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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의 순교자 홍인(洪鏔, 레오)

작성자 : 교회사연구소 작성일 : 2008-07-22 조회수 : 6144





    홍인(洪鏔, 레오) : 1785 ~1802년 

* 아래의 내용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 시성 주교 특별위원회에서 발행한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자료집 제4권(Documentation of the Beatification of 'Servants of God' Paul Yun Ji-chung and 123 companions IV)에 실린 내용을 옮긴 것이다. 이 자료집은 ‘하느님의 종’들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조사된 모든 자료들을 한데 묶은 것이다. 그리고 책에는 학문적 무게를 위해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  


1)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pp. 128~129  


포천(抱川), 신유년 음력 12월 27일(양력 1802년 1월 30일)


신유년 음력 12월 27일에 홍(인) 레오가 포천에서 참수당하였다.




레오는 상기한 순교자 홍(교만, 홍교만) 아우구스티노(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잘못)1)의 아들이었다. 그는 포천 고을에서 태어났고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성격은 선하고 침착하였다. 처음에 그는 그의 입지가 용이한 길을 터 주었던 세속의 명예에 대한 생각만을 갖고 있었으나, 천주교(교리)를 배우자마자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으며, 모든 부질없는 욕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갖고 있었던 의문을 해결하려고 애쓰면서 그는 신앙 연구에 전념하였고, 그이 가족들을 가르치면서 덕목의 실천 안에서 가정을 인도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도착 때에 그는 성사와 함께 열성이 배가됨을 받았으며 점점 더 기도와 묵상에 몰두하게 되었다. 세속적인 일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은 그는 인척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빈정거림을 받아야 했으나, 그는 그것에 거의 개의치 않았고 항상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드렸다. 천주교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갖춘 그는 냉담자들을 권면하였고,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곤 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비신자들에게 전교하려고 애썼는데, 그는 그들 중 상당수를 하느님을 섬기는 데로 인도하였다. 크나큰 빈궁 안에서 살면서도 그는 기쁨과 인종(忍 從 )으로 고충과 결핍을 감당했으며, 낮에는 그의 직업에 종사하고, 저녁에는 천주교인들을 모이게 하여 그들을 가르치고 열심히 권면했는데, 자신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공덕을 추켜 올려 주곤 하여 그는 모두의 존경과 감탄을 받았다.  


1801년 박해 때에 그의 이름은 자연히 눈에 띄게 되었고, 얼마간 그의 아버지와 함께 수도 서울로 피신하러 갔다. 그 이후 모면할 어떤 방법도 없음을 보고서 그들은 함께 그들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도중에 그들은 포졸들을 만났고 붙잡혔으며,2)  그의 아버지가 수도 서울에 인도된 반면 그는 포천으로 끌려갔다.3) 

그는 침착함과 평온함을 온전히 지니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와 이별만이 그에게 고통스럽고 애절하게 보였다. 그는 3,4일 간격으로 많은 신문들을 받아야 했으며, 또한 포졸들의 비난과 욕설도 받아야 했는데, 줄곧 그의 신앙 증거에 단호하였다. 마땅히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신유년 음력 12월 27일에 44세의 나이로 포천에서 참수당하였다. 그의 죽음 후에 기이한 광선이 그의 육신을 감쌌고, 그는 생기를 보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본 모든 자들과 포졸들조차 그것에 대해 감탄하였다.  


2)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 pp.185~186  


포천 지방의 자녀들 가운데 선구자격인 홍인 레오가 그의 아버지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음력 2월에 체포된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선하고 조용한 성격의 레오는 포천 지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의 가문과 지위가 그에게 길을 터놓은 출세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거룩한 종교를 알자마자 그는 천주교에 입교했고 그와 동시에 관직에 대한 모든 야망을 내려놓았다. 그의 효성은 우선 그로 하여금 그의 아버지가 천주교의 진리에 품고 있었던 의구심들을 조명해 드리는 데 주력하도록 했으며, 그리하여 그의 아버지는 굳건히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그 다음에 그의 열성은 그의 가족들을 향해서 꾸준히 그들을 가르쳤으며, 냉담자들에게는 힘있게 신앙심을 불러일으켜 주었고, 많은 비신자들을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특히 그의 겸손함을 칭송하였는데,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더없이 겸손한 말들만 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장점과 선행들을 즐겨 높여 세우곤 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질책과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그런 것들을 조용하게 감내했고, 극빈함 속에서 내핍 생활을 기쁘게 그리고 순명하며 견뎌냈다.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어 따로 떨어져 옥살이를 했는데, 아버지와 떨어져 있는 것이 그에게는 가슴을 에는 고통이었다. 그가 포천 법정에서 빈번하게 당했던 수많은 고문들은, 그의 덕성이 덜 견고했다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르나, 그는 부친의 영광스러운 죽음을 생각하고 부친의 길을 따라 걷겠다는 열망만으로 훌륭하게 자신을 지탱시켰으니, 그의 용기는 이 지방의 포졸들로부터 감탄을 샀다. 10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온갖 종류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처음 시작할 때와 같은 신앙심 속에서 확고하게 머물렀으나, 사형 선고를 받고 음력 12월 27일(양력 1802년 1월 30일), 이 마을에서 44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그가 죽은 후에 큰 광채가 그의 시신을 에워싸고 그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으며,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였고, 특히 포졸들은 끊임없이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다”를 되뇌었다.  


3) 『사학징의』  


① 권1, 내관집


1801년 3월 8일


<포천 현감의 보고서> 이 달(3월) 7일 자시(子時)에 형조의 공문이 도착했는데, 비밀 공문 내용에 근거하여 홍낙풍(洪樂豊)을 체포하기 위해 포졸을 다수 풀어 비밀리에 조사했으나 체포하지 못했다. 그래서 홍교만의 노자(奴子) 개똥이를 잡아다가 겁을 주면서 다그쳐 물었더니 개똥리가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홍교만 부자가 지난 12월에 상경하여 올해 2월 12일 서울에서 체포되고는, 그 사이에 외부인이 내왕한 일은 없습니다.’


홍교만의 아들 홍인(洪鏔)을 본 포천현의 옥에 잡아 가두고, 홍인에게도 역시 겁을 주면서 엄중히 물었더니, 홍인이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홍낙풍이란 이름은 지금에야 처음 듣습니다.’ 그러므로 본 포천현의 경내를 계속 사찰하겠다는 연유로 우선 보고한다.


  ② 권1, 정법죄인질


홍인


<포도청에서 진술한 내용> 저는 포천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올해(1801년) 2월에 사학 때문에 포천(抱川) 옥에 수감되었다가 감영으로 압송되어 왔고, 본 포도청으로 이감되었습니다. 저는 홍교만의 아들로 신해년에 아버지의 가르침을 곁에서 듣다가 따라 배워서 미혹되었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사형된 뒤로는 사학의 말만 들어도 마음이 놀랍고 모골이 전율하여, 과연 영원히 저버리며 원수처럼 보았습니다.


황사영을 알게 된 것은 그의 삼촌인 황석필(黃錫弼)과 전부터 이미 친숙했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한번 만났을 뿐 그 뒤로는 다시 서로 만나지 않았습니다. 홍익만은 저의 서오촌(庶五寸) 숙부인데, 본디 양근에 살다가 10년 전에 상경하여 살았습니다. 그도 역시 사학에 미혹되어 저의 부자와 함께 여러 차례 주문모가 첨례하던 자리에 동참했습니다. 체포령이 내려진 이후 각자 흩어졌으므로 간 곳을 알지 못합니다. 이 밖에 다시 더 진술할 말이 없습니다.……


<신문 조목> 너는 홍교만의 아들이며, 홍익만의 조카이다. 요서(妖書>를 굳게 믿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전통 가업으로 삼았다. 서우로가 지방의 도당을 불러모아, 밤낮으로 어지럽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한 바는 지극히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난 계책이 아닌 것이 없었다. 주문모의 첨례에 동참했고 황사영의 종적을 숨겨 주었다. 이러한 전후 사정이 모두 탄로가 나서 남은 것이 없다. 이제 엄하게 신문하는 마당에 혹시나 꾸며대지 말고 하나하나 고하라.……


<승복한 진술 내용> 저는 포천 땅에 살면서 아버지를 따라 사서를 배워 오랫동안 미혹되었습니다. 올래 2월에 포천 고을에 수감되었다가 포도청으로 이감되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깊이 빠진 까닭으로 사리를 밝혀 간하지 못해서 저의 아버지가 마침내 사형을 당했으니, 이것이 저의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그리고 년전에 주적(周賊), 즉 주문모)이 사학을 강론하는 자리에 동참했다고 하는 것이 비록 저의 입에서 발설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홍교만을 아버지로 삼고 황사영을 벗으로 삼았으니, 어찌 참수형을 면하겠습니까.……


<사형 선고문> 너는 사학에 깊이 빠져 오랫동안 미혹되었다. 아비는 전해 주고 아들은 배웠으며, 미혹되어 고집하며 마음을 바꾸지 않아서 경기 감영에 체포되었다가 포도청으로 이감되었다. 뿐만 아니라 너의 5촌 숙부 홍익만과 연결되었고, 흉악한 역적 황사영과 체결하여 작당해 뒤얽혀서 세상의 지목을 받았다. 그러한 즉 너의 죄상은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4) 기타 관련 기록


『순조실록』 권3, 원년 12월 26일
죄인 홍인(洪鏔)은 홍교만(洪敎萬)의 아들로서 주문모가 첨례를 보는 자리에 동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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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교만(1783-1801) : 자는 도경(道卿). 신유박해 순교자 홍인(레오)의 부친이요 정철상(丁哲相, 가롤로)의 장인. 서울의 양반 출신으로 포천으로 이주해 살던 중 1777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고종사촌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운 뒤 아들 홍인의 권고로 입교하였다.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 행적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 시성 주교 특별위원회, 2006), 111-137쪽을 참조.
2) 홍인은 부친 홍교만과 함께 1801년 2월 12일(음력)에 체포되었고, 부친 홍교만은 다음날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3) 홍인은 체포되자마자 포천으로 압송된 것이 아니라 우선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은 뒤에 포천으로 이송되었다.

 

 * 포천 동헌과 형방 터


 










하느님의 종 홍교만과 아들 홍<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801년 신유박해때 그들은 체포<
홍인 레오는 세속의 모든 꿈을























하느님의 종 홍인 레오가 신앙을
"14일에는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







포천 형방과 감옥 터 src
형조에서 그에게 내린 사형 선고







하느님의 종이 처형된 형장으로<
홍인 레오는 부친 홍교만 프란치







춘천교구 현장조사 법정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