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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평화신문[근대문화유산] 옛 포천성당(제271호)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08-01-10 조회수 : 7736












"화강석으로 높이 쌓아올린 '하느님의 城' "






[근대문화유산] 옛 포천성당(제271호)


   온고지신(溫故知新, 옛 것을 알면서 새 것도 안다)이란 말이 점점 무색해지는 세상이다.

 건축 분야도 마찬가지다. 옛 것은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마구 파헤쳐지고 훼손된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은 건축물만이 아니다. 그 안에 깃든 시대 정신과 문화 전통, 그리고 추억도 함께 사라진다.







▲ 6.25 전쟁 후 이한림 장군이 주도해 지은 옛 포천성당


 서울에서 두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왕방산 기슭의 옛 포천성당(2006년 지정 근대문화유산 제271호,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 육중한 축대 위에서 뼈대만 남은 모습으로 버티고 서있는 준고딕식 석조 건물을 보는 순간 '살아 남았구나'라는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온다.

 성당은 전쟁 통에 폭격을 맞은 폐허를 방불케한다. 골함석 지붕과 목조 마루바닥은 온데간데 없다. 이끼가 낀 벽체와 창틀은 여기저기 떨어져나가고 검게 그을렸다. 온전한 것은 두께 65㎝의 두툼한 화강석으로 쌓아 올린 외벽뿐이다. 부서진 시멘트 틈새와 창틀에서 한 여름 살다 말라 죽은 잡초만이 겨울 바람에 춤을 춘다.

 아치형 출입구 위 '성 가브리엘 성당'이라고 새겨진 문패와 종탑에 걸려 있는 종이 한때 이곳이 포천지역의 신앙 터전이었음을 말해준다. 서쪽 벽에 뚜렷이 남아 있는 감실 자리와 신부들이 미사 때 감실 성체를 꺼내기 위해 밟고 올라섰을 돌 계단도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려 준다.

 6ㆍ25 전쟁 후 군부대 지원을 받아 지어진 이 성당은 1990년 취객의 방화로 내부와 지붕이 불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다. 포천본당(주임 배종호 신부)은 1992년 그 아래에 새 성당을 지었으나 역사 보존 차원에서 옛 성당을 헐지 않고 보존해 왔다.

 이 성당은 1955년 포천에 주둔하고 있던 6군단장 이한림(가브리엘) 장군이 주도해 지었다. 신앙심이 독실한 이 장군은 신앙 역사가 신유박해로 거슬러 올라가는 포천에 성당이 없는 것을 알고 왕방산 기슭 언덕에 성당 터를 잡았다.

 눈여겨 볼 것은 당시 포천 어디서든 확연히 눈에 띄었던 성당 위치다. 1960년대 사진을 보면 서쪽 언덕에 화강석으로 높이 쌓아 올린 성당은 중세 유럽의 성(城) 같다. 외벽에 건축물을 지탱하는 버트레스까지 설치해 더욱 견고해 보인다. 건축을 맡은 육군 1110야전공병단 장병들은 인근 덕정리에서 화강석을 실어왔다.







▲ 고대 로마시대 유적을 방불케하는 성당 내부


 이 장군은 피의 박해와 6ㆍ25 전쟁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은 가톨릭을 '하느님이 보호하는 굳건한 성'의 이미지로 세상에 드러내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포천본당은 춘천교구 서부지역, 즉 경기북부 지역의 복음화 산실이다.

 '토박이 신자' 김승한(율리오, 77)씨는 "주민들이 모두 피난에서 돌아와 움막짓고 살던 때라 언덕 위 성당이 그렇게 크고 웅장할 수 없었다"며 "성당이 완공되자 신부님과 신자들이 배고픈 주민들에게 우유와 옥수수가루를 나눠줘 신자 수도 부쩍 늘었다"고 회고했다.

 이 성당은 현재 내벽 풍화와 균열이 심하다. 외벽도 인위적 충격이 가해지거나 강풍이 불면 붕괴될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본당은 출입로를 폐쇄하고 위험 경고판을 세워 놓았다.

 배종호 신부는 "포천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라 여름이나 가을에 야외 음악회를 열면 제법 운치가 있을 것"이라며 보존과 활용 방안을 찾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근대문화유산 지정 신청을 위해 성당을 기초조사한 김정신(단국대 건축학과, 스테파노) 교수는 "1950년대 군 원조로 지은 종교건물이 다수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드물다"며 "1950년대 건축양식적 가치와 6ㆍ25 전쟁 격전지라는 역사적 가치 측면에서 근대문화유산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2007. 12. 25발행 [9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