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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25일(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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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2월 22일-27일, 일본 나가사키에서 열려 -
□ 2008년 2월 22일(금), 제14회 한일청년교류모임이 일본 나가사키에서 열렸다.
 ▲ 2월 22일(금) 나가사키 대교구청에서 처음 만난 한·일 양국의 참가자들이 서로를 소개하고 있다.
□ 한국에서는 이득규 신부(대전교구 청소년사목국 차장), 양재식 신부(전주교구 청소년교육국 부국장)와 대전교구 청년 20여 명이 참가하였고, 일본에서는 야마무라 켄이치 신부(山村憲一, 나가사키 대교구)와 나가사키 외에 도쿄, 오사카 등에서 온 청년 20여 명이 참가하였다.
 ▲ 2월 24일(일) 미사를 집전하는 나가사키 대교구장 타카미 미츠아키 대주교(가운데)
 ▲ 나가사키 대교구장 타카미 미츠아키 대주교(가운데)와 함께 한 참가자들
□ 한·일 양국 청년들은 2월 22일(금), 일본 나카사키 대교구청에서 첫 만남을 가진 다음, 24일(일)까지 일본 참가자 가정에 머물면서 운젠(雲仙), 시마바라(島原) 등 일본의 가톨릭 성지와 원폭 박물관 등을 둘러보았다.
 ▲ 우라카미 성당을 방문한 참가자들
 ▲ 원폭피해자봉안비 앞에 선 참가자들
□ 이번 한일청년교류모임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주제로 2월 27일(수)까지 한·일 역사 공부와 일본 청년 문화 체험 시간을 가진다.
□ 한일청년교류모임은 1997년 프랑스에서 열린 제12차 세계청년대회(8월 19-21일, 파리)에 앞서, 한국과 일본 양국의 청년들이 같은 해 8월 11-14일까지 루르드에서 만남을 가진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래 일본 주교회의나 청소년 사목 담당자들은 왜 한일 청년 교류를 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나아가 교류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처음에 일본측은 루르드에서 만남을 갖는 데에도 부정적이었지만, 세계 청년대회 참가와 연계해 루르드가 갖는 상징적 의미를 한국 측이 오랫동안 설명한 끝에 일본 측에서 이를 받아들였고, 루르드에서의 만남과 세계 청년대회 참가를 계기로 한일 청소년 교류를 지속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1998년부터는 매년 한일 양국의 청년들이 한국과 일본을 번갈아가며 모임을 갖고 있으며, 상호 이해와 양국 사이에 놓인 장벽을 허물고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일본의 가톨릭 성지
운젠(雲仙) 일본 규슈 시마바라 반도의 운젠지고쿠(雲仙地獄)는 17세기 초(1629년) 일본 ‘기리시탄’(キリツタン)의 순교성지이다. 조선의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1784년보다 235년 이른 1549년 8월 15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한 이후, 가톨릭은 일본인들 사이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1596년~1615년경 가톨릭 신자가 60~70만 명으로 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금교령을 내려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의 니시사카에서 26명을 화형시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1614년, 다시 금교령을 내려 1633년까지 가톨릭을 박해하였다. 당시 나가사키 봉행 다카나카 우네메는 신자들을 배교시키기 위하여 지옥형벌을 사용하였다. 지옥형벌은 시마바라 영주 마츠쿠라 시게마사 父子가 고안해낸 것으로, 운젠 온천의 열탕에 빠뜨렸다 건져 올리기를 반복하거나, 몸에 상처를 낸 다음 뜨거운 물을 끼얹는 등 열탕을 이용하여 갖가지 고통을 주는 것이었다. 1627년 2월 바오로 內堀와 그의 아들 이냐시오(5세)를 포함한 16명이 순교하였고, 같은 해 5월에 요아킴 山峰調太夫 외 9명이 순교하였다. 운젠에는 복자 안토니오 이시다 등에 봉헌된 성당이 있으며, 매년 5월, 순교자 현양제가 열린다.
시마바라(島原) 가톨릭 신자인 아리마 나오즈미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였던 시마바라(島原)와 아마쿠사(天草)에는 가톨릭 신자 2만여 명이 살고 있었다. 1627년 운젠에서 가톨릭 신자 26명이 순교한 후,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 과 천주교 금지령이 강화되었다. 1637년 시마바라의 영주가 마츠쿠라 시게마사로 바뀌면서 과도한 조세와 부역이 계속되자, 당시 15세였던 아마쿠사 시로도키사다(天草四郞時貞)의 지휘로 농민 3만 7천여 명이 12만 관군과 5개월간(1637년 10월 25일~1638년 2월 28일) 대치하다가 전몰했다. 시마바라·아사쿠사의 난 이후 일본 가톨릭의 공식 조직은 사라졌고, 250년 동안 성직자가 없었다. 1865년 외국인을 위해 지은 나가사키의 오우라(大浦) 성당에서 가쿠레 기리시탄(隱れキリツタン)이 신앙고백을 하면서 ‘신자 재발견’이 이뤄졌고, 1889년 종교의 자유가 이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