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5일 선종한 장익 주교. 장 주교는 사랑과 자비, 겸손한 자세로 많은 이의 존경을 받았다. /천주교 춘천교구
2020년 8월 5일 선종한 장익 주교. 장 주교는 사랑과 자비, 겸손한 자세로 많은 이의 존경을 받았다. /천주교 춘천교구

지난 2020년 4월 어느날, 샘터 출판사 계좌에 360만원이 입급됐습니다. 보낸 이는 당시 천주교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님이었고요. 장 주교님은 그때 암투병 중이었습니다. 김성구 샘터 대표는 뭔가 짚이는 게 있어 장 주교님을 찾아갔다지요. 좋아하시던 만두와 치즈 등을 챙겨서 경춘선 김유정역(驛) 인근 주교님 처소로 갔답니다. 그리고 예감은 맞았답니다. 장 주교님은 병색이 완연했답니다.

김 대표가 “웬 돈을 보내셨습니까”라고 여쭈니 “그동안 보내준 책값”이라고만 했답니다. 그리고는 책이나 건강 이야기가 아닌 나라 걱정 이야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20년 8월 5일 저녁 장 주교님은 선종(善終)하셨지요.

장 주교님과 샘터의 인연은 주교님의 부친인 장면(1899~1966) 전 총리와 김 대표의 부친이자 샘터를 창간한 김재순(1923~2016) 전 국회의장 시절부터 이어졌답니다. 장면 박사의 일지를 정리한 ‘장면 시대를 기록하다’가 샘터사에서 출간되기도 했지요. 장 주교님은 김수환 추기경의 비서를 지냈고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는 ‘한국어 과외 교사’ 역할도 했습니다. 서강대와 가톨릭대 교수를 지냈고 춘천교구장과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하면서도 항상 사랑과 자비, 겸손한 자세로 많은 존경을 받았던 분입니다. 샘터사는 장 주교님이 교구장이 되기 이전부터 월간 ‘샘터’를 보내드렸고, 그 세월은 30년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 주교님이 360만원을 보내셨을 때 김 대표는 ‘책값’이라기 보다는 막연하게 ‘마무리를 준비하시는 모양이다’고만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최근 다시 생각해보니 당시 장 주교님이 보낸 금액은 월간 ‘샘터’의 10년치도 아닌 무려 100년치 책 값이었답니다. 월간 샘터 한 권은 2020년 당시 3500원(현재는 4500원)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행복을 위한 교양지’인만큼 ‘담배 한 갑보다 싸야 한다’는 정신을 지켜온 때문이지요. 당시 낱권으로 구입할 때는 3500원이었지만 1년 정기구독을 하면 두 달치를 제한 3만 5000원이었습니다.

장 주교님이 보낸 360만원은, 낱권으로 계산하면 86년 분량이고 정기구독으로 치면 100년치가 넘습니다. 주교님께 그동안 보내드린 잡지 30년치 구독료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장 주교님이 돌아가시고도 70년치를 미리 낸 셈입니다. 도저히 속세의 셈법으로는 계산이 나오지 않습니다. ‘장 주교님만의 계산법’에 따른 액수인 것이죠. 김 대표는 “당시엔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고, 그저 주교님 건강이 나아지셨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며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당시 경영난을 겪고 있던 샘터에 대한 장 주교님의 배려인 것도 같다”고 했습니다.

월간 '샘터'의 변천사. 1970년 4월 창간호, 2020년 4월 50주년 기념호, 올해 7월호 표지(왼쪽부터). /샘터사
월간 '샘터'의 변천사. 1970년 4월 창간호, 2020년 4월 50주년 기념호, 올해 7월호 표지(왼쪽부터). /샘터사

당시는 샘터의 위기였습니다. 2019년 11월 ‘월간 샘터 사실상 폐간’이란 뉴스가 나왔었지요. 누적 적자 때문에 ‘샘터’가 무기 휴간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많은 이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샘터’는 1970년 4월 창간 이래 서민들의 친구 같은 잡지였기 때문이지요. 시인·수필가 피천득, 법정 스님, 이해인 수녀, 소설가 최인호, 동화작가 정채봉, 장영희 교수 등 쟁쟁한 필자들의 따뜻한 글이 샘터 지면을 수놓았지요. 월간 ‘샘터’에 실린 글을 모아 단행본으로 펴낸 법정 스님의 ‘산방한담’, 이해인 수녀의 ‘꽃삽’, 최인호의 연작소설 ‘가족’ 등은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당시 많은 가정에 샘터 책이 한 두 권씩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70년대 중반엔 월 50만권씩 판매되던 ‘샘터’는 2019년 당시엔 월 2만권 정도로 규모가 줄었지요. 90년대 후반부터 누적된 적자를 단행본 판매로 메꿔왔지만 당시엔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창간 50주년을 코앞에 두고 ‘무기 휴간’이란 눈물의 처방을 내린 것이지요.

이해인 수녀. 이해인 수녀는 경영난으로 월간 '샘터'가 휴간 위기에 놓이자 저서 '친구에게'의 초판 2만부 인세를 받지 않고 기부하며 후원했다. /조선일보DB
이해인 수녀. 이해인 수녀는 경영난으로 월간 '샘터'가 휴간 위기에 놓이자 저서 '친구에게'의 초판 2만부 인세를 받지 않고 기부하며 후원했다. /조선일보DB

샘터 휴간 소식이 알려지자 큰 반향이 있었습니다. 미국, 독일 등 외국에 사는 독자들과 재소자도 십시일반 성금을 보냈고, 정기구독 신청도 150명이 몰렸습니다. 샘터사에 쏟아진 전화와 문자메시지도 500통이 넘었답니다. 안타까움, 위로, 격려와 배신감을 토로한 내용이었다고 하지요. 우리은행도 6개월간 5000만원의 제작비를 지원했고요. 이해인 수녀는 ‘친구에게’의 초판 2만권 인세를 받지 않고 기부했고, 월간 ‘샘터’ 필자 일부는 원고료도 사양했답니다. 이런 성원 덕분에 ‘샘터’는 부활해 2020년 4월 마침내 창간 50주년 기념호를 발간했고, 지금도 매월 독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샘터’가 힘겹게 고비를 넘기고 있을 당시 장 주교님은 특별한 말씀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장 주교님은 마지막 순간을 예감하고 주변을 정리하면서 샘터에 아무 말 없이 360만원을 보낸 것입니다. 장 주교님이 설명을 하지 않으셨으니 ‘360만’이란 숫자는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샘터에 대한 고마움의 크기일수도 있고, 창간 100주년까지 계속 잘 발행하라는 응원이자 기도 혹은 압력(?)일수도 있겠지요. 샘터에게는 묵직한 화두(話頭)를 남긴 셈이지요. 김성구 샘터사 대표는 “장 주교님의 깊은 뜻은 알 수 없겠지만 샘터를 잘 만들어야 하겠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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