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성당, 춘천교구 서부지구 순교자 현양대회 가져 1천명 성도 1.2km 거리 순례·미사, 순교 장면 재현 포천신문 2015-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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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신자 이승훈에 의해 1784년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온 이후 포천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한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738 ~ 1801)와 그의 아들 홍인 레오(1758~1802)를 기리는 현양비가 지난 12일 저자거리로 알려진 한내천변에 세워졌다.
이에 앞서 홍인 레오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4일부터 4박5일간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천주교 춘천교구에서는 유일하게 복자품에 오른 바 있으며, 감옥터는 군내면사무소 옆에 위치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성지로는 서울대교구 새남터 성지, 수원교구 수원성지·죽산성지. 대구교구 관덕정순성지, 한티순교성지 등 전국 100여 곳에는 수많은 무명 순교자와 성인·복자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신앙을 증거하다가 목숨을 잃은 성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교만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홍외의 아들로 한양에서 태어나 포천으로 이사와 살면서 40세에 소과(小科)에 합격해 진사가 됐다. 그는 남인 계열의 양반들과 교유를 맺었고 그 중 천주교 창립 구성원인 권철신(암브로시오),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의 어머니는 그의 고모였다.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아들인 정철상(가를로)은 사위였다.
또한 서학 즉 천주교에 대한 이해와 함께 초기 교회의 신앙운동은 이미 알고 있던 터였으나 신앙으로 옮기는 데에는 주저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홍인은 아버지로부터 천주교에 관해 듣기 시작했다.
신앙의 진리를 깨우친 뒤 홍교만보다 먼저 입교해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부친을 입교 권면해 1794년 주문모(야고보) 신부에게서 부자(父子)가 세례를 받았다. 두 부자는 오로지 신앙을 실천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해 포천지역에 신앙이 널리 퍼지게 한 장본인이다.
1791년(정조 15년) 신해박해가 있은 10년 후인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홍교만과 홍인이 함께 체포됐다. 홍교만은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됐고 그해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했다.
아들 홍인은 포천 감옥에서 첫 번째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아무것도 밀고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지킨 뒤 경기 감영을 거쳐 포도청으로 압송돼 10개월간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의 나이 44세 되던 해인 1802년 1월 30일 지금의 경찰서 인근인 저자거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형조에서 그에게 내린 사형 선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는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오랫동안 이를 믿어왔다. 너의 아버지가 교리를 가르치고 너는 이를 배웠으며, 깊이 여기에 빠져 (교리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므로 경기 감영에서 포도청으로 이송됐다. …네가 저지른 죄의 실상을 보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홍교만과 홍인은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지난해 8월 16일 광화문에서 거행된 시복 미사로 복자품에 올려졌으며 그 면면이 군내면 순교터가 성지로 인정 받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포천성당(윤헌식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에서는 지난 12일 성지 선포 1주년을 맞이해 포천성당에서 구읍동 복자 홍인 레오 순교터까지 1.2km에 이르는 거리를 순례하면서 포천동사무소 앞 광장에서는 당시 순교 장면을 재현하는 공연을 펼치는 춘천교구 서부지구 순교자 현양대회를 가졌다.
이 대회는 그 순교의 뜻을 찬양하고 기리는 뜻 깊은 행사로 진행됐으며, 참석한 1천여 명에 이르는 신자들은 포천성당에서 춘천교구장 김운회 루카 주교 집전으로 이를 기념하고 감사하는 미사를 봉헌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세례명 안드레아 신자는 “그간 잊혀져 갔던 홍인 레오의 순교의 뜻을 다시 되돌아 보며, 미력이나마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데 초석이 되겠다고 다짐했다”며 결의에 찬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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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종석 기자 / qkd80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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