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익주교
2020.08.13
장익 주교와의 첫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은 2003년 12월 ‘원산가는 버스’였다.강원도의 건설자재와 기술로 북강원도 안변군에 건립된 연어부화장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북한측에서 제공한 미니버스에 오른 도출신 주요 인사들은 만원 통학버스에 탄 학생들처럼 다닥다닥 붙어앉았다.손수 가방을 든 장 주교는 김현준 신부와 함께 이 버스의 맨 뒷자리에 앉아 금강산관광지부터 원산까지 2시간 넘게 비포장도로나 다름없는 험한 길을 이동했는데도 내내 편안하고 온화한 표정이어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1994년부터 춘천교구장을 맡은 장 주교는 통상적인 사목활동을 하면서 ‘분단교구장’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이행했다.장 주교는 1997년 부활절때 ‘한솥밥 한식구’운동을 선언한 후 북강원도 주민과 신자들에 대한 나눔 실천 활동을 꾸준히 벌였다.이 때 발표한 담화문에서 “우리 춘천교구는 휴전선 철조망으로 둘이 나뉘어 민족 분단의 아픔을 그대로 몸에 안고 있는 교구”라며 “그 절반이 북녘에 있는 춘천교구 신자 공동체는 너무나 당연한 사랑의 부름”이라고 ‘한솥밥 한식구’운동의 당위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장 주교는 “같은 동포가 굶주려 쓰러져 간 뒤의 통일이 무슨 소용이 있냐”며 씨감자 보내기를 비롯해 북강원도 어린이 결핵예방 및 치료지원, 연탄 30만장 지원 등 식량과 의료품,생필품 위주로 북강원도를 돕기위한 다양한 사업들을 추진했다.하지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아직도 세상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장면 전 총리의 넷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난 장 주교는 2010년1월까지 15년 넘게 춘천교구장을 지낸 후 춘천 실레마을 공소에서 지내다 지난 5일 선종했다.춘천교구장을 맡으면서 ‘춘천에 뼈를 묻겠다’는 의지를 보인 장 주교는 지난 8일 죽림동 주교좌성당 성직자 묘역에 안장됐다.고인의 유언처럼 “그저 더없이 고맙고 송구한 마음 뿐”이다.
진종인 논설위원 whddls25@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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