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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최양업에 대한 기념행사 이어져

작성자 : 문화홍보국 작성일 : 2011-06-14 조회수 : 4022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최양업에 대한 기념행사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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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9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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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팀 유은주
☎02-460-7687 / media@cbck.or.kr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최양업에 대한 기념행사 이어져  
-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선종 150주년 맞아 -
 

  2011년 6월 15일 두 번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선종 150주년을 맞아 안동교구, 청주교구에서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한국인으로는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았으며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지역의 방문을 마치고 조선대목구장인 베르뇌 주교에게 보고하러 한양으로 오던 중 장티푸스와 과로로 문경 또는 배티에서 나이 40세에 선종하였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위원장 박정일 주교)는 오랜 조사를 마치고 2009년 6월 3일 교황청 시성성에 하느님의 종 124위와 함께 최양업 신부의 시복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며 현재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최양업 신부에 대한 시복 준비 과정과 자료는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http://www.koreanmartyrs.or.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안동교구,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신앙대회와 학술 심포지엄
  
  안동교구(교구장 권혁주 주교)는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선종 150주년을 기념하여 신앙대회와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12일(일) 오전 10시 경북 문경새재 야외공연장에서 열리는 신앙대회는 ‘하느님은 우리의 희망’이라는 주제로 권혁주 주교와 사제단이 공동집전하는 미사와 한마당놀이로 이루어진다. 마사 후 오후에는 문경새재 기도굴에서 최양업 신부의 선종 장소로 알려진 진안리 성지까지 도보로 순례한다.

  10:00-10:30 '주님을 찬미하여라!' (노래: 신상옥)
  10:30-10:55 연극 '최양업 신부님의 삶' (둥지 연극팀)
  11:00-12:30 미사(집전: 권혁주 주교와 사제단)
  12:30-13:00 '한마당 놀이' (풍물: 의성본당 풍물팀) 
  13:00-14:00 점심식사 
  14:00 이후 도보순례(문경 진안리 성지 ~ 문경새재 기도굴, 왕복 약 9km)

  15일(수) 오후 2시, 안동교회사연구소는 경북 문경 성당에서 최양업 신부의 생애에 대해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마백락 연구원의 ‘최양업 신부 생애와 신앙의 유적지’, 조희렬 책임연구원의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 행로’, 신대원 신부의 ‘최양업 신부님의 선종지’의 발표와 논평이 있다. 문의: 안동교구 사목국 ☎ 054-858-3114).


◎ 청주교구,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을 기원하는 현양대회, 성지순례
  
  청주교구(교구장 장봉훈 주교)는 6월 15일(수), 배티 성지에서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을  기념하는 현양대회를 개최한다. 오전 10시 김웅렬 신부(배티 성지)의 특강에 이어 11시 장봉훈 주교의 주례로 미사를 봉헌한다. 문의: 배티성지 ☎043)533-5710
  
 10:00~11:00 특강(김웅렬 신부)
  11:00  미사(집전: 장봉훈 주교와 사제단)
  13:00  점심식사
  14:00  공연

   청주교구 선교학교는 6월 12일(일)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에 대한 시복시성을 기원하고 신앙과 선교 정신을 본받기 위해, 최양업 신부의 땀과 열정이 서린 성지들을 순례한다. 청주교구청에서 출발, 도앙골(충남 부여)을 거쳐 부여 금사리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후, 내대 고칙~도화담 공소(충남 보령)~서짓골(보령)~산막골(서천)~작은재(서천)를 거쳐 청주로 돌아온다. 8월에는 최양업 신부가 부제품을 받은 소팔가자, 중국 내 사목지였던 차구 성당, 최양업 신부와 조선 천주교 밀사들의 이동로였던 단둥, 봉황, 변문 등을 순례할 예정이다. 문의 ☎ 043-210-1730

 


▲ 최양업 토마스 신부(탁희성 작, 절두산순교박물관 소장)


◎ ‘땀의 증거자’ 최양업 신부
  
  최양업 신부는 1821년 3월 충청도 홍주 다락골에서 독실한 천주교 신자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최경환 성인이 박해를 피해 가족을 데리고 과천 수리산으로 옮겨 살던 중, 모방 신부가 1835년 당시 15세였던 최양업을 조선의 첫 신학생으로 뽑았다. 1836년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로 가서 신학 교육을 받았다. 1845년 김대건이 한국인 최초로 사제가 되어 8월 귀국, 사목 활동을 하다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최양업은 4년 뒤인 1849년 4월에 사제품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조선으로 돌아와 1861년 선종하기까지 11년 6개월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찾아다녔다.

  1851년 10월 15일자 서한을 보면 마을 사람들이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해야 하고 한밤중에 모든 일을 끝마친 뒤 새벽녘 동이 트기 전에 떠나야 하는 등 박해를 피해 숨어 다녀야 하는 어려움이 잘 나타나있다: “(제가 담당하는 조선 5도에는) 저의 관할 신자들은 깎아지른 듯이 높은 산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사흘이나 나흘씩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 봐야 고작 40명이나 50명쯤 되는 신자들을 만날 뿐입니다.” 당시 그가 담당하는 교우촌이 127개, 세례 받은 신자가 5,936명이라고 하였다. 또한 1859년 10월 12일에 쓴 서한에 따르면 그가 하루에 40리(약 15.7km)를 걸었으며, 다니는 거리가 해마다 7천 리(약 2,750km)가 넘는다고 했다. 그래서 최양업 신부와 관련된 호칭에는 ‘땀의 증거자’, ‘땀의 순교’ 등 유난히 ‘땀’과 관련된 단어가 많다.


◎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애쓴 목자
  
  최양업 신부의 업적으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의 시복시성 추진, 한국 순교자들에 관한 사료 수집, 천주가사의 저술과 보급, 가톨릭 교리서와 전례서 편찬과 보급, 신학생 양성 등을 꼽을 수 있다.

  최양업 신부가 아직 부제였을 때 홍콩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82명의 행적이 1847년 교황청 예부성에 접수되어, 1857년 순교자 82명 모두 ‘가경자’로 선포되었다. 그 중 79명이 1925년 로마에서 시복되었고, 1984년 서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최양업 신부는 사목 활동 중에도 틈틈이 한문 교리서 및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고,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을 도왔으며,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다.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와 교리서 ‘성교요리문답’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특히 글을 알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해 한글로 ‘사향가’,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 여러 편의 ‘천주가사’를 지어 교리를 가르쳤다. 천주가사란 한글로 기록된 ‘천당 노래’, ‘신앙 전래 노래’를 말한다. 당시 신자들은 천주교 교리를 노래로 전수하고 가르쳤다.

  또한 배티에서 신학생 임 빈첸시오, 김 사도 요한, 이 바울리노를 지도하여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으며, 신학교가 배론으로 옮겨간 후에도 신학생들을 방문하여 격려하였다.


◎ 땀방울로 뿌린 씨앗, 신앙의 열매되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 소식을 들은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 교장인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최양업 신부의 신심과 열심, 평소에 보여 준 사제로서의 분별력을 칭송하고, 동시에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시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신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과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유일한 한국인 신부 최 토마스 신부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성사 집행 후에, 내게 자신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착한 신부가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한 소식을 맨 처음 받은 푸르티에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있을 만큼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나오는 말이 단지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최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소장은 “최양업 신부의 삶과 영성”([경향잡지] 2011년 6월호)에서  최양업 신부 선종 당시 ‘검게 탄 얼굴에 흰 갓끈 자국이 남아있었다’는 전승은 최 신부가 전국의 교우촌을 자신의 안마당처럼 순방하면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자 했던 선교 열성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 최양업 신부의 발길을 따라가는 성지 순례

 □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가 세워진 배론 성지: 최양업 신부의 무덤이 있는 배론은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이 화전과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던 교우촌으로, 1855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신학교 뒤편으로 ‘황사영 백서’로 유명한 황사영이 숨어있던 토굴이 복원되어 있다. ☞ 충북 제천지 봉양읍 구학2리 644-1, ☎ 033)651-4527

□ ‘순교자들의 본향’ 배티 성지: 1801년 신유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살던 교우촌으로 1866년 병인박해까지 기록에 나타나는 이름만 15곳이다. 1850년 10월 성 다블뤼 주교가 교우촌 안에 신학교를 세웠다. 1853년 최양업 신부가 신학 교육을 맡으면서 1854년 3월 3명의 신학생을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로 보냈다. 최양업 신부는 1853년~1856년까지 이곳을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하였다. 현재 교황청에 시복을 청원한 하느님의 종 124위 중 8위가 배티 출신이며, 인근에 27기의 순교자의 무덤이 있다. ☞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471, ☎ 043)533-5710

□ 이름없이 순교한 이들이 줄줄이 묻힌 청양 다락골 줄무덤 성지: 다리골, 다래골, 누곡(樓谷)이라고 하는 다락골은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가 태어난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로 공주와 홍주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 37명의 묘가 있다. ☞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671-1, ☎ 041)943-8123

□ 생쌀을 먹으며 지킨 신앙을 지킨 죽림굴(대재공소): 기해박해 당시 형성된 교우촌으로 100여 명의 신자들이 이곳에 모여 곡식을 물에 불려 먹으며 숨어 지냈다고 한다.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가 약 4개월간 은신하면서 미사를 집전한 곳으로, 1860년 9월 3일자 마지막 서한을 쓴 곳이다. ☞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 052)262-5312(언양 성당)

□ ‘선교의 길목’ 진안리 성지: 최양업 신부와 강 칼레 신부 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을 통해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선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 장소로 알려져 있다. ☞ 경북 문경시 문경읍 하리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