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삶의 무대, 다문화 아이들 교육위해 쓸것… 먼저 아파봤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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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8일 강원 홍천군에 있는 해밀학교에서 가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인순이는 “가수의 꿈, 너머의 꿈은 다문화 아이들이 자랑스러운 한국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곽성호 기자 |
■ 8년째 홍천서 대안학교 운영 인순이
다문화 가정 고등학생 졸업률
28%밖에 안된다는 소리 듣고
‘내가 할 일이 이거구나’ 결심
학생 6명으로 시작, 45명 졸업
빠듯한 재정 속 후원문의도 와
소액이라도 오래 돕는 게 중요
혼혈인 가수로 평탄치 않은 삶
곱슬이라고 출연거부 당하기도
59세에 보디빌딩…대학강의…
‘일단 해보자’ 끊임없이 도전
다문화가정 자녀들을 위한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가수 인순이(64)와의 인터뷰 성사는 쉽지 않았다. 여러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있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감성팔이’로 비칠까 봐 두렵다는 게 그 이유였다. 집요한 요청 끝에 지난 18일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강원 홍천군에 위치한 해밀학교에서 인터뷰가 이뤄졌다.
그날은 전날 비 온 뒤여서 쾌청하게 맑은 날씨였다. 공교롭게 학교 이름 ‘해밀’은 비 온 뒤 맑게 갠 하늘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비가 내리고 구름이 끼어도 다시 해가 뜨듯이 어려운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검정 바지에 흰색 블라우스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인순이는 무대를 휘어잡던 ‘영원한 국민 디바’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우아한 교육자의 자태가 엿보였다. 첫마디 인사를 나눔에도 강한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우선 가수에서 교육자로 변신한 배경이 궁금했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어려운 이들에게 돌려주고 싶었어요. 처음엔 나를 낳아 준 엄마를 위해서 양로원을 할까, 아니면 어려운 아이를 키울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2010년 추석 무렵 라디오에서 어떤 목사님이 다문화 고등학생 졸업률이 28%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이 이거구나 결심하게 됐어요. 저도 정체성 혼란으로 고통스러운 사춘기를 오랫동안 겪었거든요. 지금은 다문화 인구들이 늘어나 덜 하지만 그 당시엔 편견과 차별이 무척 심했지요. 그래서 먼저 아파 본 내가 옆에 있어 주면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사실 처음부터 학교를 설립할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저 어려운 다문화 아이들을 내 능력 범위에서 돕고자 시작했던 일이 시간이 지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이제 이 아이들을 위해서 남은 인생의 무대를 멋지게 수놓아 볼 생각입니다”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재정이 어려웠으나 이제는 주변에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가끔 후원에 대해 묻곤 하는데 한꺼번에 주는 큰 도움보다는 1만 원이라도 오랫동안 후원해 달라고 부탁해요. 학교와 마음으로 연결되면 다문화 가정을 향한 시선도 달라지지 않을까요.”
대안학교 설립은 그가 살아온 삶과 무관하지 않다. 인순이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한국을 떠나버린 6·25 참전 주한미군과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1957년 경기 포천에서 태어났다. 인순이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만 졸업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노래를 부르게 됐다. 가수의 길도 그리 평탄하진 못했다. 첫 방송 땐 곱슬머리라는 이유로 출연을 거부당해 모자를 쓰고 노래를 해야만 했다.
인순이는 1978년 걸그룹 ‘희자매’ 멤버로 데뷔했다. 데뷔곡은 김소월의 시에 안치행이 곡을 붙인 ‘실버들’이다. ‘실버들을 천만사(千萬絲) 늘여 놓고도/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이 내 몸이 아무리 아쉽다기로/돌아서는 님이야 어이 잡으랴’로 시작하는 실버들은 당시 가요 순위에서 7주 연속 1위를 기록하는 등 인순이를 일약 스타 반열에 올려놓았다. 1979년 MBC 10대가수가요제에서 중창부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3년 ‘밤이면 밤마다’로 선풍적인 인기를 이어갔다. ‘외로운 밤이면 밤마다/ 님모습 떠올리긴 싫어/희미한 전등불 밑에서/ 내 모습 초라한 것 같아 싫어/정답게 지저귀는 저 새들/ 내 맘 알까 몰라’로 시작하는 이 노래를 통해 거침없는 무대 장악력에 폭발적인 가창력을 마음껏 뽐냈다. 이후 ‘친구여’, ‘거위의 꿈’, ‘아버지’, ‘행복’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히트곡을 많이 남겼다. 지금까지 19장의 앨범을 통해 100곡이 넘는 노래를 발표했다. 팝, 발라드, 댄스, 디스코, 재즈, 트로트, 국악 등 모든 장르를 소화하는 가창력으로 데뷔 후 43년간 활동하면서 한국 최고의 여성 가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7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을 비롯해 1995년 KBS 방송대상 여자 가수상, 2004년과 2005년 연달아 KBS 가요대상 본상, 2005년 한국방송협회 가수부문 대상을 받았다.
그는 2010년 ‘꿈의 무대’로 불리는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6·25 참전용사와 16개 참전국 대사 부부를 초청해 눈물 어린 공연을 하면서 그의 히트곡 ‘아버지’를 불렀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후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모두 내 아버지입니다. 6·25전쟁 때 저처럼 한국에 자식을 남겨 놓고 잠 못 들어 하시는 분들은 이제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대한민국은 이제 잘살게 됐고, 저 또한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이렇게 성장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는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학교 인근 식당과 커피숍으로 옮겨가며 계속 진행했다. 커피숍에선 홍천지역서 근무하는 군인들이 오자 일일이 커피값을 대신 내줬다. “제가 군인의 딸이잖아요.(웃음) 그리고 군인들 나라 지키느라 얼마나 고생해요.” 군인들에게 커피값 내주는 것은 홍천에 온 이래 8년째 이어가고 있다고 배석했던 매니저가 귀띔했다.
인순이는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38세에 딸 박세인을 낳은 순간이고, 딸이 자신의 ‘보물 1호’라고 했다. “결혼할 생각도, 특히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었어요. 나 닮은 아이가 태어날까 봐 두려워서요. ” 혹시라도 피부색이 자신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미국에서 살게 하려고 했다. 다행히 얼굴은 쏙 빼닮았으나 피부색은 닮지 않아 안도했다고 말했다. 바쁜 가수 생활에도 자식 농사를 잘 지었다.
“딸이 열심히 공부해서 미국 유학을 갔는데, 자신이 원하는 스탠퍼드대에 합격했어요. 졸업할 때는 과 수석을 했고, 졸업생 1700여 명 중 10%에게 주는 상도 받았어요. 그런데 엄마와 가까운 데서 살고 싶다면서 짐을 싸 들고 한국에 들어왔어요. 자식이 부모 마음 대로 되나요(웃음)”.
남편과의 러브스토리도 눈길을 끈다. 인순이는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운명적으로 한 남자를 만났다. 인순이보다 4살 연하인 현재 남편 박경배 씨다. 당시 남편은 코미디언 고 이주일 씨가 운영하던 홀리데이 인 서울호텔의 자금담당을 맡고 있었다. 인순이가 이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서로 알게 됐다. 그 후 1992년 인순이가 강원 강릉에서 차가 뒤집히는 큰 교통사고를 당하게 됐다.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내 인생은 고작 한 줄 뉴스로 정리될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제 인생을 객관적으로 얘기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떠오른 사람이 남편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얘기 좀 하자고 했어요. 그러곤 살아온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어요. 사람 마음이 참 묘해요. 어느 날 식사를 하는데 남편이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아무 거리낌 없이 먹는 거예요. 그 모습에 반해, 그래 이 사람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다. 연상에 피부색이 달랐기 때문이다. 남편이 부모와 친척들을 끈질기게 설득해서 어렵게 1994년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 이후 남편은 진로를 바꿔 골프 관련 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와 경희대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인순이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삶의 대명사다. 59세 때인 2015년 보디빌딩을 배우기 시작했다. 배운 지 3개월 후에 열린 ‘2015 나바코리아 WFF’ 대회에 참가해 퍼포먼스 부문 2위를 차지했다. “남이 하라고 했으면 못 했을 거예요. 더 나이 들기 전에 도전한 거였어요. 나는 하고 싶은 일은 먼저 해보자는 스타일이에요. 해본 후회와 안 해 본 후회는 많이 달라요. 해 본 후회는 해봤기 때문에 미련이 없지만, 안 해 본 후회는 평생 미련이 남잖아요”. 그는 또 새로운 도전에 들어간다. 가을학기부터 부산 동명대 석좌교수로 K팝 등을 가르친다.
여성이 결혼식 주례를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인순이는 벌써 20번이 넘게 주례를 섰다. 그만큼 후배들로부터 존경받고,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가수 조관우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요청이 오면 기꺼이 해 주고 있다. 8월에도 자신을 메이크업해 주는 후배의 결혼식 주례가 예정돼 있다.
앞으로 계획을 물었다.
“2019년 발표한 ‘행복’이라는 노래를 열심히 부를 거예요. 우리는 세 잎 클로버를 밟아가며 네 잎 클로버만 찾아 다니며 헤매고 있잖아요. 네 잎 클로버는 행운이고,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이래요. 가까이에 있는 행복은 놔두고 행운을 좇으며 살고 있어요. 가까이에 있는 행복을 만나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의 꿈은 가수로서 성공하는 거였고 그 꿈 너머 꿈은 지금의 학교 일이에요. 그리고 그 뒤의 꿈은 우리 학교가 재정적으로 안정이 되면 다문화 가정을 찾아다니며 봉사하고 싶어요. 그래서 아버지들, 엄마들하고도 얘기하고 싶어요. 우리나라의 문화와 당신 나라의 문화가 다른 점을 얘기하면서 풀어나가고 싶고, 아버지들한테는 엄마랑 아이가 엄마 나라 말하는 것을 권장하라고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그의 히트곡 ‘거위의 꿈’ 노랫말은 64년 그의 삶을 압축해 놓은 듯하다.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그날을 위해’.
그리고 노랫말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수 없죠./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 날을 함께 해요’
박현수 기자 phs2000@munhwa.com
문화일보 원문보기: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2107230103193617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