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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방송[제9회 신앙체험수기] 우수상 / “주님, 어디에 계시나이까”

작성자 : 문화홍보국 작성일 : 2022-03-14 조회수 : 343

[제9회 신앙체험수기] 우수상 / “주님, 어디에 계시나이까”

박치준 미카엘인천교구 가좌동본당


2022.03.13 발행 [1653호]




1. 하느님, 어디에 계시나이까?

인생은 무엇일까? 삶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어느 날 내 인생의 전부이고 내 삶의 정말 소중하고 사랑하는 존재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그 이후의 일상과 삶은 어떻게 하면 될까?



지난 8월 말 딸은 핸드폰이 요란하게 흔들려 전화를 받았다.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할머니께서 소천하셨다는 소식이었다. 딸은 나에게 장례식에 같이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잠시 머리가 멍하고 시간이 멈춘 듯이 딸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어떤 장례식과 결혼식 등에 전혀 참석하지 않았다. 매년, 매달 각종 행사와 결혼식과 장례식은 많았지만 내가 그곳에 가서 감정을 조절할 자신이 없었다. 특히, 결혼식과 장례식은 더욱더 그러하였다. 딸이 재차 묻는 말에 나는 “좀 힘들 것 같은데, 아직도 내가 상태가 말이 아니어서”라며 장례식에 갈 자신이 없음을 내비쳤다. 딸은 잠시 듣고 있더니 “아빠, 그래도 이번은 같이 가보자. 그래야 이제 일상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아빠가 도저히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잠시 깊은 생각에 빠졌고 딸의 요청에 잠시 고민하다 “그래 그럼 같이 가볼까?”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딸에게 대답해 놓고 한참 멍하니 서 있었고 섣부른 대답을 한 듯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갑자기 추워졌다.



어느덧 저녁이 되어 딸과 함께 장례식에 가기 위해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인하대병원 장례식장에 가는 버스를 타고 밖을 내다보니 보이는 모든 장면이 회색 건물로 칠해진 듯 어눌한 얼굴로 도배를 하고 있었다. 차창으로 보이는 건물들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깜박 잠이 들었는지 목적지에 세 정거장 남아 있었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하였고 병원 앞에 불빛들이 나를 감싸 안으며 서로 이제 왔느냐고 인사하는 것 같았다. 병원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마침 딸 친구들이 로비에 있었고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할머니 빈소 105호로 향했다. 빈소로 가는 길에 친구 부모님이 함께 있었고 빈소를 들어갔을 때 딸 친구 봄이 얼굴은 그냥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친구 봄에게 잠시 아련한 눈빛을 보내고 상례를 하고 몸은 어떠냐고 말을 건넸다. 봄은 “어떻게 이렇게 찾아 주셨냐며 아버님도 지금 너무 힘들 텐데 이렇게 찾아 주셔서 제가 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하면서 봄은 딸과 서로 손을 잡고 끌어안으면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라며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빈소 안은 순간 울음바다가 되었고 숨이 막히는 고요를 깨면서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친구 봄은 어느덧 30분쯤을 넋 놓고 울며 얼굴은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었다. 봄이 아버지가 간신히 일으켜 세우고 빈소를 찾은 우리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겠다고 자리를 안내하였다. 봄은 고등학교 3년간 친한 친구로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봄의 할머니께서 갑자기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항암 치료를 하였으나 암세포는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봄의 할머니는 종교에 입문하여 교회를 정성으로 섬기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는 늦게 종교에 입문해서 그런지 신앙생활을 남들보다 몇 배 더 열심히 하였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지 않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주위의 여러 사람에게 종교에 입문하도록 설득을 하며, 신앙생활을 통해 생활에서의 걱정을 해소하도록 영혼을 구원하여 마음의 안식과 안정을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잠시 마음이 진정된 딸 친구 봄은 애절한 얼굴과 힘이 없이 축 늘어진 몸을 아버지가 부축하면서 자리에 앉았고,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곁에서 지켜보며 병간호하였던 이야기와 마음에 응어리가 된 못다 한 것에 대한 착잡함을 꺼내며 손수건에 눈물을 묻히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봄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대로 그곳에서 더 이상 앉아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갑자기 귀에서 “여보, 잘 살 수 있지, 잘 살면 되지 뭐…. 우리 신랑, 내 마음 알지. 자기의 마음이 내 마음, 내 마음도 자기 마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아끼는 우리 딸, 우리 신랑 고마워 알고 있지! 응 우리 신랑 잘 살아 알았지!”라며 환청처럼 그날의 시간 속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몸은 갑자기 온몸에 피가 터지는 듯하여 빈소를 뛰쳐나왔다. 나의 손과 발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분노에 못 이겨서인지 나의 입술은 새파랗게 변하였고, 입은 움직이지 못하고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벌써 3년이 지났건만 시간은 지나가지 않았고 그날의 시간으로 일시 정지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시간은 지나가고 있지만, 현실의 시간은 역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3년 전의 일이다. 2018년 1월 20일 일요일 아내가 독감으로만 알고 동네 병원에서 치료 중이었다. 언제나 병이 나을까 매일 걱정을 하고 있던 시간, 아내가 갑자기 코피를 쏟았고 나는 긴급하게 아내를 응급실에 가기 위해 휴대폰으로 다급히 119에 전화했다. 119 상담원에게 주소를 말하며 아내의 긴급한 상황을 알렸고 15분 정도 아파트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119구급차가 도착하였다. 나는 아내를 조심조심 부축하여 구급차에 간신히 눕혔고 대형병원 응급실로 빨리 이동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집에서 가까운 2차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여 1시간 정도 각종 검사와 엑스레이를 촬영하였다. 아내는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한기를 느끼며 고통을 호소하였다. 20분이 지났을까 응급실 의사가 오더니, 현재 이 병원에서는 진단할 수 없으니 서둘러 대학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의사에게 병명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의사는 정확한 진단을 위해 대학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며 본인이 인하대병원 응급실에 연락해 놓았으니 지금 바로 구급차를 타고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기라고 하였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병명도 모르고 어쩔 수 없어 구급차에 아내를 부축해서 다시 인하대학교 병원으로 이동했다. 어둠이 내려진 경인고속도로를 타고 인하대학교 병원으로 가는 시간은 40분 이상이 걸렸고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독감 검사와 수십 가지 검사가 순서를 이어갔다. 40분 정도 지났을까, 응급실 총괄 의사가 보호자를 찾으며 나를 불렀다. 나는 아내를 응급실에 혼자 남겨 놓고 의사를 따라갔다. 응급실 의사는 “부인께서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의심되니 바로 입원해야 된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멈추었고 얼굴은 굳어져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또한,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간호사와 의사들이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고 나는 말도 안 된다며 여러 번 되물었다. 의사는 “내일 골수 검사를 채취해서 검사해야 정확한 병명을 알겠지만, 지금 부인의 백혈구 수치가 23만으로써 현재 상태로는 어디에 잠시 부딪혀도 바로 사망할 수 있는 상태이니 빨리 입원해서 응급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을 하였다. 의사는 이어서 “부인에게는 제가 직접 이야기할까요? 아니면 보호자께서 이야기하실 건가요? 부인께서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조심조심 알려드리던지 나중에 알려주는 것이 나을 것 같다”며 정말 조심히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며 긴급히 입원 수속을 진행해 달라고 하였다.

나는 응급실 베드에 누워 있는 아내에게 돌아갈 힘이 없었지만, 간신히 몸을 이끌고 아내한테 갔다. 아내는 나의 표정을 보고는 “여보, 나 죽어? 이제 나 죽는 거야?”라며 물었고 나는 “자기가 왜 죽어? 자기 안 죽어. 꼭 다 나아서 완쾌해서 집에 가야지 알았지 여보”하며 아내에게 별것이 아니라며 아내 안정을 위하여 거짓말을 하며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학수고대하였다. 아내는 그날 긴급 입원하였고 밤새 38도에서 39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고열과 싸우며 사경을 헤맸다. 의사와 간호사는 백혈구 수치를 낮추기 위해 수혈을 하고, 높게 올라간 체온을 낮추기 위해 긴급 해열제 투여와 얼음 팩을 바꿔가며 힘을 썼다. 나도 아내가 이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얼음물에 수건을 적시고 이마와 목, 겨드랑이에 번갈아 갈아주면서 아내가 고열과 싸워서 이기기 위해 일분일초를 벗어나지 않고 간호하였다. 나는 아내를 간호하면서 간절한 마음속으로 “하느님, 어디에 계시나이까?(시편 10,1) 하느님, 사랑하는 제 아내를 제발 살려 주세요, 만약, 데려가신다면 아내를 살려 주시고 저를 데려가 주세요~!”라며 수백 번을 빌고 또 빌었다. 이러한 나의 노력이 하느님을 감동시킨 것인지 다음 날 새벽 5시에 이르러서야 아내의 체온은 35도로 내려갔고 숨소리 또한 새근새근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기처럼 숨을 쉬었다. 아내의 입원 첫날은 이렇게 시작되었지만, 이것은 투병의 시작에 불과했다.






2. 하느님, 저희를 버리시나이까?

2018년 4월 9일, 며칠 전 두 번째 항암 치료를 끝내고 호중구 수치가 떨어져 역 격리 음압병실로 자리를 옮겼다. 아내에게 23번째 맞는 결혼기념일이다. 나는 깜짝 선물로 용돈을 모은 현금 100만 원과 부드러운 목도리, 양말 그리고 딸은 따뜻한 털실 외투 그리고 USB 칫솔 살균기, 장갑 등을 선물로 준비하였다. 나는 전날 잠시 외출하여 집에서 손수 쇠고기 미역국을 끓여와 병원 식당에 살균하여 아침 식사에 내어놓았다. 아내를 위해 몰래 준비한 이벤트로 그동안 한평생을 함께하며 무던하게 살아온 아내를 위한 고마움을 기리는 증표로 만들었다. 아내는 선물이 뭔가 하고 개봉할 때, “억!” 하는 먹먹하고 깜짝 놀라 가슴을 잠시라도 따뜻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며 “에고 이것을 언제 다 준비했어 힘들었겠다~ 우리 신랑, 딸~ 사랑해. 너무너무 행복하고 고마워~ 내가 내년에는 맛있는 요리해 줄게, 꼭 약속할 게~”라며 미역국 한 사발에 밥 한 공기를 말아서 맛있게 먹는 것을 보니까 딸도 나도 마음이 울컥했다.

아내와 나는 25년 전 회사에서 만나 2년 반 사귀며 사내 결혼을 했다. 벌써 10년이란 시간이 두 번 넘어가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며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사이로 23년 넘게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매년 내년에는 아내의 생일을 더 풍족하게 행복하게 해주어야지 하는 다짐에 다짐을 했지만 매년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서 올해는 아내에게 특별한 결혼기념일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평소에도 사랑이 꿀처럼 넘쳐난다는 말을 자주 들었기에 너무 지나치면 생활비 걱정할까 봐 일부러 준비하지 않고 있는 척하였고, 매년 먼저 꼼꼼하게 맛난 음식과 선물을 딸과 함께 가정 살림을 꾸리며 먼저 준비하였던 사랑이 넘치는 아내였다.

7년 전의 일이다. 인천에서 서울 여의도 증권투자자문사로 아침 일찍 출근하러 광역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갑자기 자동차가 후진했다. 무보험 자동차에 하반신이 깔리고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져 긴급 수술과 재활치료로 6개월을 병원에 입원한 나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였던 아내. 그렇게 치료하며 퇴원 후 다니던 회사가 1년 후 다른 회사와 합병이 되면서 본부장 자리를 내놓고 강제 퇴사하게 되면서 급여와 퇴직금은 체불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대표이사까지 억대 주가조작사건에 휘말리며 증권사는 폐업되었고 6개월간 급여 또한 받지 못하며 아내에게 매일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하였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삼십 년 지기 친구에게 우연히 보증을 서준 것이 친구 회사가 부도나면서 친구는 해외 도피하고 일부 2억이 넘는 부채는 눈덩이처럼 매일 불어 나에게 넘어왔다. 급기야 서울 예술중학교에 영재로 다니던 딸마저 부채로 학비를 감당치 못하여 거주지 일반중학교 옮기게 되었고 딸은 음악을 더 이상 이어가기 힘들 정도로 되었다.

매일 불어나는 부채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유일한 부동산이었던 빌라를 아내와 딸의 동의를 얻어 매매하고 부채를 갚았으나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 되었고 조금 남은 돈으로 지하 단칸방으로 세 식구가 옮겨야 했다. 하루하루 견디기 힘들고 버티기 힘들어 “하느님, 어디에 계시나이까? 하느님, 저희를 버리시나이까?”라며 매일 하느님을 부르고 아내와 손을 붙잡고 울며 하느님을 찾고 조금의 희망을 찾아보았지만, 아침도 저녁도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족 모두 자살을 생각했던 어느 날, 자살을 마음먹던 그 날 “정말 딱, 한 번만 살고자 버텨보자”며 마지막 삶의 희망으로 선택한 개인파산 및 면책을 난생처음 법원에 신청하고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피를 말리며 기다렸다. 그 후 1년 6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법원으로부터 파산 결정과 면책 결정 함께 받던 날, 우리 세 식구가 펑펑 울며 이제 모든 부채에서 벗어나던 날, 언제나 함께 한 우리 한 가족 세 식구였다.

그날 이후 3년을 열심히 일해 아파트로 이사했다. 정말 앞이 보이지 않고 힘겨워 허리 한 번 펴기 힘든 하루 일상에 비할 수는 없어도 아내는 “우리 신랑, 우리 아빠의 사랑이 최고!”라며 한 식구의 가장과 남편의 기를 살려줬다. 이 세상 하나밖에 없던 아내에게 금전적이고 물질적이긴 하지만, 나의 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긴 쇠고기 미역국으로 아내에 대한 사랑의 절실함과 본심을 알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꼭 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준비한 오늘이었다.

평생 마지막까지 함께하자고 약속하던 23년 전 1995년 4월 9일 몇백 년 만에 길일이라는 뉴스에 아내와 나도 한 주인공이 되던 그 날 결혼을 하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다. 신혼여행은 3박 4일 서귀포 KAL호텔에 여장을 풀고 가까운 시장에 가서 신선한 해산물과 회도 먹고 밤에는 사랑을 나누며 부픈 단꿈을 꾸며 백년해로하자고 서로 깍지 끼우며 한날한시에 마지막도 함께 하자며 약속하던 4월 9일이었다. 또한, 일 년에 한두 번씩 여행을 가자고 약속하였지만, 세상과 삶의 생활이 여행 한 번 가는 것도 시간을 낼 수 없을 만큼 살아가는 시간에 로봇이 되어 회전목마 돌 듯 앞날 이 과거와 반복되어 여유 있고 즐거운 여행 한 번 가지 못한 지난날이 아내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고 고맙고, 매일 매일을 아끼고 사랑했다. 아는 항상 어떠한 내색조차 안 하고 부부간에 정과 가족에게 사랑과 행복을 긍정과 함께 베풀면서 함께 살아온 내 사랑의 여행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비하게 나열되었던 군상의 일들이 마무리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 가족의 삶의 시간 설계 속에 차질이 생긴 것은 느닷없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시간 여유는 조금씩 쌓아가고 있었다. 아내와 꿈꿨던 시간의 기억도 되살리며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의 행복도 해결사가 될 수 있는 곳에서 두려움을 없애며 우리의 마지막 시간 여행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점점 다가오는 시간이 더해갈 때마다 잠도 오지 않았다. 아내와 23번째 기념일을 마친 후 아내의 3번째 항암치료가 있기 전 임시 퇴원을 하여 집에서의 꿈같던 일주일 심리적 안정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간의 줄다리기가 고속도로가 되었으면 하였다. 달리는 시간의 빠른 속도가 나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듯했다. 지금의 이 시간이 우주상에 지구에 하나의 점을 찍고 있다는 것조차 거추장스럽고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의 눈물이 줄지어 흘러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면 시간도 바뀔 것이라 믿고 “주님을 찾고 또 찾으며 아내가 완쾌되기를 기도드렸다.” 밤이 오면 낮이 오고, 시간도 달라지고 결과도 좋아지리라 생각하며 하루하루 집에서 아내와 보내며 행복의 기록을 만들어 갔다.

일주일이 벌써 지나갔고 3차 항암치료를 위해 다시 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3차 항암은 1차, 2차보다 5배 이상 고통이 다가왔고 그 결과 주치의로부터 “암세포가 혈액 속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하며 기쁨의 눈물을 눈에 가득 채우고 갈망했던 행복과 자유를 얻어 놓고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필리 4,6)라는 말이 들려왔다. 기나긴 어두운 터널과 고통과 우울의 시간을 달고 살아야 했던 시간도 이제 행복으로 바뀌어 시작된 것 같았다. 그러던 6월 16일, 이제 꿈같이 여기던 퇴원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 날 아내가 수액을 많이 맞았는지 “배가 빵빵하다”고 하면서 소변이 잘 나오지 않고 불편하다고 고통을 호소하였다. 간호사와 의료진들은 잠시만 기다리는 말뿐 조처를 하지 않더니 자꾸 고통을 호소하는 것에 인상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잠시 20분이 지났을까 3병동 간호사 한 명이 오더니, 투약 약물을 말하지 않고 아내가 맞고 있는 수액에 직접 투여하였다. 그 간호사가 ‘아티반’이란 약물을 주사한 이후 아내는 갑자기 정신을 잃고 헛소리를 하며 온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긴급하게 병동 간호사와 주치의를 호출하였고 아내의 상황에 대해 빨리 조치를 하라고 알렸으나 병동 간호사와 주치의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긴급조치도 취하지 않고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이날 투약한 약물로 아내는 그 이후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였고 이 투약한 약물에 대한 아내의 긴급 조치와 치료를 계속 요구하였으나 주치의와 간호사는 조치할 생각조차 없었다. 그 다음 날 대학병원 주치의에게 이상한 약물을 투약한 책임을 묻겠다고 알렸고 그다음부터 병원 의료진들은 안정을 찾지 못하는 아내에게 고농도 30배 되는 산소 호흡기를 아내에게 강제로 부착하고 투여하였다. 그날로부터 3일 만에 사랑하는 아내는 의료사고로 하늘로 올라갔다. 대학병원 의료진의 투약할 수 없는 약물 투여로 3일 만에 갑자기 내 삶의 전부이고 소중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하늘로 먼저 보낸 이후 나의 시간은 제자리에 멈춰져 있었고 하루하루의 시간은 암흑이 되어버렸다.

하느님을 원망하였고 또 원망하였다. 세상이 너무 두렵고 막막하였고 아내와 함께했던 삶이 한순간 무너졌고 분노와 화는 우주를 뚫어버릴 만큼 폭발했다. 대학병원은 사과 한마디 없었고 주치의와 해당 관련 의료진과 간호사들을 당일 해외로 몰래 도피시키며 중요 의료기록 발급도 이런저런 이유로 발급도 차일피일 미루기에 바빴다. 너무 분하지만 억울하며 아내의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아내의 장례를 마쳤고 집에 남겨진 딸과 나는 사면초가에 서 있는 듯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조차 아무것도 없었다. “아내를 따라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생각했고, 자주 되뇌었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잘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아내와 함께 우리 가족이 울고 웃던 날이 모두 머리에서 회전하고 순간순간 나타났다. 심장을 끄집어내는 듯했고 온몸이 기지개를 필 수 없게 밧줄로 묶어 놓은 것 같았다. 어느 날 아내가 나타나 내 손을 잡아 주었다. 현실이기를 바랐지만 꿈이 나를 앞서가고 시간은 조각조각 나뉘어 잘 맞춰지지 않고 어제의 기억조차도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아내가 먼저 하늘로 떠난 후 나는 아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아내는 평생 희로애락을 같이하며 사랑하고 아끼며 행복을 만들며 내 삶의 동반자이자 전부로서 아내의 슬픔을 몸과 마음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었고, 아내가 떠난 후 내 삶은 일분일초가 지옥과 죽음과 같은 시간이었다. 그날 이후의 시간은 나에게 필요 없는 시간이었고 삶을 살아가는데 사치의 시간이었다. 매일매일 삶을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에서 하루하루 숨을 도저히 쉴 수가 없었고 때로는 내가 어디로 길을 갔는지 길을 잃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움직이고 이동하는 공간에는 항상 아내의 체취로 가득하였다. 1년 내내 24시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낮이나 밤이나 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1년을 넘어갔다. 오늘이 괜찮으니 내일도 좋은 일이 있겠지. 이렇게 항상 외쳤지만, 이제는 행복도 나와는 무관한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엄청난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닌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을 겪게 하는지 하느님이 정말 원망스럽고 화가 났다. 매일 밤 “주여, 저희를 버리시나이까? 주여, 어디에 계시나이까?”를 외쳤고 하느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1년, 2년이 흐르고 아내와 함께했던 공간은 재건축으로 인하여 신축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아내와 함께 항상 같이 있는 것을 상상하면서 오십 대 중반에 홀로서기 연습을 하고 있다.

아내와 사별한 이후 나는 심장병 중 협심증 진단을 받았고 3개월 또는 6개월 간격으로 대학병원에 정기 관찰을 하러 간다. 작년 2월부터 벌어진 세상은 나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고 나와 같은 기저 질환이 있는 환자에게는 지금 이 세상이 공포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바이러스로 인해 변해버린 사회에서 사람들과 신뢰의 그물이 무너지고 얼어붙어 버린 인간관계는 언제 녹을지 모르는 세상으로 점점 이어지고 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과 신뢰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은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기본적인 삶의 생활이지만 지금의 세상은 이전의 웃고 즐기고 행복한 생각을 하는 세상이 아닌 감정이 지워져 버리고 불신의 관계로 세상이 바뀌어 버렸다.

오늘도 하나밖에 없는 예쁜 딸에게 매일 하는 말은 “코로나 시기에 몸조심해. 정말 조심해야 한다!”이다. 나는 매일매일 마음속으로 빈다. “나의 딸과 자유롭게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는 날이 빨리 돌아오기를… 그리고, 얼굴에 환한 웃음과 즐거움과 행복이 다가오기를….” 이 세상의 하루하루를 삶을 사랑하고 가슴으로 세상을 느끼고, 비록 아내가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의 삶도 긍정적인 생각으로 매일 매일 감사하는 생활을 시작하고 있다.






박치준 미카엘인천교구 가좌동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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