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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평화신문“까맣게 타들어간 마음에 다시 웃음꽃이 피는 건 주님 덕분이죠”

작성자 : 문화홍보국 작성일 : 2020-04-17 조회수 : 1165
“까맣게 타들어간 마음에 다시 웃음꽃이 피는 건 주님 덕분이죠”
부활 특집- 강원도 산불 1년, 화마의 아픔 딛고 일어서는 김순금씨

2020.04.19 발행 [1560호]


▲ 화재로 뼈대만 남은 창고 건물.(왼쪽) 창고와 창고 안 물건이 전소하며 김씨는 큰 피해를 입었다.

▲ 김순금씨는 1년 전 화재로 잿더미가 된 창고 자리에 새 창고를 지었다. 여전히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지만 모든 걸 주님께서 주신 시련으로 여기며 웃음을 잃지 않고 있다.


지난해 4월 4~5일 강원 고성ㆍ속초ㆍ동해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지역민들의 삶의 터전은 잿더미가 됐다. 춘천교구민 40여 가정이 가옥 등 재산 피해를 봤고, 전국 교구에서 슬픔에 잠긴 형제들을 돕기 위해 온정의 손길을 내밀었다. 김순금(율리타, 57, 속초 교동본당)씨도 피해자 중 한 명이다. 산불 발생 1년을 맞아 시련을 딛고 부활을 맞이하는 김씨를 만나러 속초를 찾았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아물지 않은 그 날의 상처

2019년 4월 4일 밤 7시 30분, 부활절을 앞둔 봄날의 평범한 저녁이었다. 속초에서 군부대에 식료품과 옷가지를 납품하는 물류창고를 운영하는 김순금씨는 설악산 미시령 요금소 쪽에서 산불이 난 것을 목격하고 물류창고를 향해 뛰어갔다. 요금소에서 창고까지는 직선거리로 6㎞ 남짓. 불길은 강한 바람을 타고 10분 만에 물류창고까지 번졌다.

“창고에서 조금 떨어진 가스충전소 쪽부터 경찰이 통제해 더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소방차가 가스충전소로 불이 번지는 것 막으려고 대기 중이라 창고에 붙은 불은 진압할 엄두도 못 냈습니다.”

삶의 터전이었던 물류창고는 물 한 번 뿌리지 못한 채 화염에 휩싸였다. “새벽 4시 30분에 다시 오니까 창고 안에 과자랑 라면, 옷가지들이 계속해서 타고 있더라고요.” 창고 불은 3일 후에나 잡혔다. 약간의 음료수 상자를 제외하고 모든 것이 재가 됐다. 

김씨를 힘들게 한 건 화마뿐이 아니었다. “지역 봉사단체에서 불에 탄 창고 물건을 치워준다고 오셨더라고요. 그런데 몇몇 봉사자들이 잿더미 속에서 불에 타지 않은 음료수 상자들을 차 트렁크와 앞 뒷좌석에 실을 수 있을 만큼 싣더라고요. 책임자에게 ‘이게 뭐하는 짓이냐’라고 항의하니까 책임자가 사과하고 봉사자들을 해산시켰어요.” 더 기가 막힐 일은 뒤에 일어났다. 몇몇 봉사자들이 상자가 찢어져 낱개로 떨어진 음료수들을 가져가기 위해 자루를 들고 다시 온 것이다. 결국, 군부대에서 지원 나와 화재 뒷정리를 했고, 쓸만한 물건들을 깨끗이 씻어 노인 요양원과 무료 급식소 등에 기증했다.

산불 피해자를 두 번 울리는 일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불난 집에 들어가 쓸만한 물건을 찾는 사람도 있었고, 펜션 단지가 전소한 곳에 몰래 대형 폐기물을 버리는 이들도 있었다. 



신앙 공동체의 위로 

김씨는 산불로 20억 원 상당의 손해를 입었다. 빚내서 창고를 지은 지 2년 반 만에 당한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보험금을 덜 지급하려는 보험사와 창고에 보관된 물건값을 물어내라는 기업에 시달려야 했다. 정부가 특별 재난 지역으로 선포했지만, 실질적으로 돌아오는 혜택은 김씨가 입은 피해에 비해 너무나도 미미했다. 

창고 화재 보험금을 받아 70여 곳에 불에 탄 제품값 일부를 변상했다. 다행히 김씨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 물건값을 받지 않거나 일부만 받겠다는 기업과 중간 상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업체들의 빚 독촉은 끊이지 않았다.

희망이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신앙이 큰 버팀목이 됐다. 신자들이 김밥을 싸서 찾아와 김씨를 위로했고 수도자들은 김씨를 위해 기도를 했다. 20년 전 알고 지내던 한 수도자가 “꼭 돕고 싶다”며 몇 번이고 연락이 오기도 했다. 춘천교구에서도 산불 피해민 성금으로 3000만 원을 지원했다. 

“예전 상을 당했을 때도 신자들 도움을 크게 받았는데 이번에 불이 났을 때도 신자들이 큰 힘이 됐어요. 불이 나고 너무 가슴이 떨려 청심환을 사 먹었는데, 약국집 자매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청심환과 비타민제를 들고 찾아왔어요.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런 김씨와 신자들을 지켜보던 한 화재 조사관은 “사람들 발길이 끊어진 다른 화재 피해지와 여기는 분위기가 다른 것 같다. 김 사장님은 많은 분이 기도를 해주니 금방 일어나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시련 속 두 번째 맞는 부활

김씨의 창고에는 큰 십자고상이 걸려 있다. 지난해 10월 불탄 창고 자리에 새 창고를 지어 축복식을 할 때 본당에서 선물한 것이다. “축복식 때 신부님께서 큰 십자가를 가지고 오셨어요. 수녀님이 ‘자매님이 진 십자가도 무거울 텐데 왜 이렇게 큰 십자가를 가지고 오셨냐’며 농담을 하셨죠. 신부님은 ‘두 번 다시 불나지 마라’고 덕담해 주셨고요.”

김씨는 “지금은 다른 소임지로 떠나셨지만 창고가 불난 날 아침에 주임 신부님이 ‘성당에 꼭 하고 싶은 게 있다’고 말씀하시길래 흔쾌히 도움을 드렸다”고 했다. 근데 하필 그날 저녁에 불이 난 것이다. 불난 다음 날 새벽같이 공장을 찾은 사제를 만난 김씨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야 했다. 

1년이 지난 지금, 창고에는 군납 물건들을 옮기는 지게차가 분주히 움직이고, 창고 앞 야산에는 불탄 나무들을 대신에 심은 산수유 꽃이 만개해 있다. 김씨는 창고 앞에서 환한 웃음을 짓는다. 주변에서는 “창고가 불이나 힘들 텐데 웃고 다녀서 보기 좋다”고 말하고 남편은 “뭐 좋은 일 있다고 웃고 다니느냐”며 핀잔 아닌 핀잔을 줬다.

김씨는 믿음이 있어서 웃을 수 있었다고 했다. “안 좋은 일 있다고 인상 쓰고 다니면 뭐합니까. 공장에 불이 난 것도 하나의 시련이고 주님이 주시는 일이니까 받아들여야죠. 매사에 감사하고 손해를 보고 산다는 생각으로 웃으면 싸울 일도 속 끓일 일도 없어요.” 

김씨는 출근 전에 매일 미사에 참여할 만큼 신앙이 독실하다. 본당에서도 선교분과장을 하며 성물방 봉사도 하고 도움을 청하는 곳이 있으면 주저 없이 달려간다. 그는 “성당을 위해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고 했다. 공장을 다시 짓기 위해 대출을 받으러 다닐 때도 성당 일로 돈이 필요하다는 수도자의 사연을 듣고 흔쾌히 지갑을 열었다. 

“빚내는 김에 조금 더 내 해드리겠다고 말했어요. 이렇게 사는 게 더 편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고, 못하는 건 어쩔 수 없고요. 누가 알아주는 것도 싫고 주변에서는 잘 몰라요.” 김씨의 아들들은 손해 보고 나누기만 하는 엄마에게 “손해만 보고 살면 어떡하느냐”고 타박하기도 한다. 

김씨는 “작년에는 산불로, 올해는 빚 독촉과 코로나19로 부활의 기쁨을 나눌 새도 없는 것 같다”며 “빨리 미사가 재개돼 영성체도 하고 신부님 강론을 묵상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돌아보고 앞날도 계획하고 싶다”고 말했다.

“건강하게 이 자리에서 오래 물류 창고를 하며 빚을 갚아 나가야죠. 앞날은 주님 뜻대로 하시겠죠.”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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