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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평화신문양 두 마리 키우며 사는 이정행 신부

작성자 : 문화홍보국-주보 작성일 : 2015-01-05 조회수 : 1989

[신년 특집] 양 두 마리 키우며 사는 이정행 신부
        (춘천교구 원로사목자)
“양 냄새 나는 목자? 신자들과 희로애락 함께하는 사제 아닐까요”
 2015. 01. 01발행 [1296호]
 
 
“양 냄새 나는 목자? 신자들과 희로애락 함께하는 사제 아닐까요”

▲ 이정행 신부가 마당에서 풀을 뜯는 행순이와 행돌이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임영선 기자


강원도 작은 시골 마을에 어린 양들과 함께 사는 목자가 있다. 은유적 의미의 양이 아니라 털이 북슬북슬한 진짜 양이다. 2013년 사목 일선에서 물러난 후 강릉 연곡면 행정공소에서 두 마리의 양을 키우며 지내고 있는 이정행(춘천교구 원로사목자) 신부 이야기다. 양(羊)의 해를 맞아 ‘양을 기르는 목자’ 이정행 신부를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양과 함께 사는 목자

12월 17일 행정공소에서 만난 양들은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소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기자가 나타나자 나란히 달려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낯을 가리는 것 같진 않았다. 은퇴한 사제가 한적한 시골 공소에서 양들과 함께 살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이 신부와 양들의 인연은 지난 5월 시작됐다. 몇 년 전 사목했던 대관령본당 신자들이 공소에 놀러 왔다가 마당에 무성하게 자란 풀을 보고 “풀을 잘 뜯어 먹는 양을 키워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이 신부는 “한 번 길러보겠다”고 응했고, 태어난 지 2~3개월이 지난 양 두 마리를 선물 받았다. 행정공소의 ‘행’ 자를 따서 수놈은 ‘행돌이’, 암놈은 ‘행순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신자들 말대로 행돌이와 행순이는 풀을 쉬지 않고 뜯어먹었다. 아무리 뽑아도 풀이 계속 자라서 골치가 아팠던 차에 큰 도움이 됐다. 이 신부는 “걔들은 정말 하루 종일 풀을 뜯는다”고 설명했다. 이 신부는 아침, 저녁으로 먹이를 주며 양들을 돌보고 있다. 7개월여 동안 함께 산 양들의 성격은 어떨까.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순해요. 사람도 잘 따르죠. 두 마리뿐이지만 수놈이 리더(지도자) 역할을 해요. 항상 행돌이가 앞장서고 행순이는 졸졸 따라다녀요. 수놈만 머리에 뿔이 나죠. 그리고 머리가 돌덩이처럼 단단해요. 머리에 받힌 적이 있는데 아팠어요. 싱싱한 풀을 좋아해요. 겨울이라 건초를 주고 있는데, 잘 안 먹더라고요.”

이 신부와 함께 마당에서 만난 양들은 마냥 순하지는 않았다. 행돌이는 마치 투우장의 소처럼 사람에게 돌진해 머리로 들이받으려고만 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사진기를 향해서 돌진했다. 이 신부는 작대기를 들고 다니며 행돌이를 말렸다. 행순이는 행돌이를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3m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이 신부는 “처음에는 행돌이도 순했는데 뿔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간지러운지 계속 머리를 무언가에 비비려고 하고 들이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공소 주임 신부이자 회장

이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40년 9개월 만인 2013년 9월, 사제가 된 후 첫 미사를 봉헌했던 행정공소로 돌아왔다. 1943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난 이광재(티모테오, 1909~1950)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그는 6ㆍ25전쟁 중 아버지를 잃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외가가 있는 행정리에서 성장했다. 실질적인 고향인 셈이다.

“대표적인 옹기촌이었어요. 1950년대에는 신자가 200명이 넘기도 했죠. 주문진본당 주임이셨던 최창규(바르톨로메오, 1926~1976) 신부님께서 저를 많이 사랑해주셨어요.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신부님께서 ‘소신학교에 가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셨어요. 그때는 사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신부님 말씀을 따르기로 했어요. 최 신부님 덕분에 40년 넘게 사제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죠.”

1980년대 초반 ‘플라스틱 그릇’이 인기를 끌면서 옹기는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옹기를 빚던 신자들도 하나둘 도시로 떠나갔고, 지금은 할머니 신자 세 명만이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신자가 세 명뿐이라 한 명만 미사에 빠져도 금방 티가 나 냉담도 할 수 없다. 할머니들은 주일 미사에 참례하지 못할 사정이 생기면 이 신부에게 미리 전화해 이번 주에는 여차여차해서 성당에 못 간다고 양해를 구한다.

지난 12월 14일에는 공소에 큰 경사가 있었다. 이 신부의 요청으로 얼마 전 사제품을 받은 춘천교구 새사제 3명이 행정공소를 방문해 미사를 봉헌한 것이다. 1972년 이정행 신부 이후 무려 42년 만의 ‘새사제 미사’였다. 이날 미사에는 50여 명이 넘는 신자가 참례해 모처럼 공소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 신부는 새 사제들에게 “사제품을 받을 때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가라”고 당부했다.

“42년 전 첫 미사를 봉헌할 때 ‘주님 비천한 제가 사제가 됐습니다. 당신의 사제로 살 수 있도록 잘 보살펴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어요. 주님께서 제 기도를 잘 들어주신 것 같아요. 똑똑하지도 못하고 특별한 재주는 없었지만 늘 신자들과 함께하면서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어요.”

1972년 강릉 임당동본당 보좌로 사제 생활을 시작한 이 신부는 운천ㆍ인제ㆍ홍천ㆍ김화ㆍ노암동ㆍ죽림동주교좌본당 주임, 교구 총대리 겸 사무처장, 횡계ㆍ포천본당 주임을 지냈다. 총대리 4년을 제외하고 37년을 ‘본당 신부’로 살았다. 그는 “본당에서 신자들과 함께할 때가 가장 즐거웠다”고 회상했다.

40년 동안 수많은 신자와 함께 지내다가 은퇴 후 시골 작은 공소에서 단 세 명의 신자와 함께 지내고 있다. 수십 년 만에 갖게 된 여유가 어색할 만도 하다. 이 신부는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다 보면 적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면서 “손님들도 종종 찾아오고 후배 신부들이 미사를 부탁하면 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로마교구 성유 축성 미사에서 사제들에게 “양 냄새 나는 목자가 되십시오” 하고 당부했다. ‘진짜 양’을 키우는 이 신부가 생각하는 ‘양 냄새 나는 목자’는 어떤 모습일까?

“신자들 곁에 살면서 희로애락을 같이 하는 사제가 양 냄새 나는 목자가 아닐까요? 신자들이 겪는 어려움과 고통을 보듬어주고 영적으로 보살펴 주는 사제죠. 후배 사제들에게 ‘신자들을 진심으로 대해 달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진심으로 대하면 신자분들은 사제를 믿어주십니다.”



행정공소



경기 양평 칠정리 공소회장이었던 김세중(라파엘, 이정행 신부 외증조부)이 1924년 일가를 데리고 이주해 토기업(옹기점)을 시작하면서 행정리에 천주교가 전파됐다. 6ㆍ25전쟁 이후 지은 작은 목조 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신자들은 1958년 힘을 모아 벽돌공소를 건립했고 그해 10월 당시 춘천교구장이던 구인란(토마스) 주교 집전으로 축복식을 했다.

1950년대에는 주일 미사 참례자 수가 150~2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큰 교우촌으로 성장했지만 1970년대부터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1980년 후반에는 어르신 신자만 몇 분 남았다. 주문진본당 주임신부가 매달 한 차례 집전하던 주일미사도 중단됐다. 2003년 전임 교구장 장익 주교가 공소 수리를 결정하면서 이듬해 중창 축복식을 가졌다. 공소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누리방(www.hjgongso.or.kr)에서 볼 수 있다.



임영선 기자 hellomrlim@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