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 큰스님과 선연(善緣)을 맺은 지는 어느 덧 한참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봉은사 다래헌에 계실 적부터였습니다. 자주 뵈옵지는 못했고, 또 뵈어도 서로 몇 마디 가벼운 담소만 나누었으면서도, 처음부터 마음이 통하는 그런 귀한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청학 스님을 대동하고 로마로 찾아오시어, 파리와 서울에 길상사를 짓기에 앞서, 유럽 수도승의 뿌리를 탐방하시자기에 몇몇 유서 깊은 옛 수도원으로 모시고 다니는 행복도 누렸고, 93년 여름 참신한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시는 모습도 가까이에서 뵈오며 기뻐했습니다.
좀 더 친근하게는, 불일암에 묵으면서 툇마루에 호젓이 함께 앉아 저무는 날을 조용히 바라보던 때나, 남녘 어느 차밭에 자리를 깔고 햇찻잎에 쌈을 싸먹으며 흐뭇한 반나절을 지내던 추억도 새롭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에 갓 지은 법련사에서 종교와 삶에 관한 진심어린 대담을 나눈 보람된 일, 더 나아가 성북동 길상사를 세상에 여는 법요식에 김수환 추기경께서 친히 봉축사를 하신 종교간 미증유의 경사도 있었습니다. 이에 화답하여, 큰스님께서 명동 대성당을 가득 채운 천주교 신자들을 깊이 감동시킨 성당 초유의 법문을 하신 일 등은, 앞으로 종교인들이 마땅히 가야할 길을 내어준 참으로 뜻 깊은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어렵고 어지러운 시대를 사는 이들이 참다운 깨달음을 찾아 얻어 모두가 함께하는 맑고 향기로운 삶의 길에 눈뜨게 해 주시던 법정 큰스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을 누구인들 애석해하지 않겠습니까. 이 시대의 스승이요 빛이시던 그 어른을 진정 기리는 마음에서, 우리 모두 큰스님의 샘물 같은 말씀을 마음에 더욱 새로이 새기며 하루하루를 참되이, 고맙게 살아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주교 춘천교구 장익
1040호 [2010년 03월 11일 1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