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탄이 가까워 라디오에서는 캐럴이 많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보내오는 성탄 축하 동영상과 사진들을 주고받으며, 불현듯 여동생이 생각났습니다. 1년 동안 소홀했던 마음을 보상해야겠다는 생각에 선물을 주기로 했습니다.
“어떤 선물이 좋을까?” 중얼거리며 인터넷을 검색하고 있는데 내 혼잣말을 지나가다가 들은 아내가 한마디 합니다. “요즘 모바일로 케이크 선물을 많이 하던데요.”
아내의 말에 ‘옳거니’ 싶어 냉큼 검색해서 성탄에 어울리는 빨간 딸기 케이크를 보냈습니다. 선물을 보내고 일하느라 잊고 있을 때 엘리사벳이 고맙다고, 잘 먹겠다고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한 자 한 자 입에 펜을 물고 메시지를 보냈을 엘리사벳이 생각났습니다.
어머니에게서도 전화가 왔습니다.
“어이구, 엘리사벳이 웬일로 성가랑 징글벨 부르며 노래한다고 신이 났다. 선물 고맙다.”
웃음기 머금은 어머니 목소리에 저도 기뻐서 웃었습니다. ‘내 작은 행동이 행복의 꽃으로 피어났구나’ 싶어 내심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을 잠시나마 행복하게 했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동생의 메시지를 읽다가 문득 37년 전 봄날이 생각났습니다.
1984년 봄,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저는 부산에서 서울에 있던 대학교에 진학하여 대학 3학년이 되었을 때였고, 두 살 터울 남동생도 서울에서 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아버지도 서울에서 직장을 다녔을 때라 부산 집에는 어머니와 여동생 둘만이 있었습니다. 여동생이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를 서울로 전학해서 가족 모두가 서울에서 살기로 계획이 되어 있었습니다.
새 학기라 수강 신청으로 정신이 없었을 어느 날, 하숙집으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병규야, 여동생이 많이 아파하니, 빨리 네가 내려와야겠다.”
저는 영문도 모르고 연락을 받자마자 황급히 부산행 기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가보니 여동생은 집에서 가까운 병원 응급실에 누워있었습니다. 40℃가 넘는 고열에 몸이 마비 증세로 전혀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엑스레이를 수없이 찍어 봐도 도저히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부모님은 퇴원해서 이 병원 저 병원, 용하다는 침술원까지 부산에서 돌아다닐 수 있는 병원들은 모조리 찾아 헤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니 계속 지켜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는 무책임하고 애매한 대답들뿐이었습니다.
약 한 번 먹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던 자식이었기에 부모님은 오직 여동생을 살려야겠다는 일념과 혹시라도 방법이 있을까 싶어 무작정 마지막 밤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새벽에 내렸던 서울역 광장에서의 그날은 37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납니다.
새벽에 도착한 서울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어느 대학병원으로 갔습니다.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의사 선생님을 붙잡고 살려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은 동생이 열이 높고 의식이 없는 걸 보더니 “불가능하니 다른 병원으로 가보세요”라며 차갑게 우리를 내몰았습니다. 할 수 없이 구급차를 빌려 몇 군데 병원을 더 가보았지만 하나같이 죽어가고 있는 동생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새 학기에 신나 해야 할 어린 여동생은 길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차가운 세상인심에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구급차에서 고열에 시달리는 동생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앞으로는 길거리에서 헤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번 병원에서도 받아주지 않으면 우리 그냥 포기해요.”
역시나 마지막으로 선택한 병원에서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응급실 한편에서 동생을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우는 것 외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어느 인턴 선생님께서 울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와 “혜화동에 있는 국립병원 응급실로 무조건 찾아가 보세요. 아마도 그곳은 받아주실지도 모릅니다” 하고 조용히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두운 구렁텅이에 동아줄이 내려온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느님의 손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또다시 구급차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꼭 받아주길 바랐습니다.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이 극심한 시간이라 구급차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멈추기가 일쑤였습니다. 조수석에 탔던 나는 조금이라도 차들이 빨리 비켜주기를 바라며 윗옷을 벗어 창밖에 내밀고 열심히 흔들어댔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도착한 병원에서 다행히 동생을 입원시켰고, 12시간에 걸친 긴급 대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다른 병원에서 병명이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던 동생의 병명은 척추 농양, 즉, 척추에 염증이 생겨 온몸으로 퍼지면서 몸이 마비되고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희귀한 불치병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동생에게 왜 염증이 척추에 생겼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어깨에 종기가 생겼는데 혼자서 고약 붙이다가 내버려 두었는데 그게 원인이었나 봐.”
어머니는 가게 일로 항상 바쁘셨고, 여동생은 종기가 생겨도 병원 가는 것을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만일 병원에서 그때 종기를 제대로 치료만 했더라면 동생의 인생은 지금쯤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때만 생각하면 할수록 내 마음이 매우 아팠습니다. 여동생은 가까스로 사망 직전에 수술을 단행하여 목숨만 겨우 구했습니다. 인공호흡기를 꽂은 채 식물인간 상태로 계속 중환자실에 있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부산 생활을 청산하고 아버지는 일터에서, 어머니는 병원에서 생활하셨습니다. 저와 남동생은 하숙집과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되어 우리 가족은 집 없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동생은 중환자실에서 무의식상태로 깨어나질 못했고, 심장이 멈춰 의사들이 중환자실로 몰려갈 때도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동생을 잃게 되지는 않을까 울며 기다리고는 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동생을 보며 죽음이 우리와 얼마나 가까운지도 몸소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 복도에서 부모님께 담당 주치의가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엿듣게 되었습니다.
“의식도 없이 마냥 기다릴 수도 없으니 이젠 포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만일 기적적으로 깨어나 살아있더라도 평생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므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의 짐이 될 수 있으니 이제 포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식물인간 상태인 동생은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었고, 비싼 병원비는 빚으로 쌓여만 가니 병원에서도 포기하기를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며, 어떠한 고통이라도 감수할 수 있으니 꼭 살려만 달라고 간청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머니는 교수님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며 통곡하셨습니다. 빛조차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에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수업을 마치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중환자 대기실로 어머니를 보러 갔는데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환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병규야, 네 동생 눈 떴다. 이제 살았다.”
“정말이에요? 엄마, 정말이에요?”
믿기지 않아 어머니를 붙잡고 몇 번이나 되물었습니다. 드디어, 동생이 긴 잠에서 깨어난 것이었습니다. 면회 시간이 되자마자 동생에게 달려갔습니다. 날 알아보냐고 식구들이 돌아가며 물었습니다. 동생은 말이 나오지 않는지 혓바닥으로 혀를 차며 간호사에게 신호했고, 간호사는 글자판으로 동생에게 의사를 물어 대답을 알려 주었습니다.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이젠 우리를 알아볼 정도로 의식이 완전히 돌아왔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보호자 대기실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길고 긴 터널의 끝이 보였습니다. 6개월여 만에 의식이 돌아온 동생은 산소호흡기를 떼기 위해 호흡 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산소호흡기를 떼고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목소리 내서 말하기, 앉기, 음식 먹기 등 갓 태어난 아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모든 걸 새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몸은 마비가 되어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앉혀줘야 앉고, 먹여줘야 먹었습니다. 마비가 얼마만큼 풀려 돌아올지는 의학적으로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루 이틀 또 긴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동생의 손발이 되어 먹여주고 입혀주며 수발을 들며 생활하셨습니다. 그래도 죽을뻔한 동생이 살아나서 얼굴 보며 말하니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2년 6개월간의 긴 병원 생활을 끝내고 부모님은 부천으로 이사했습니다. 전신 마비가 된 동생 곁에는 항상 어머니가 손발이 되어 함께 하셨고, 우리는 그런 어머니께 동생을 맡기고 직장으로,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직장인이 되어 바쁘게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어머니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주일에 시간 되면 휠체어 좀 밀어주렴, 주일 미사에 가야 하는데 네가 도와줘.”
어머니와 여동생이 큰고모 권유로 성당을 다니시게 된 건 알았지만 한 번도 저에게 성당에 같이 다니자는 얘기를 하신 적이 없었기에 그날의 부탁은 의외였습니다.
일요일 아침 눈뜨자마자 어머니를 도와 동생 옷을 입히고 휠체어에 앉혀서 문을 나섰습니다. 동생 일은 늘 어머니 전담이라 휠체어를 처음으로 밀게 되었습니다. 성당으로 향해 가는데 사람들이 우리만 쳐다보는 것 같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 여동생과 함께 나도 같은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왠지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성당에 도착 후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동생의 영성체를 도와야 했습니다. 동생과 맨 뒷자리에 앉아서 영성체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동생은 맨 뒤에서도 미사보를 쓴 채 성가를 열심히 불렀습니다. 그런 동생의 모습이 새삼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동생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살아만 주기를 얼마나 기도했던가, 그런 동생을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부끄러워하다니, 눈물이 났습니다. 저 멀리 십자가의 예수님이 나를 꾸짖는 것 같았습니다.
신자들의 영성체가 끝날 무렵 휠체어를 밀며 정중앙 통로로 신부님께 다가갔습니다. 신자들이 통로로 나오는 우리를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이젠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따스하게 내려다보시며, 내 부끄러운 죄를 포근히 감싸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것 같아 용기가 났습니다. 한 발짝 한 발짝 휠체어를 미는데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는 사람처럼 설레고 두근거리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장애인의 가족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자신이 창피하게만 느껴지며, 아무에게도 그러한 사실을 알리기 주저하며 살아왔는데, 주님이 제 죄를 사랑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 어머니께 성당을 왜 다니게 되셨는지 자세히 여쭈었습니다.
“내가 시집왔을 때 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성당을 다니셨다. 할머니의 어머니이신 증조 외할머니도 신자셨지. 그런데 바쁘게 살다 보니 잊고 있었는데 엘리사벳이 아프면서 큰고모가 시부모를 따라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더라. 엘리사벳이 아픈 게 하느님의 뜻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어머니는 집 가까운 성당을 찾아가 상담을 받으시고 엘리사벳과 함께 교리를 배우며 세례를 받게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천주교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연애 중인 아내와 명동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는 꿈도 생겼습니다. 마침내 아내와 결혼을 약속하고 성당 사무실에 들렀는데 사무장님은 “이곳에서는 세례를 받은 신자만 예식을 올릴 수 있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식을 장소만 성당으로 정하면 되는 줄 알 정도로 천주교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명동성당 주말 교리반에 등록하였습니다. 6개월 동안 수료만 하면 오직 결혼식을 할 수 있다는 목표만 가지고 교리반에 다녔습니다. 신앙 지식도 없었고 직장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결석도 잦기 일쑤였습니다. 교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담당 수사님께서 저희를 면담하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출석 일수도 모자라고 세례받기에 많이 부족하니 이번에는 힘들겠어요”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일반 예식장을 알아봐야겠다고 문을 나설 때였습니다. 담당 수사님은 저희를 다시 불러 앉혀놓고는 예상외로 “그래도 특별히 저의 재량으로 두 사람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니,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세요”라는 은총의 선물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어머니와 엘리사벳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아내와 저의 세례명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오빠가 우리 집에 신앙의 반석이 됐으면 좋겠고, 언니는 성모님께 바치는 아름다운 장미가 되길 바랄게요.”
엘리사벳이 알려준 세례명은 베드로와 로사라는 세례명이었습니다.
혼인성사를 올리는 아름다운 날 엘리사벳도 휠체어에 앉아서 함께 혼인성사에 참여하며 우리 부부를 축복해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저희 부부에게 작용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부모님 댁 근처 동네에 전세방을 구해 신혼생활을 했습니다. 아들이 태어나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10개월이 될 무렵 요한을 출산하고 휴직하고 있는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여보, 다 탔어! 다 탔다고!!” “뭐? 대체 뭐가 다 탔다는 말이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다 탔다는 말인지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내의 그다음 말을 듣고서는 화들짝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우리 집이 다 탔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전 근무시간에 연락을 받고서 황급히 지하철에 몸을 싣고 집으로 가는 내내 온통 나의 머릿속은 복잡하였습니다. ‘어째서 우리 집이 다 탔지? 대체 무슨 일이지?’ 도저히 믿기지 않을 엄청난 일이 일어나긴 했는데 처음 겪는 화재 소식에 마음을 조아리며 가는 내내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와 아들의 안전이 무엇보다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제발 로사와 요한을 보살펴주소서’.
계속 화살기도를 하며 집에 도착했습니다. 집 근처 골목은 이미 소방차와 불구경을 하는 인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저는 수많은 인파 속을 헤집고 우리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원인 모를 화재로 인해 세간살이는 모두 불에 타거나 물에 젖어 있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단독주택 2층에 전세로 살고 있었습니다. 다세대 주택이라 여러 세대가 살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화재 피해를 본 곳은 우리 집뿐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우리 부부의 보금자리는 불과 1시간 남짓 사이에 엄청난 화재가 발생하여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모든 것이 무너져내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앞이 캄캄하고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결혼생활을 위해 정성껏 마련한 신혼살림이 불과 2년도 되기 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려 도저히 믿기지 않을 일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그 당시 화재가 일어난 시간에 잠든 요한을 방에 눕혀놓고 아내가 잠깐 외출을 하려고 집을 나섰다가 그날은 아무래도 마음이 걸려 다시 돌아와 잠든 요한을 업고 외출하는 바람에 인명피해가 없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아내는 지금도 하느님의 특별한 손길이 미치지 않고서는 잠든 요한을 다시 업고 나갈 수 없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심은 미사에 참여한다고 하루아침에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의무적이었고 습관적인 행동으로 변해갔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사도 자꾸 빼먹었습니다. 결혼생활도 익숙해짐과 동시에 권태기에 빠졌습니다.
그 무렵 거래처에 계신 한 분이 가톨릭 신자였는데, 저에게 ME(Marriage Encounter, 부부 일치 운동) 2박 3일 피정을 권유하였습니다. 나는 결혼생활에 회의가 들 무렵 한 줄기 빛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무작정 참여하였습니다.
2박 3일 동안 교육을 받으면서 결혼 후 그동안 아내에게 내가 잘못한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둘은 부둥켜안고 많이 울었습니다. 서로에게 용서와 사랑을 구하며 하느님 안에서 새롭게 부부 생활을 하자며 다짐했습니다. 우리 부부가 열심히 ME 교육을 받는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하느님께서는 ME 봉사 부부로 살아가는 특별한 소명의식도 심어 주셨습니다. ME는 우리 부부에게 캄캄한 망망대해에서 만나는 등대와도 같았으며, 뜨거운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시스와도 같은 인생의 생명수였습니다. 오로지 출세와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가정과 신앙생활을 소홀히 했던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안정적인 첫 직장을 그만두고 신앙생활과 직장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자유로운 프리랜서로 전직하였습니다. 가톨릭에 입문한 지 8년 만에 뒤늦게 깨달은 가톨릭 신자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모르는 신앙 지식을 얻기 위해 열심히 신앙 서적도 읽었습니다.
성당 일이라면 열정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전례와 성지안내 봉사, 그밖에 수많은 피정과 크고 작은 신앙 단체 활동을 통하여 영적인 목마름을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 보니 멀리서 어렵게만 느껴졌던 성직자, 수도자분들과도 거리낌 없이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기회도 생겼습니다. 그동안 사회적 성공과 출세,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물욕에 사로잡혀 살았던 과거의 나와는 달리,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 사목과 수도생활을 하고 계시는 그분들에 대한 경외심과 더불어 어떻게 하면 나도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끊임없이 고뇌하고 하느님 안에서 인생의 해답을 열심히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남동생도 결혼하였지만, 초기에는 혼인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직접 설득을 하여 ME를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동생 부부도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루도비코와 스텔라라는 세례명도 직접 지어 주었습니다.
아버지도 성당에 나가실 것을 권유하여 ‘요아킴’이라는 세례명을 받게 하였습니다. 5년 전 돌아가실 때는 병자성사와 장례미사를 통해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처럼 신앙의 반석으로 우리 가족을 전교하여 가톨릭 신자로 만들었습니다.
37년 전 엘리사벳의 불치병으로 시작된 엄마와 여동생의 신앙이 나에게 신앙의 씨앗으로 자라났고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남동생 부부와 아버지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30년 넘도록 외출 한번 마음 편히 할 수 없었습니다. 세월의 무게로 점점 지쳐가셨고 어느 순간 술에 의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집을 방문할 때마다 부엌 구석에는 빈 술병들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엘리사벳 돌보느라 많이 힘드시죠?” 나는 어머니 손을 붙잡고 여쭈었습니다.
“그래, 엘리사벳이 있어 너무 좋은데, 가끔 힘에 부치는구나. 술을 먹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는구나.”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시며 한숨을 쉬셨습니다. 엘리사벳의 장애는 어느새 어머니의 삶에도 일종의 장애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부천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갔습니다. 또 같은 병원에 있는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도 다니시며, 수녀님의 상담을 통해 지친 신심도 회복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 엘리사벳과 함께 가족들을 위해서도 묵주기도 하시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십니다. 여느 장애인 부모들처럼 어머니 소원도 엘리사벳보다 하루만 더 살고 싶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루하루 자신을 이겨내고 힘든 고통도 잊은 채 즐겁게 생활하고자 하는 엘리사벳과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가톨릭 신앙을 되새기곤 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죄의 고통 중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을 위해 지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인류를 죄악에서 건져낸 일이 강생구속입니다. 강생구속이라는 말씀을 떠올릴 때마다 엘리사벳과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내가 건강하게 무탈하게 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나 대신에 무거운 고통의 시간을 이어나가고 있는 엘리사벳과 어머니가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듯 엘리사벳이 우리 가정에 밀알이 되어 성가정을 이루었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주님, 이 가정에 오셔서 성가정을 이루셨음에 감사드립니다.’

김병규 베드로 (인천교구 심곡부활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