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교구장 장익 주교가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다.
근 10년간 강원도에서 발생한 재해 내역을 기억을 더듬어 정리한 것인데 놀랍게도 10건이나 된다. 1996년 고성 산불, 2002년 태풍 루사, 2003년 태풍 매미, 2005년 양양 산불, 그리고 올 여름 수해까지 한반도를 덮친 큰 자연재해를 한번도 피해가지 못했다.
장 주교는 "춘천교구는 물불(?) 안가리는 교구"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산불과 폭우에 폐허가 된 삶의 터전을 바라보는 재해민들의 허허로운 표정과 다를 게 없다.
"재해가 날 때마다 도움을 준 전국 교구와 수도회, 기관단체 등에 감사합니다. 이번 수해에도 9개 교구에서 2차 헌금을, 20여개 수도회에서 의연금을 보내주셨습니다."
수해 발생 직후부터 교구청에는 가슴 뭉클한 도움이 답지했다. 서울에 사는 한 신자는 아파트 주민들을 설득해 냉장고 40대를 사서 교구청을 통해 인제군청에 보내고, 춘천교구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미국 교포신자 5명은 6000달러를 거둬 부쳐줬다. 교구 성금계좌로 의연금을 보내온 사람도 부지기수다.
장 주교는 "성금통장에 이름 석자밖에 기록된 게 없어 감사편지도 보낼 수 없는 상황"이라며 지면을 빌어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고 말했다.
교구는 성금으로 수해지역 본당들의 응급구호 활동을 한창 지원 중이다. 특히 행정기관과 사회민간봉사단체 손길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를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다. 1차 응급 구호활동이 끝나면 조부모와 사는 어린 학생들 학자금 지원이나 주민 공동시설 건립 같은 장기지원사업을 벌여나갈 계획이다. 교구는 1996년 고성 산불 때도 피해지역에 마을회관과 노인회관을 지어 주었다.
장 주교는 "눈앞이 캄캄할텐데도 누구를 탓하지 않고 의연하게 견뎌내는 산간마을 수재민들의 선한 눈망울을 보고 감동했다"고 말했다.
"한계령 아랫동네 한계리는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됐습니다. 그런데도 주민들은 하늘을 원망하거나 누굴 탓하지 않고 묵묵히 고통을 이겨내고 있어요. 참으로 선한 사람들입니다. 자기에게 조금만 손해가 나도 남을 탓하며 목청을 높이는 게 요즘 세태 아닙니까. 그래서 마음이 더 아파요."
장 주교는 "지금은 더워서 야단이지만 조금 지나면 춥다고 야단인 게 산간마을 날씨"라며 "산골 노인들이 컨테이너에서 어떻게 추위를 이겨낼 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장 주교 우스갯소리마냥 춘천교구는 물불 안가리는 교구지만 더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도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지난해초 남아시아 지진해일(쓰나미) 피해 때는 스리랑카 콜롬보교구, 인도네시아 메단교구, 말레이시아 페낭교구 등 3곳에 성금 3억원을 쾌척했다. 교구 긴급재해 대비금을 톡톡 털어 마련한 3억원은 교구청 1년 예산과 맞먹는 액수다.
또 한솥밥한식구운동을 전개하면서 북강원도를 10여년째 조용히 돕고 있다. 그동안 지원한 액수와 집행계획이 잡혀 있는 예산을 합하면 교구청 1년 예산의 3배가 넘는다. 올해도 4차례에 걸쳐 연탄 20만장을 금강산 일대 마을에 보냈다. 가을에도 10만장을 더 싣고 올라갈 계획이다.
장 주교는 "사랑은 나눠야 의미가 있다"며 "이번 수해복구 지원활동을 계기로 교구와 본당들간의 벽이 조금 더 낮아진다면 재해의 쓰라린 아픔 속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