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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식 개관

작성자 : 홍기선 작성일 : 2014-08-06 조회수 : 2651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개관


1. 시복이란

1> ‘복자’와 ‘시복’의 개념
복자(여자: 복녀) 福者 [라]Beatus(Beata) [영]Blessed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 복자로 추대함)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남자는 복자, 여자는 복녀라 한다. 복자가 시성(諡聖, 성인으로 추대함)되면 성인(Saint, 여자는 성녀)이 된다.
본래 ‘복자’는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을 뵙는 행복을 누리는 영혼을 이르는 말로, 신약성경 산상설교의 첫 부분인 ‘행복 선언’(마태오 복음서 5장 3-12절)에서도 ‘행복하여라’(라 Beati, 영 Blessed)라는 말이 나온다. ‘복되다’는 것은 단순히 즐겁다, 기쁘다는 차원을 넘어 완전한 선을 영원히 소유하고 사랑하며 그 선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가톨릭대사전 참조>


시복 諡福 [라]beatificatio [영]beatification
가톨릭교회가 거룩한 삶을 살았거나 순교한 이를 공경할 복자로 선포하는 교황의 공식 선언. 교회가 시복 시성을 하는 이유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분들을 기리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이끌기 위해서다.
복자에 대한 공경 예식은 성인 공경과 달리 전체 교회에 의무적인 것이 아니다. 복자에 대한 공적 경배는 교황이 허락한 특정 교구와 지역 또는 수도회 안에서만 이뤄진다. (성인은 전 세계 교회에서 공적 공경을 하게 된다.)
복자로 선언된 이는 다음과 같은 공적 경배를 받을 수 있다.<가톨릭대사전 참조>
1) 복자라고 호칭되며 한정된 지역에서 한정된 공경을 받는다.
 (124위 순교 복자의 경우 한국 교회에서만 공경)
2) 신자들의 기도의 중재자로서 교회의 공식 기도문 안에 포함된다.
3) 신자들이 복자의 유해를 공적으로 경배하도록 전시될 수 있다.


2> 가톨릭교회의 시복 추진 절차
시복의 첫 단계인 예비심사는 시복 후보자가 살던 지역의 관할 교구장에 의해 진행된다. 생전에 모범적인 성덕을 닦은 이와 순교한 이들 중 평판이 높은 이들을 교회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하면, 교회법에 따른 시복 절차가 이뤄진다.
예비심사의 절차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시복시성 대상자 선정(선정위원회가 함. 대상자들을 ‘하느님의 종’이라 부른다)
2) ‘하느님의 종’들의 생애와 행적 등에 대한 약전을 작성하여 시성성에 보낸다.
시성성에서는 이를 검토하고 시복시성을 추진하는데 “장애 없음”을 알린다.
3) 시복 재판: 시복시성의 모든 절차는 재판 형식으로 엄격히 진행된다.
   ㄱ. 증인(주로 역사가들) 심문: 순교 사실이나 성덕의 평판에 대하여 심문한다.
   ㄴ. 현장 및 증거 조사: 생가, 묘소, 순교지 및 순교자의 성덕을 증명할 자료를 조사한다.
   ㄷ. 기적심사: ‘하느님의 종’에게 전구를 구하여 받은 은혜(기적)를 심사한다. 시복을 위해서 기적심사는 증거자에게만 요구된다. 순교자는 기적이 필요 없이 순교 사실만 확실하면 시복될 수 있다.
예비심사는 관할 교구장이 주관하며, 예비심사 완결 후 조서와 첨부문서를 모두 포함한 시복 문서 전체가 교황청 시성성에 전달되면 역사위원회, 신학위원회, 주교와 추기경 회의 순서로 시복 심판이 이뤄지고, 교황에 의해 최종 재가된다.


2. 명단과 약전, 통계

1> 124위 순교자 약전(시복 미사에서 낭독될 내용)
한국 천주교회는 “순교자들의 교회”로 불립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는 한국 교회의 시작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살아있는 초석”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의 수가 더해져 초기 한국 순교자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그들의 신앙은 한국 교회와 그 큰 선교 열정의 활력을 드러내는 눈부신 증언입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는 신유박해(1801) 순교자가 53위(42,7%)로 가장 많습니다. 신유박해 이전 순교자로는 신해박해(1791) 3위, 을묘박해(1795) 3위, 정사박해(1797) 8위입니다. 신유박해 이후 순교자로는 1814년 1위, 을해박해(1815) 12위, 1819년 2위, 정해박해(1827) 4위이며, 기해박해(1839) 18위, 병인박해(1866-1888) 20위입니다. 순교지별로 한양 38위, 경상도 29위, 전라도 24위, 충청도 18위, 경기도 12위, 강원도 3위의 순교자가 나왔고, 한양에서 가장 많이 순교하였습니다.
124위 순교자들은 신앙의 탁월한 영웅성을 드러내면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떳떳이 고백하며 순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정조 15년 (1791년) 신해박해로 한국의 첫 순교자가 된 윤지충 바오로는 하느님을 “만민의 위대하신 아버지”로 여기며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만민의 아버지이신 주님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윤 바오로 순교자는 순교의 죽음을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순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조선 시대, 임금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성은 사회를 형성하는 지배적 가치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순교자는 임금을 공경하고 부모를 매우 사랑하였지만, 만민의 임금이시고 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그 무엇보다, 어떤 물질 재화보다, 이 지상의 그 누구보다도 우위에 두었습니다. 더군다나 세계 천주교 역사에 유례가 없는, 선교사를 통하지 않고 자생적으로 뿌리를 내리던 시절의 참다운 첫 희생이었기에 당연히 윤 바오로 순교자가 이 한국 순교자 그룹의 대표자가 되는 것입니다.
124위 순교자들의 풍요로운 명성은 그들의 교구 안에서 그리고 한국 교회 전체 안에서 오늘도 생생하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들의 목자들과 함께 이 순교자들의 영성을 드높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명성은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집전된 103위 시성식 직후부터 현저히 일깨워지고 활발하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순교자들이 갇히고 문초를 받고 순교의 영광을 얻은 형조, 의금부, 포도청, 전옥서, 서소문 밖 형장을 연결하는 그 중심인 여기 광화문에서 많은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전국의 교우들이 모여 교황님의 집전으로 시복 미사를 드리는 기쁨의 시간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2> 복자 124위 축일은 5월 29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14년 춘계 주교회의 총회를 통해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기념일을 5월 29일로 정해 교황청 경신성사성에 보고했다.
1839년 5월 29일은 124위 순교자 중 5위(이일언, 신태보,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가 전라도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날이다. 당초 주교단은 124위의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의 순교일인 12월 8일을 검토했으나, 이날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인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과 겹치고, 124위 순교자 다수가 순교한 12월이나 1월은 연말 연초이므로 축일을 지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월(25명 순교) 다음으로 순교자가 많은 5월 중에, 전주(숲정이)에서 가장 많은 이가 순교한 날인 5월 29일을 기념일로 정한 것이다. 교황이 이들을 복자로 선언하면, 한국 천주교회는 내년부터 5월 29일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기념일을 지내게 된다.


3> 주요 인물 약전

윤지충 바오로(1759-1791): 신앙 때문에 죽음을 당한 첫 조선 순교자
1759년 전라도 진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프란치스코)이 그의 아우이다. 1783년 진사 시험에 합격했고 이 무렵 고종사촌 정약용(요한) 형제를 통해 천주교를 접했다. 1787년 세례를 받은 그는 어머니와 아우, 이종사촌 권상연(야고보)에게도 교리를 가르쳤고, 인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도 왕래하며 전교에 힘썼다.
1790년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에 따라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고, 이듬해 여름 어머니가 별세하자 천주교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으니, 이를 ‘진산 사건’이라 한다. 이에 조정에서 두 사람에 대한 체포령이 내렸고, 그들은 충청도로 피신하였다가 1791년 10월 중순경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숱한 고문과 배교 권유에도 굴하지 않은 윤지충과 권상연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1791년 12월 8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나란히 참수의 칼날을 받았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1752-1801): 조선에 파견된 첫 선교 사제
1752년 중국 강남 지역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며, 스스로 천주교에 입문한 뒤 북경교구 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조선에 성직자 파견을 계획했던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신심이 깊고 외모가 조선인과 닮은 주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해 파견했다. 1794년 2월에 북경에서 출발한 그는 압록강이 얼 때까지 요동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약속된 날짜에 중국과 조선의 국경 마을로 가서, 조선에서 파견한 밀사들과 함께 12월 24일 밤 입국했다. 이후 주 신부는 한양의 신자 집에 머물며 한글을 배우고 1795년 부활절에 신자들과 처음으로 미사를 드렸다. 입국 사실이 탄로나자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피신, 비밀리에 이곳저곳을 다니며 성무를 집행했다.
그가 활동한 지 6년 만에 조선의 신자 수는 1만 명에 이르렀으나,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들이 신부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받기에 이르자 주 신부는 신자들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하고 그해 음력 3월 11일 자수했다.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은 그는 한강 근처의 새남터로 끌려가 5월 31일에 49세의 나이로 칼날을 받았다.


윤유일 바오로(1760-1795): 조선 땅에 선교사 모셔온 북경 밀사
1760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양근으로 이사 후 권철신의 문하에서 공부하다 천주교를 접했고, 스승의 동생인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가족에게 전교했다.
교회 지도자들이 조선 교회의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1789년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밀사를 보낼 때, 윤유일은 밀사로 선발돼 1789년과 1790년에 두 번 북경에 다녀왔다. 1791년 구베의 주교의 신부 파견이 실패하고 조선에 박해가 일어났지만, 윤유일은 실망하지 않고 동료들과 함께 성직자 영입 노력을 계속해 1794년 말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모셔왔다. 이후 윤유일은 북경 교회와의 연락책을 맡았다.
1795년 동료 신자 윤유일은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과 같은 시기에 체포돼 주 신부의 거처를 대라는 심문을 받았으나, 고문이 심할수록 그들은 굳은 인내와 지혜로운 답변으로 박해자들을 당황시켰다. 그 결과 같은 해 6월 28일 세 사람은 매를 맞고 숨을 거뒀으니, 윤유일 35세, 지황 28세, 최인길 30세였다.


정약종 아우구스티노(1760-1801): 한국 천주교 평신도 신학자 1호
1760년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번에 함께 시복될 정철상(가롤로, ?-1801), 1984년 성인품에 오른 성 정하상 바오로(1839년 순교)의 아버지다. 1786년 형 정약전에게서 교리를 배운 그는 신앙생활을 위해 양근 분원(현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주했고,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교회 일에도 참여했다.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정약종은 자주 한양으로 올라가 교회 일을 살폈다. 쉬운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 2권을 집필한 뒤 주 신부의 인가를 받아 교우들에게 보급했으며, 주 신부가 조직한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
1800년 고향에서 박해가 시작되자 정약종 가족은 한양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이듬해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정약종은 체포됐고, 박해자들에게 천주교 교리의 올바름을 설파하다 체포된 지 15일 만에 서소문으로 끌려가 참수됐다. 그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며 하늘을 바라보고 순교했으니, 1801년 4월 8일, 당시 나이 41세였다.

강완숙 골룸바(1761-1801): 조선 천주교 여성 리더
1761년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양반의 서녀로 태어났다. 혼인한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 신앙을 접했다. 천주교 서적을 읽으며 교리를 실천한 그녀의 행동에 누구나 감탄할 정도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는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피다 자신이 투옥되기도 했다. 시어머니와 전처 소생 아들(홍필주 필립보, 1801년 순교)를 입교시켰으나 남편은 입고시키지 못했고, 이후 남편은 첩을 얻어 따로 지내게 됐다.
한양 신자들이 교리에 밝다는 이야기를 들은 강완숙은 시어머니, 아들과 함께 상경,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력하는 교우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했고,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주 신부는 그녀의 인품을 알고 여회장에 임명해 신자들을 돌보게 했다. 1795년 을묘박해가 일어나자 강완숙은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집은 수색할 수 없음을 이용, 자신의 집을 주 신부의 피신처로 내놓았고, 그 집은 신자들의 집회 장소가 됐다.
1801년 4월 6일 강완숙은 체포되면서도 주 신부의 피신을 도왔다. 박해자들은 강완숙을 통해 주 신부의 행방을 파악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는 7월 2일 서소문 밖에서 40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1756-1801): 호남의 사도
1756년 전주 초남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세례를 받아 전라도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됐다. 함께 시복되는 유중철(요한), 유문석(요한)이 아들, 이순이(루갈다)는 며느리, 유중성(마태오)은 조카다.
세례를 받은 유항검은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들에게도 자선을 베풀었다. 1786년 천주교 지도층 신자들이 임의로 성직자를 임명한 뒤(가성직 제도), 유항검은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미사를 집전했다. 그러나 얼마 뒤 지도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교회법에 어긋남을 알았고, 유항검도 성무(성사, 미사 집전) 활동을 중단한 뒤 성직자 영입 운동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했다.
1801년 유항검은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돼 체포됐고, 한양으로 압송된 뒤 선교사 영입과 서양 선박 요청 계획의 주동자로 지목돼 고문을 당했다. 유항검에게서 아무 자백도 받지 못한 박해자들은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 전주로 옮겨 남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에 처했다.

황일광 시몬(1757-1802): 천당은 세상에 하나, 후세에 하나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황일광은 천민 출신으로 어렵게 생활했고, 1792년 무렵 홍산 땅으로 이주해 살다가 ‘내포의 사도’ 이존창을 찾아가 교리를 배운 다음 신앙의 자유를 찾아 경상도로 이사가서 살았다. 명랑한 성격의 그는 교우들이 천민인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며 똑같이 대우해 주자 농담조로 이렇게 얘기했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1800년 황일광은 정약종 회장의 이웃으로 이주했고, 정 회장이 한양으로 이주한 뒤에도 아우와 함께 따라가 땔나무를 해다 팔며 생계를 꾸리는 한편 힘 닿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1801년 그는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체포돼 투옥됐다. 천주교를 ‘성스러운 종교’라고 말한 그는 다리가 부러져 으스러지도록 매질을 당한 뒤 고향인 홍주로 보내져 참수됐다. 1802년 1월 30일, 나이 45세였다.


이순이 루갈다(1782-1802): 신앙으로 동정 지킨 부부
1782년 한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함께 시복될 이경도(가롤로, 1801년 순교), 이경언(바오로, 1827년 순교)과 남매간이고, 유중철(요한, 1801년 순교)가 남편이다. 부친 이윤하(마태오)는 이익 선생의 외손으로, 처남인 권철신 권일신 형제 들과 교류하며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입교했다.
1795년 주문모 신부에게 첫영성체를 받은 그는 덕행을 쌓으며 동정 생활을 결심했으나, 당시에 처녀가 혼인하지 않고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15세 때 그가 어머니에게 동정의 결심을 고백하자, 어머니는 이를 존중해 주 신부와 상의했고, 주 신부는 동정 생활을 결심한 호남의 청년 유중철을 이순이에게 소개했다. 1798년 이순이는 유중철의 고향으로 내려가 동정 서약을 했고, 두 사람은 오누이처럼 지내며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시아버지 유항검과 남편 유중철이 먼저 체포됐고, 이순이는 나중에 체포된 뒤 전주의 감옥에 갇혔다.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로 끌려가던 그는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에게 다시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고, 1802년 1월 31일 전주 숲정이에서 20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다. 1801년 이순이가 전주에서 한글로 쓴 옥중 편지는 지금까지 남아 당대의 교회와 천주교인들의 가치관을 증언한다.


김진후 비오(1739-1814): 김대건 신부 키워낸 가문의 선조
1739년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났다.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함께 복자품에 오를 김종한(안드레아, 1816년 순교)의 부친이다. 50세 무렵 맏아들이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전해 듣고 형제들에게 전하면서 아버지인 김진후도 천주교를 접했다. 관직을 얻은 그는 처음에 자식들의 입교 권유를 물리쳤으나, 자식들의 설득으로 관직을 버리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처음 체포된 그는 네다섯 번 체포와 석방을 반복했고, 1801년 신유박해 때도 체포되어 배교의 말을 하고 유배됐다가 풀려났다. 1805년에 다시 체포돼 해미로 압송된 김진후는 신앙을 굳게 지켰고, 옥에 갇혀 지내면서도 품위있는 성격으로 옥리들에게도 존경받았다. 10년간 옥중생활로 육신이 쇠한 김진후는 1814년 12월 1일 감옥에서 75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이성례 마리아(1801-1840): 자녀들에게 신앙 물려준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집안 사람이었던 그녀는 17세 때 최경환(프란치스코, 1984년 시성)과 혼인해 홍주 다락골에서 살며 1821년, 조선의 두 번째 한국인 사제가 될 최양업(토마스)을 낳는다.
신앙생활을 위해 집을 자주 옮기는 동안에도 이성례는 자녀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며 인내심을 갖게 했고, 수리산(현 경기도 군포시)에 정착해서는 남편을 도와 교우촌을 조성했다. 그 사이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났다.
1839년 기해박해 때 남편이 한양을 오가며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고 교우들을 돌보자 이성례도 남편을 뒷바라지하다 수리산에서 온 가족과 함께 체포됐다. 고문보다 모성 때문에 번민하던 이성례는 젖먹이 아들이 굶어죽어 가는 것을 보다 못해 신앙을 부인하고 석방됐다. 그러나 장남이 신학생 신분으로 중국 유학 중임이 드러나자 다시 체포됐고, 형조에 이른 이성례는 동료 신자들의 격려를 받으며 유혹을 이겨내고 당고개(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로 끌려가 3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다.
 

4>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명단 <남자 100명, 여자 24명>




5> 숫자로 본 124위 순교자 분포<가톨릭신문 인용>

순교 형태별 분류: 원문 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166454
▧ 참수(76명, 61.8%)  ▧ 장사(15명, 12.1%)  ▧ 교수(11명, 9%)
▧ 능지처참(2명)  ▧ 군문효수(1명)  ▧ 그 외(옥사 12명, 미상 7명)


순교지별 분류: 원문 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166566
▧ 한양 (옛 서울, 37명, 29.8%)  ▧ 경기도 (13명, 10.5%)
▧ 강원도 (3명, 2.4%)  ▧ 충청도 (18명, 14.5%) 
▧ 전라도 (24명, 19.4%)   ▧ 경상도 (29명, 23.4%) 


신분별 분류: 원문 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166723
▧ 양반(60명, 48.4%)  ▧ 중인(33명, 26.6%)  ▧ 천민(4명, 3.2%)
▧ 신분미상(27명, 21.8%)


기타 분류: 124위의 또 다른 특징은?
연령상으로 12세 이봉금이 최연소자이고 75세 김진후가 최고령자다. 103위의 최연소자 유대철 성인과 비교하면 1살이 적고, 78세의 유조이와 비교하면 3살이 적다.
10대는 5명, 20대는 15명, 30대는 21명, 40대는 21명, 50대는 19명, 60대는 11명, 70대는 5명, 나이를 알 수 없는 순교자는 27명으로 30~40대에 대다수가 포함돼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124위 순교자 중에는 ‘베드로’(12명)라는 세례명이 가장 많았던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다음은 ‘바오로’(9명), ‘프란치스코’(9명), ‘야고보’(7명), ‘안드레아’(7명), ‘요한’(6명), ‘바르바라’(5명), ‘마티아’(3명), ‘안토니오’(3명), ‘시몬’(3명), ‘토마스’(3명), ‘마르티노’(3명) 순이다. 요셉, 타데오, 가롤로, 아가타, 바르나바, 마태오, 아우구스티노, 루카, 안나, 아나스타시아 등은 각 2명씩이다.

3.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의 의미와 경과

1> 124위 순교자 시복의 의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은 국내 전 지역 순교자들의 안건을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통합 추진했다. 따라서 이번 시복 결정은 한국 가톨릭 교회의 순수한 힘으로 이끌어낸 것이며, 전 세계 교회가 한국교회의 역량, 평신도들의 순교자 공경과 기도를 인정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안명옥 주교, 2014년 2월 12일 교계신문 인터뷰 인용>
1984년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동료 순교자, 103위 성인이 탄생했다. 이들의 경우 시복 작업부터 파리외방전교회가 주도했기 때문에, 파리외방전교회 진출 전에 발생한 박해의 순교자들이 누락되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124위 순교자 시복 추진 작업은 한국 교회 초기 박해인 신유박해(1801) 순교자들의 행적을 밝혀냄과 동시에, 선교사 없이 자발적 노력으로 교회 공동체를 일궈낸 평신도 신앙 선조들의 열정을 인정받았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다. 

 

2> 124위 시복 추진 경과
1997. 주교회의 추계 총회, 주교회의 산하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와 각 교구에서 진행하던 신해박해(1791), 신유박해(1801) 순교자 시복시성을 “통합 추진”하기로 결정. 그 밖에 기해, 병인박해 순교자 중 103위 명단에 누락되었지만 순교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고 지역에서 존경받던 분들도 명단에 포함.
2001. 주교회의 춘계 총회, 시복시성 통합 추진을 결정하고 추진 주체(청구인)를 “주교회의”로 명시, 담당 주교를 마산교구장 박정일 주교로 선출
2001.10.18. 신유박해 200주년/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구성. 위원장 박정일 주교(현재 위원장은 후임 마산교구장인 안명옥 주교)
2004.7.5. 신해박해, 신유박해 순교자 시복 조사 법정 개정.
2009.5.20. (국내) 시복 예비심사 법정 종료. 총 36회기
2009.6.3. 주교회의, 시복 조사 문서를 교황청 시성성에 정식 접수.
2013.3.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청원 건, 교황청 역사위원회 통과.
2013.10. 시복 청원 건, 교황청 신학위원회 통과.
2014.2.4. 시복 청원 건, 주교와 추기경 회의 통과.
2014.2.8. 교황 프란치스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에 관한 교황청 시성성 교령 승인(시복 결정). 

 

3) 아시아 주요 국가의 성인, 복자 내역(괄호 안 연도는 시복 시성 연도)
베트남: 성인 117명(성 안드레아 둥락과 동료 순교자, 1988년 6월 19일 시성, 요한 바오로 2세)/ 복자 1명(안드레아 푸 옌, 2000년 3월 5일 시복, 요한 바오로 2세)
일본: 성인 42명(26명<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25위> 1862년, 16명<성 토마스 니시와 동료 순교자 15위> 1987년), 복자 393위(205위 1867년, 188위 2008년)
중국: 120명(성 아우구스티노 자오롱과 동료 119위, 2000년 10월 1일 시성, 요한 바오로 2세)
필리핀: 성인 2명(로렌소 루이스: 평신도, 1987년 요한 바오로 2세 시성/ 페드로 칼룽소: 평신도, 2012 베네딕토 16세 시성), 복자 1명: 마닐라의 호세 마리아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홈페이지= http://koreanmartyr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