 큰 소리로 바치기 시작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너무나도 아쉽고 서운하지만, 저세상 천상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어머니의 마지막 임종을 위한 묵주기도를 바쳤다. 이제는 오로지 우리넷의 묵주기도에 기대고 당신의 영혼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며 성모님을 의지하면서 자신을 마지막 제사로 바치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우리의 기도 속에서 배웅을 받으며 귀천하셨다.
어머니와 함께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마구 스쳐 간다. 신앙 이야기를 할 때면 두 눈을 반짝이며 순진무구하게 듣던 어머니, 우리 집에 다니러 오시면 주일 미사 후 함께 먹었던 성당 앞의 본죽 집. 나는 죽이 먹고 싶다고 어머니께 작은 떼를 쓰면 그래 먹자 하시며 나를 앞에 앉히고는 맛있게 드시던 어머니. 마치 소녀처럼 여러 예쁜 꽃을 마련해서 성모상 앞에 꽂곤 했던 어머니의 모습들. 우리 집에 가끔 신부님 수녀님들이 방문하시면 온갖 정성으로 대접하신다. 성직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존경은 엄청났다. 나는 십여 년간 체나콜로(사제들을 위한 기도모임)에서 신부님들을 위해 기도해 왔는데 이 또한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사제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경과 사랑의 태도는 내가 체나콜로에서 활동하며 가지는 마음 자세를 은연중에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그렇게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형님과 우리 가족은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다. 자식들도 배우자들도 손주들도 다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아주버님 가정은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주교님께로부터 성가정 축복장을 받았다. 얼마 전에 형님께로 부터 전화가 왔다. 자네가 하라는 대로 묵주의 54일 기도를 두 번 받쳤는데 지향 모두가 이루어졌어 며늘아기가 몇 년 동안 불임으로 아기를 갖지 못했는데 아기도 가졌고 또 한 가지는 아주버님이 많이 변하셔서 천사 같다고. 요즘이 내 평생 가장 행복한 때라고. 이제 당신도 매일 묵주기도 20단을 바치고 있노라고, 너무 행복하다고.
큰 조카는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대학원 공부를 하느라 무척 바쁜데 할머니가 마련해 놓은 십자가와 성모상 앞에서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우리 아이 셋도 서른이 넘었지만 한 번도 냉담 없이 기도생활과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엄마 아빠와 화목하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어머니의 헌신적인 기도생활과 겸손하고 성실하고 정직한 모범으로 우리를 깊이깊이 사랑하신 열매임을.
몇일 전에 형님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연말에 우리 부부와 당신들 부부 넷이서 여행 가자고 어디가 가고 싶냐고 묻는다. 나는 올해 바빠서 바다를 한 번도 못 갔다고 했더니 서해의 삼길포항에 가서 바다낚시도 하자고. 모든 비용은 당신이 다 댈 테니 몸만 오라고. 우리는 자그마한 잔잔하고 평화로운 삼길포항의 중턱에 있는 펜션에 들었다. 널찍하고 깨끗한 펜션에서 짐을 풀고 이야기도 풀었다. 아주버님은 내게 연신 고맙다고 한다. 아이들도 다 잘 자라 장성해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남편도 성당에서 수십 년 동안 연령회와 전례단에서 봉사하면서 성가정을 이루고 있으니 너무 고맙다고 한다.
펜션에서 밥도 해 먹고 떠온 회도 먹고 외식도 하고 방조제도 걸으며 사진도 찍었다. 커피 한잔도 못 사게 하며 다 사주신다. 단돈 십 원도 못쓰게 하신다. 애초에 나에게 살갑지 않은 두 분이었지만 점점 나이가 들면서 챙기고 예뻐해 준다. 살갑고도 깊은 애정이 넘칠 것만 같다. 어머니의 미소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시집와서 형님 부부와 다툴 뻔한 순간도 있었지만, 우리 넷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머니를 위해 다 참을 수 있었다. 이렇게 큰 변화가 시작된 것은 형님과 둘이서 신앙 대화를 진지하게 나누면서였다. 54일 묵주기도와 매일 20단씩 바치는 묵주기도는 형님 가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나는 하늘나라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천국에서도 당신 자손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기도해 주심을 믿는다. 나는 자주 어머니를 불러 함께 기도하자고 조른다. 어머니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알기 때문에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청할 때 꼭 함께 해 주심이 믿겨진다.
가을 하늘 아래 넓은 천일홍 밭의 수십만 수백만 송이 천일홍 핏빛 꽃송이들은 어머니의 자식 사랑의 눈물인 것도 같고 자식을 위한 성모송인 것도 같다.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고 남편은 잠잘 때 묵주를 꼭 손에 쥐고 기도 하며 잠든다. 아침에 일어나서 남편의 손을 보면 묵주 알을 잡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어머니의 품속에서 성모님께 안기어 기도한다. 아이들도 할머니를 자주 이야기하며 그리워한다. 이제 이 추운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봄이 찾아올 것이다. 아지랑이가 풀어지고 꽃망울이 여기저기서 터질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유품을 다 정리했지만, 나랑 백화점에 가서 샀던 연보라 비둘기색 자켓만은 내 장롱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많이 좋아하셨던 옷이다. 하얀색 블라우스를 바치고 연보라 비둘기색 자켓을 차려입은 고운 모습은 내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다. 나도 봄이 오면 어머니의 옷으로 똑같은 차림을 하고 라일락 꽃을 꺾어 성모상 앞에 봉헌하며 어머니께 또 함께 기도 하자고 조를 것이다. 내가 언제나 부르며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시어머니와 성모님 두 어머니의 눈물을 기억하며 지상 여정을 힘차게 걸어갈 것이다. 이 두 어머니의 눈물은 내 마음속에 아프지만 찬란한 보석으로 박혀 있다. 이 보석이 나로 하여금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준다.
그리운 로사 어머니 사랑합니다. 마음을 다해 존경합니다. 자식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