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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 - "하얀 십자가 처형(1938년"

작성자 : 홍기선 작성일 : 2013-12-28 조회수 : 5742

교황님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라고

인터뷰에서 말씀하셨기에

해설을 꾸며 보았습니다.

밑에 파일도 첨부해 놓았으니

참조하셔도 됩니다.

첫 화면에는 각주가 첨부되지 않아서

파일을 참조하시면 좋습니다.

하얀십자가처형

하얀 십자가 처형

(Marc Chagall, 1887-1985)

 

 

                                                             작품해설 홍기선 신부

 

Marc Chagall (1887-1985), "Crocifissione bianca" (1938)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U.S.A.

 

 

 

 

 

러시아 출시의 유태인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1938년에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의 표제는 하얀 십자가 처형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여러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라고 밝힌 작품이다. 미국 시카고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 속에는 많은 사건과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샤갈은 그들을 통해 한 시대의 아픔이 통째로 묘사하고 있다. 지나온 시대가 아니라 샤갈이 살고 있는 그 시대이고,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부모형제들이 겪는 아픔이며, 본인 역시 공포 속에서 전율하며 가감 없이 그려 넣었다. 여러 상황이 마치 절단면 없는 모자이크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 한 가운데 위치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와 예수라는 역사 속의 한 유태인에 대한 샤갈 개인의 평가 역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그림은 유화(155x 140cm)로 그려졌고, 그림의 해석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어, 지금까지 문제작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샤갈이 이 작품을 그리게 된 계기는, 193811월에 독일에서 있었던 크리스탈 밤(kristallnacht)사건이다. 그림에 대한 첫인상은 샤갈 그림의 특징으로 인해 몽환적으로 느껴지나, 작품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전혀 다른 고통의 빛깔이 느껴진다. 샤갈은 유태인으로서 느끼는 시대의 고통을 이 그림 속에 담아 놓았다. 이 고통은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고통이 아니라, 온 몸을 전율케 하는 공포의 고통이다. 사건의 배경과 소재의 의미를 살피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해석을 다음과 같이 모아보았다.

 

그림 속의 모든 장면은 움직임 가운데 있고, 회색과 백색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회백색이 명암이 마치 화산 분화구 연기처럼 계속 번져나가며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림 한 가운데 십자가가 위치하고 있다. 샤갈은 그가 살고 있던 시대의 슬픔을 설명하기에 가장 합당한 우주적 상징을 십자가 위의 한 인간에게서 발견했다.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T자 형태의 큰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으로 그림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그 크기가 눈에 쉽게 뜨일 정도로 크게 표현되어있다. 십자가 위의 I.N.R.I(Iesus Nazarenus Rex Iudaeorum)는 두 번 쓰여 있다. 핏빛 고딕으로 쓰인 것은 나치 사회주의의 반유대주의 팜플랫을 연상케 한다. 그 밑에는 히브리말( Jeshu ha-noszrì malchà de-Jeudai)로 적혀있다. 그리고 그의 허리를 휘감은 천은 전형적인 유태인 장식이다(탈레드 가돌, Talled Gadol - 유태인이 기도할 때 사용하는 쇼올). 머리에는 가시관 대신 천 조각(비니, 유대인 표식)을 씌우고 있다. 예수님이 유대인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무질서하게 자리 잡은 장면들이 십자가 주위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 주변 전체가 혼돈과 무질서, 그리고 고통 속에 절규하는 인간들로 채워져 있어 지옥의 상황을 연상케 한다. 십자가 밑에는 위로자이신 성모님 대신에, 박해 받는 유태인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안치시켜 놓았다. 십자가 발치에는 유대 전통의 일곱 촛대(메노라, Menorah)가 있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한 줄기 빛의 조명을 받고 있다. 샤갈은 십자가 앞에 촛대를 안치시키고 높은 곳으로부터 내리는 빛줄기와 촛불의 광채를 종교적 아우라(aura)로 부각시킴으로써 구세주에 대한 자신의 갈망과 종교심을 고스란히 표현해 놓았다. 마치 감실을 밝히는 촛불처럼 메노라의 촛불도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다.

 

흰빛의 넓은 광선이 위에서 내려와 십자가를 통과한다. 샤갈의 다른 작품에서 보면, 초월적 빛은 유대 예언자들, 이를테면 모세와 엘리아 같은 예언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샤갈은 이 작품을 통해, 그리스도를 유대인이 공경하는 예언자와 같은 반열에 놓고 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모습을 통해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받는다. 유대백성의 순교는 하느님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샤갈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고통 받는 유대백성의 상징으로 여겨진 것이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눈을 반쯤 감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잠든 것처럼 보인다. 비록 손과 발에는 피가 흐르고 있으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의 소란스러움과 고통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큰 사다리가 십자가에 기대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사다리를,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행되고 있는 폭력과 고통을 끝장내라는 초대로 해석한다. 다른 이들은 이 나치 시대에 보인 교회의 수동적 태도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달리 해석하는 자들도 있다. 하얀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처형당한 예수님,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함축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림 중앙에 위치시킨 그분은 이미 숨진 상태이다. 그의 몸은 빛으로 둘러 싸여있다. 하느님께서 의인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니 당신 아드님을 빛으로 온전히 인정해 주신 것이다. 얼굴은 평온하고 안정적으로 보인다. 자신의 발치에 놓인 메노라를 바라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일곱 촛대의 메노라, 그러나 촛대의 숫자는 6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작가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2차 세계 대전 중, 수용소에서 강제로 학살당한 6백만 명이 넘는 유태인들을 암시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과도한 비약이다. 분명한 것은 샤갈에게 있어서 동족의 현 상황은 예수님의 상황과 같은 것이라는 인식이다. 결백한 인간들이 당한 박해와 죽음에서 일치한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셨다면 유태인도 받아들일 것이라는 믿음의 촛불이다. 하느님의 빛이 동족에게도 비칠 것이라는 희망이다. 샤갈은 이 간절한 소망을 담아 촛대에 불을 붙여 예수님의 발치에 놓았다. 어쩌면 목선 위에 있는 이들은 이미 선조들의 땅에 도착한 사람들인지 모른다. 적어도 이 학살의 세상에서 위로받는 사람들이다. 닻을 내리고 접안하기 위해 손을 뻗는 사람도 보인다. 십자가를 향해 내려오는 빛의 일부에 목선의 일부에 닿아있다. 그들이 그토록 갈구하던 땅이다. 이 지상의 이스라엘 땅이다(히브리말로 에레츠 이스라엘: אֶרֶץ יִשְׂרָאֵל, Eretz Yisrael). 그러나 이 목선 위의 사람들에 대해 다른 해석도 있다. 그 해석의 내용은 곧 살펴볼 것이다.

 

십자가 주변의 세상은 혼란과 혼동에 빠져있다. 폭동과 약탈과 방화, 살인, 파괴, 강제추방으로 찢기어진 세상이다. 오른쪽에는 파괴된 회당으로부터 화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나치 군복을 입고 긴 장화 신은 한 남자, 미쳐 날뛰는 극렬 나치주의자이다. 팔뚝에는 완장까지 차고 있다. 증오로 가득한 핏빛 얼굴을 하고 성전 천막에 막 불을 붙였다. 성전 앞, 길바닥에는 파괴된 등과 뒤집어진 의자가 나뒹굴고 있다. 한 때 신심 깊은 신자들이 하느님의 위로를 찾으며 기도할 때 앉았던 의자이다.

 

종교적 귀중품을 담아 두던 궤는 쪼개어져 바닥에 흩어져 있고, 불타고 있는 토라(Torah, 율법) 두루마리로부터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기도서들은 진흙바닥에 던져졌다. 몇몇 페이지는 흘린 눈물로 젖어있다. 한 늙은 유대인이 피난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자루를 등에 메고 달아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마치 지옥 같은 상황의 그림 속에서 빠져나가고자 허둥지둥 애쓰며, 타고 있는 율법서의 연기를 가로질러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파도에 휩쓸리며 목적지 없이 표류하고 있는 목선 위에는 정원이 훨씬 초과된 유대 난민들이 있다. 그들은 배 위에서 도움을 호소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어떤 이는 서서 두 손을 흔들고 있고, 다른 이는 바다 밑을 향해 손을 뻗어 무언가 요청하고 있다. 배 위에는 노인들과 아이를 안은 여인들도 보이는데, 모두 절망감에 휩싸여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다. 그러나 유럽전체가 그들을 거부했다. 온 세상이 그들을 맞아드리지 않았다. 그들을 받아줄 사람도 항구도 없는 난민들, 절망감에 사로 잡혀 이제는 허공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외친다. 살려달라고! 작가는 자유와 생존을 향한 유대인들의 이 몸짓을 통해 생명과 구원을 갈구하는 근원적인 인간 실존을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유대인을 외면하고 있는 세상의 비정함과 그 죄악을 극명한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배가 향하고 있는 유일한 방향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빛 가운데 위치한 십자가 위의 예수님이다. 샤갈은 이 절망적 상황에서 동족을 구원할 구세주는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은 유태인 예수 밖에 없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유태인 샤갈에게도 예수는 그리스도이다.

 

그림 속의 목선 윗부분에는 파괴된 마을의 집들이 그려져 있다. 유대인들의 정착촌이다. 박해받는 유대인의 고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그 위 배경에는 러시아 혁명 폭도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붉은 깃발과 함께 등장하는데, 이들은 마을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불타고 있는 집들 사이에는 살해된 시신이 보이는데, 불길 한 가운데서 타고 있다. 불길에 휩싸인 집들과 열려진 대문들, 상처입고 쓰러진 이를 에워싼 가족들의 모습이 폭풍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보인다. 유태인 공동묘지의 묘비가 훼손되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그림 밑 부분에는 유대인이라는 오명의 표시로 목에 흰 팻말을 걸고, 두 손을 펼친 채 오욕스러움을 느끼며 비틀비틀 걷고 있는 노인을 그려 넣었다. 낙인찍힌 짐승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림 하단에 독립된 개체로 그려진 사람들은 마치 그림 속에서 탈출하려는 듯 보인다. 한 여인이 아이를 안고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몸의 절반이 이미 그림 속에서 빠져나갔다. 이 상황의 심각성과 공포를 조바심과 함께 느끼게 하고 있다.

 

위쪽에는 엄청난 고통으로 울고 있는 한 무리의 유대 노인들이 보인다. 마치 하늘의 천사들처럼 그려져 있는데, 2명의 랍비들도 보이고, 차갑고 옅은 어둠 속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동요하고 있는 여인도 발견된다. 랍비 중 한 사람은 차마 볼 수 없는 장면이기에 공포심에 사로잡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이들보다 훨씬 크게 그려진 한 랍비가 보이는데, 이 사람은 모세이다. 초월적 빛의 거의 절반을 벗어난 형태로 그려졌다. 그는 아래를 가리키는 손짓을 하며 놀라움을 표시한다. 그리고 놀라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며 이스라엘 후손들의 고통을 아파하고 있다. 초점을 잃은 눈빛으로 탄식하며 랍비들과 여인을 위로하고 있다.

 

 

유태인으로 로마 사피엔쟈 대학 교수로 있는 조르죠 이스라엘(Giorgio Israel)2008년 가톨릭 교회의 기관지 오세르바토레 로마노(Osservatore Romano)’에 샤갈의 하얀 십자가 처형에 관한 글을 기고하였다. 그 글의 서두에 샤갈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 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샤갈은 성경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품 활동을 하였습니다. 성경과 관련된 작품만 하더라도 105편이 넘습니다. 샤갈이 생전에 한 말입니다.” 어떤 시대이든지 간에, 성경은 문학 작품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모든 영감을 얻었습니다. 저도 제 삶과 예술을 위해 늘 성경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서양의 모든 화가에게 그랬던 것처럼, 저에게도 성경은 물감이 담긴 그릇과 같았습니다. 다양한 색깔의 알파벳이 담긴 성경이라는 물감통에 제 붓을 담가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조르죠 이스라엘 교수는 하얀 십자가 처형작품을 해설하면서, 십자가의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놓았다. <빛에 둘러싸인 그리스도에게 모든 고통은 사라집니다. 그분에게서 나오는 평화와 고요는 그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들 만큼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 이 백성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비록 누가 나를 해친다하더라도, 나는 그분을 믿겠나이다(유태인의 일상 기도문).” 여기서 그분과 그리스도는 바꾸어 놓아도 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작품에 대해 설명해 놓은 해외의 유명 작가들의 평가이다. 전체의 내용에 대한 정보를 멍석 위에 콩을 펴듯, -욱 나열해 보았다. 국내 자료에서는 부족한 부분이 많아 거의 해외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내 자신의 평가를 옮기기에는, 내 예술적 식견이 너무도 일천하기에, 아예 엄두도 내지 않았다. 샤갈의 작품, “하얀 십자가 처형을 눈여겨 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자꾸 보니, 작품이 좋아진다. 나도 한 점 액자로 만들어 사무실에 걸어 놓고 싶을 정도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 모두가, 내가 느낀 기쁨 맛보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