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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은 왜 여행을 자주 안하시나?

작성자 : 홍기선 작성일 : 2014-04-01 조회수 : 1890

프란치스코 교황은 (출신지와 같은 아메리카 대륙인데도) 미국에 간 적이 없다. 예루살렘에 한 번 갔었지만 욤 키푸르 전쟁 때문에 중도 귀국했다. 지금 그는 교황이지만, 국외여행은 짧게, 꼭 필요한 곳만(focused) 간다.


"그는 교황이지만 앞으로도 여행을 자제할 것이다. 그는 해외순방을 한 곳만 찍어서(focused) 가지만 상징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큰 파장을 일으킨다. 그는 세계지도를 깃발로 채우려고 서두르는 사람이 아니다." 바티칸 통신원 루치오 브루넬리와 지안니 발렌테가 쓴 장문의 기사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공간 개념"에 실린 내용이다. 이 기사는 이탈리아 잡지 "Limes" 3월호에 실렸고, 해당 호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재위 1년을 분석하는 데 전체 지면을 다 썼다.

"베르골료는 주교 시절에도 해외순방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는 '양 냄새 풍기는' 거리의 목자였고, 그의 (교구 소속) 사제들에게도 그리 하도록 권했다. 그의 발걸음은 수선스럽지 않았다. 그는 '공항의 주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교구를 "나의 신부"라고 불렀다. 주교와 그에게 맡겨진 교회의 관계를 혼인의 유대에 비유한 것이다. (가톨릭 교리에서 그리스도와 교회는 신랑 신부 관계로 묘사됨. 따라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도 교회와 혼인 관계로 유추할 수 있음-옮긴이) 그 때문에 그는 짝을 너무 오래 떠날 수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 여행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가 다른 대륙으로 여행한 유일한 곳은 바티칸이었다. 언제나 이코노미석을 탔고, 휴대전화도 보조자도 비서도 대동하지 않았다. 그는 (추기경 회의, 주교 시노드 등) 자신이 방문하는 조직의 목적을 엄격히 지켰고, 특히 교구장으로 지낸 마지막 몇 년에는 해외여행을 극도로 자제했다. 그 이유의 일부는 갈등과 추문으로 얼룩진 교황청의 유독한 분위기 때문이었고(그는 정말 심각한 톤으로 친구에게 "저건 내 신앙에 해롭다"고 말했다) 다른 일부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에게 교구장직 사임을 표명할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교회법상 교구 주교는 만 75세에 이르면 교황에게 사의 표명해야 한다) 그는 로마에 감으로써 교구장 임기를 연장하려 애쓴다는 인상을 주기를 원치 않았다고 두 기자는 적었다.

심지어 이탈리아에 와서도 그는 다른 지방에 거의 가지 않는다. (피에몬테에 가까운 친척이 살고 있음에도) 교황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따왔음에도 2013년 10월 4일(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전까지 아시시에 가지 않았다. 로마 주교로서 9월 22일에 칼리아리에 갔을 뿐이다. (아르헨티나와 영적 유대가 깊은 보나리아 성모 성지가 있는 곳.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6세기에 이 성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됐다)


기자들이 쓰기를, "또다른 흥미롭고 상징적인 지정학적 사실은 아메리카 대륙 출신 최초의 교황인 베르골료가 미국에 발을 디딘 적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 80년간 교황들 중에서  즉위 전이나 재위 중에 "서부 제국"에 가지 않았던 교황은 요한 23세(안젤로 론칼리)가 유일하다. 나머지 교황들은 선출되기 전에 이미 미국에 갔었다. (비오 12세,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토 16세)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훗날 비오 12세)은 바티칸 국무원장으로는 최초로 미국에 사목방문 또는 외교방문을 갔었다. 1934년에(프란치스코 교황 출생 전)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세계성체대회에 초청받아 교황 특사로 방문했다. 1936년에는 미국에 가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1951년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바오로 6세)는 미국과 캐나다에 갔다. 냉전이 심각하던 시기였다. 그는 1960년에 다시 미국에 갔고 같은 해 브라질을 방문했다. 교황이 되기 전 해인 1962년에는 (교황청 인사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에 갔다. "이전 교황들은 외교관 경력(배경)이 있었던 반면, 프란치스코는 사목자 경력이 돋보인다. 외교관 출신 교황들은 해외여행을 많이 했다. 프란치스코는 요한 바오로 2세처럼 사목자(교구장) 출신인데 요한 바오로 2세는 교구와 교구민을 두고 여행하는 일이 흔했다.


카롤 보이티와는 순례하는 교황이 되기 전에도 크라쿠프 교구장으로서 해외순방을 많이 다녔다. 1976년에는 미국에 3주 체류하면서 백악관에서 포드 대통령과 회동했다.


"해외순방을 꼭 필요한 여정으로만 제한하는 베르골료의 결심은 문화적 지역주의나 서방세계에 대한 선입관적 배제가 아니다. 사목자 역할에 충실하려는 선택의 의식적 표현이다. 관할 교구에 뿌리를 내리고, 신자들을 가까이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상처주지 않도록 사치와 과잉을 피하며 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방식을 최대한 본받기 위한 것이다."


베르골료가 교황직과 별개로 원하는 순방 일정은 성지(그리스도교 발상지: 요르단, 이스라엘) 순례다. 1973년 예수회 관구 신부였던 시절에 그는 이스라엘 정부의 초청을 받아 그곳을 방문, 예루살렘의 아랍 구역에 있는 오래된 미국 식민지 구역에 체류했다. "여행가방을 내려놓고 고대 도시를 산책하며 예수님 무덤에서 기도를 했다. 그의 순례는 사실상 거기서 끝났다. 10월 초에 갑자기 욤 키푸르 전쟁이 터졌고 그는 보안상의 이유로 호텔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그가 가려던 두 곳이 베들레헴과 에인 카렘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왜 교황이 여행을 꼭 필수적인 정도로만 제한하고 갈 때면 가능한 짧게 머물고 로마를 오래 비우지 않으려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5월에 예정된 요르단과 이스라엘에는 2박 3일, 8월에 예정된 한국에는 단 4일만 방문할 예정이다.

바티칸 인사이더, 2014년 3월 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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