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성당은 1921년 5월 설립되었다. 이 지역은 1887년 원산, 1889년 안변, 1891년 내평 본당에 진출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 의해서 사목이 이루어졌으나, 1921년 5월 최문식 신부가 양양 싸리재에 자리를 잡으면서 본당이 되었다. 최문식 신부는 교세 확장을 고려하여, 양양읍 서문리에 자리를 잡고 1922년 서문리에 작은 규모지만 유리창과 양회를 사용한 성당을 완공하고, '지극히 거룩한 예수성심'을 주보로 하였다. 1936년 대홍수로 양양 읍내가 물에 잠기면서 유재옥 신부는 현 성당터인 성내리로 성당 이전을 계획하였으나 일제 당국의 불허로 성당 신축을 진행할 수 없었다. 이후 이광재 신부에 의해 성당이 신축되었으나, 태평양전쟁으로 성당의 종이 공출되고 성당도 빼앗기는 상황에 직면했다. 해방이 되었으나 양양지역은 소련군정의 영향을 받고있어 성당에서 자유롭게 미사를 할 수 없었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성당은 전소되었다. 1952년 10월 경 원 파트리치오 신부에 의해 성당 신축 작업을 시작하여 1954년 11월 30일 현 성당 축성식을 하면서 주보도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로 변경하였다.
순교지로서의 양양본당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이광재 신부이다. 1936년 사제품을 받고 풍수원본당 보좌로 사목을 시작한 이광재 신부는 1939년 양양본당에 부임하여 38선 이남과 이북의 광범위한 지역을 다니며 1년의 절반을 공소사목에 전념하였다. 이북이 공산화되자 비밀리에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월남시키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나, 본인은 "양들을 두고 갈 수 없다."며 월남하지 않았다. 1950년 6월, 원산에서 사목하던 김봉식 신부가 체포되자, 신자들의 만류도 불구하고 북한 교회의 신자들을 위해 길을 떠났다. 하지만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어 원산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50년 10월 9일 새벽 원산 방공호에서 총탄을 맞고 쓰러져 죽음 직전까지도 “제가 도와드릴게요, 제가 물을 가져다드릴게요.”라고 외치다 순교하여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착한 목자’가 되었다. 2000년부터 양양 본당 신자들이 이광재 신부를 추모하여 시행하던 도보순례를 2009년부터는 교구 차원에서 실시하고 있다.
양양성당은 2017년 9월 17일 교구장 김운회 루카 주교에 의해 춘천교구 성지로 선포되었다.
김운회 주교는, 모든 사제들의 모범인 이광재 티모테오 순교자가 전쟁의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돌보던 어린양들을 두고 떠날 수 없어 끝까지 목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며 희생과 헌신으로 복음의 삶을 살다가 하느님의 품에 안긴 순교자의 정신이 깃든 교구내 중요한 신앙의 터전을 성지로 선포하묘, 이곳을 순례하는 교우들의 힘찬 복음 선포를 통해, 활기차고 새로운 신앙의 중심지로 거듭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