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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평화신문이천본당 출신 이응현 신부 (춘천교구 원로사목자)

작성자 : 문화홍보국 작성일 : 2016-03-09 조회수 : 1269



기획특집

[내 마음의 북녘본당] “요리문답 잘 외워 견진·판공 쉽게 통과했죠”
이천본당 출신 이응현 신부 (춘천교구 원로사목자)
 
2016. 02. 21발행 [1352호]
 
이천본당 출신 이응현 신부 (춘천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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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때 첫영성체를 준비하며 첫 고해를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고해소 쪽문에서 뭔가 시커먼 게 툭 튀어나오는 게 아녜요? 깜짝 놀라 ‘으앙’하고 도망을 쳤지요. 그런 우여곡절 끝에 첫 고해를 했습니다.”

1925년생, 올해 92세 고령의 춘천교구 원로사목자 이응현 신부의 표정이 아련하다. 마치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내락리 고향 마을과 성당, 첫 고해를 하지 못하고 뛰어가는 자신을 잡던 어머니 장용녀(올리바)씨의 손길을 떠올리는 듯하다. 겨우 돌이 지나 아버지 이재홍(요한 세례자)씨를 여의어 홀어머니 슬하에서 외동아들로 컸기에 더 그런 모양이다.

이 신부는 춘천교구 이천본당 출신이다. 유아 세례와 첫영성체를 한 본당은 포내본당이지만 1928년 이천본당 관할 공소가 됐기에 대부분의 기억은 이천본당에 쏠려 있다.

이천본당에서의 어린 시절 추억은 주일학교 정도다. 당시 주임은 박우철 신부로, 주일학교는 주일날 20명 남짓한 아이들에게 「천주교 요리문답」을 가르쳐주는 정도였다. 암기력이 뛰어났던 이 신부는 어린 나이에도 요리문답을 다 외워 첫영성체 교리나 견진 교리, 판공도 너끈히 통과했다.

특히 공소 여회장을 지낸 어머니의 훈육 덕에 이 신부의 가정에서의 신앙생활은 도탑고 성실했다.

“옛날엔 아침ㆍ저녁 기도가 어찌나 길었는지 몰라요. 제가 졸면 그때마다 어머니께선 ‘졸려도 기도는 하고 자야지’ 하셨어요. 그래도 기도 안 한다고 매는 드시지 않았어요. 한 번은 주일날 성당 가다가 친구들과 노느라 5분 정도 늦은 적이 있는데, 아주 혼이 났어요. 그 뒤로는 한 번도 미사에 늦는 일이 없었지요. 제 신앙생활은 다 어머니의 품에서 싹이 트고 자라났습니다.”

이처럼 엄격하고도 따뜻한 신앙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그는 자연스럽게 성소를 느끼게 된다. 특히 방학 때면 집에 오던 작은아버지 이재현 신부의 영향이 컸다. 늘 단정하게 수단을 입고 지내시던 작은아버지의 모범이 신학교로 이끌었다. 홀어머니인 데다 외동아들이어서 신학교 입학이 여의치 않았지만, 신학교 교수로 있던 작은아버지와 신학생이던 사촌 형(이중현 신부, 수원교구) 덕에 1945년 4월 소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고향 성당과의 인연은 그해로 끝났다. 넉 달 뒤 해방이 돼 집에 다니러 갔다가 그해 10월 7일 걸어서 철원, 포천을 거쳐 월남한 뒤로는 다시는 어머니와 고향 성당을 보지 못했던 것.

1953년 8월 사제품을 받고 지금까지 63년을 한결같이 사제로 살고 있는 그는 여전히 소신학교에 들어갈 때 어머니의 당부를 잊지 못한다. “신학교에서 나오면 그날부터 내 아들이 아니다. 마음먹었으면 꼭 신부가 돼라.”

이 당부를 새기며 이 신부는 오늘도 춘천교구의 요람인 곰실공소에서 17년째 공소 주임 신부로 살고 있다.
 
오세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