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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기조문] 제53차 세계성체대회 기조문(세상을 치유하는 형제애)

작성자 : 문화홍보팀 작성일 : 2024-04-29 조회수 : 79
세상을 치유하는 형제애.jpg

교황청 세계성체대회위원회

세상을 치유하는 형제애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

제53차 세계성체대회
에콰도르 키토
2024년 9월 8-15일

[원문: Pontifical Committee for International Eucharistic Congresses, The Work of the National Delegates for the 53rd Quito's International Eucharistic Cong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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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차 세계성체대회 기조문(세상을 치유하는 형제애) 번역문


 
# 소개

에콰도르의 키토 시는 2024년 9월 8일부터 15일까지 열릴 제53차 세계성체대회를 위하여 축제 분위기로 꾸며집니다. 그 기간에 색색으로 장식된 식민지 거리들은 전 세계에서 오는 수천 명의 사람들로 붐비게 되고, 이들은 서로의 은사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나누며 신앙의 신비를 경축하고 새롭게 하고자 모일 것입니다.

이처럼 전 세계적 중요성을 지닌 행사라는 점에서, 에콰도르 지역 위원회 산하 신학위원회는 교황청 세계성체대회위원회와 협력하여 대회 주제인 “세상을 치유하는 형제애”에 비추어 이 ‘기조문’을 작성하였습니다. 이 기조문은 성체 대회 기간을 충실히 준비하기 위하여 에콰도르와 각국 교회에 제공되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성체 대회에서 성찰할 중심 주제인 인간의 형제애는 단지 하나의 꿈이 아니라 성찬 거행에 기초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기조문의 본문은 라틴 아메리카인의 신앙 체험이라는 색채를 띱니다. 이는 그들이 세계성체대회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려는 모든 이와 함께 나누기 원하는 선물입니다. 키토 교회는 성찬의 천막으로 변모하여 거기 차려진 말씀과 빵의 식탁에 모인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하신 현존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시어 우리가 한 아버지의 자녀요 형제가 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파스카 선물은, 모든 미사의 중심이며 미사에서 그 의미를 길어 올리는 성체 공경의 중심으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한편 우리가 모든 형제자매를 돌볼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드높여 하느님을 찬미하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하느님께 은총을 청합니다. “하느님, 저희가 마음을 열고 이념, 언어, 문화, 종교의 차이를 뛰어넘어 형제자매들을 만날 수 있게 도와주소서. 하느님, 저희 모두에게 하느님 자비의 기름을 부어 주시어, 과오와 오해와 다툼으로 입은 저희의 상처를 치유해 주소서. 또한 저희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겸손하고 온유하게 평화 추구의 험난하지만 풍성한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254항).

2023년 6월 16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 알프레도 호세 에스피노사 마테우스 대주교
키토 대교구장이며 에콰도르 수석 주교




머리말

형제애의 꿈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

1.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에콰도르 키토에서 개최될 제53차 세계성체대회를 조명하고자 하셨습니다.1) 이는 스승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같은 아버지의 자녀로서 그들이 이루는 형제적 관계를 깨닫도록 권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신자 공동체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그들의 인간 관계의 토대를 형제적 사랑에 두도록, 곧 파편화된 세상에 희망의 표징이며 상처를 치유하는 향유가 되어야 하는 형제애의 유대에 두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 스승님께서는 수많은 민족 가운데에서 순례의 길을 걷는 당신 교회를 통하여 우리 시대의 사회에 이 말씀을 되새겨 주십니다.

2. 이번 성체 대회의 맥락에서 세상을 치유하는 형제애가 얼마나 시급한지 드러납니다. 라틴 아메리카와 여러 대륙에 있는 나라들이 자국 내 사회 정치적 불안을 겪고 있습니다. 제국주의적 성격의 초국가적 이익에 부합하여 오랜 역사의 폭력과 침묵의 식민주의 잔재가 여전히 존재합니다.2) 빈곤과 불의를 키우는 부당한 경제 체제에 반대하는 민중 시위들이 잇따라 일어납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빈곤과 불평등은 치유되기는커녕 더 깊어지고 있는 상처입니다.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과 그 여파,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조건이 악화시킨 국제 상황, 이념 양극화까지도 발전을 향한 시도와 해방을 향한 열망에 쐐기를 박는 듯합니다.”3) 서구 세계가 각기 다른 사회관으로 크게 양분된 20세기에 겪은 대규모 세계 분쟁의 참상을 다시 상기시키는 전쟁으로, 유럽 국경 지역들에 경종이 울리고 있습니다. 중동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폭력이 끊이지 않는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만연한 빈곤과 더불어 더 좋은 ‘세상’으로 망명하려는 이주민을 실은 보트가 줄을 잇습니다. 이들은 항구에 도착하지 못하고 지중해 바다에서 익사하고 말기에 흔히 그 세상은 도달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3. 이는 그저 지구 위에 살아가는 다양한 민족들 간의 관계를 치유하는 문제가 아니라 평화와 화해의 걸림돌인 인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가 같은 배에 타고 있으며 우리가 모두 연약하고 길을 잃은 사람인 동시에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 우리 모두가 함께 노를 젓도록 부름받았고 서로 위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배 위에 …… 우리 모두가 있습니다.”4) 성체 대회는 우리가 하느님의 선물을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은총의 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성찬의 사랑이 품어 안는 모든 민족은 형제자매이며 같은 아버지의 자녀들이고 형제애, 곧 인간의 형제애, 피조물과의 형제애를 이룩하는 이들이라고 다시 인식하게 해 주는 은총의 때입니다.

4. 교회는 시노드 식별의 과정에서 이러한 분열들 가운데를 헤쳐 나가면서 스스로 질문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역, 대륙, 그리고 보편 교회 차원에서 친교와 나눔의 사명을 수행하며 함께 걸어가는 시노드적 존재라는, 교회의 근본적 특성을 회복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전적인 포용, 공동 소유와 깊은 환대가 이루어지는 형제애의 장소가 되어 ‘천막 터를 넓히는’(이사 54,2 참조) 자기의 소명을 언제나 실현하고 있습니다.5) 우리는 이 성체 대회가 바티칸에서 열리는 두 차례의 세계주교시노드 정기 총회(2023년 10월 - 2024년 10월) 사이에 개최된다는 사실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이를 시노달리타스의 중심이자 최고의 표현인 성찬의 잔치에 대한 예언자적 표징으로 보고 있습니다.6)

5. 키토 대교구가 예수 성심께 대한 에콰도르 봉헌(1874년 3월 25일) 150주년 기념일에 제53차 세계성체대회를 주최하도록 선정되었습니다. 오래전인 1886년에 이 도시에서 제1차 에콰도르 성체대회가 개최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에콰도르의 하느님 백성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의 보호 아래 성체성사에 관하여 성찰하고자 그리고 세상의 치유를 위한 형제애의 기회로서 성체성사를 살아가고자 전 세계에서 오는 그리스도인들을 환영합니다.  

6. 요한 복음사가가 이야기하는 대로(요한 19,34 참조),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세례의 표징 그리고 교회의 원천이자 정점인 성찬의 표징입니다.7) 분명히, 파스카 신비의 놀라움으로 거행되는 성찬례는8) 그리스도의 성심에 대한 신심의 주된 자리입니다.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존엄한 성사에 더욱 열심히 참여함으로써 예수 성심께 더 큰 신심을 바치기를 바랍니다. 성체성사는 예수 성심께서 주시는 위대한 선물입니다.”9) 바로 여기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들은 하느님과 가장 깊은 친교를 맺고 서로를 향한 형제애를 실현하는 것입니다.10) 성찬례 거행은 교회의 친교가 정화되는 곳인 하느님 사랑의 용광로에 뛰어드는 일을 수반합니다.11)

7. 우리는 상처 입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상처는 여전히 벌어져 곪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동틀녘부터 피 흘림으로 얼룩져 온 만남과 길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취약하고, 작으며, 연약하고, 버려질 수 있는 이들은 공동선, 사회 정의, 자유 그리고 인권에서 배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나누는 빵의 천막에서, 우리를 자녀이자 형제자매로 환영하는 공동의 집에서 출입을 금지당하고 있습니다. 한 형제를 공격하는 것은 언제나 공동의 집 곧 피조물에 대한 공격이 됩니다.

8.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고통에 귀를 닫으시거나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속량을 위하여 십자가에 당신 자신을 바치시어 죄와 죽음을 이기신 동시에 우리 생명의 빵과 목자가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일치시키고 화해시키시는 하느님의 빵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와 함께 걷는 모든 사람이 더 이상 이 길에서 낯선 사람이 아니라 여정 내내 함께하는 이웃이자 길동무임을 알아보게 해 주십니다. 성찬의 천막에서, 다른 이들이 생명을 얻도록 생명을 바치는 데서, 박해자들이 폭력을 저지른 바로 그 자리에서 베푸는 용서에서, 주님의 현존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낳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증오와 적의와 이기주의로 상처 입은 이 세상을 치유하는 방법으로서 대화와 화해와 평화를 증진하는 법을 계속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9.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20년 10월 3일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에서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에 서명하셨습니다. 짧은 기간에 이 회칙은 보편적 형제애를 간절히 원하는 많은 사람의 마음에 생기를 되찾아 주었고, 오늘날 이 보편적 형제애를 훼손하는 많은 상처들에 주목하게 했으며, 참되고 정의로운 인류의 형제애를 이룩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제시했고, 사람들과 단체들이 모두 이를 위하여 일하도록 격려했습니다.

10. 세계의 중앙인 적도에 위치한 키토 시는 자신의 천막을 넓게 펼쳐 거대한 성찬의 천막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전적인 사랑으로 속량되고 치유된 이 멋진 형제애의 꿈을 나누도록 이 천막으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한 인류로서, 같은 인간 육신을 지닌 길동무로서, 우리 모두를 환대해 주는 같은 땅의 자녀로서, 저마다 신앙이나 신념의 부요함을 지닌 개개인으로서, 저마다 목소리를 지닌 개개인으로서, 모든 이가 형제자매로서 우리 함께 꿈꿉시다!”12)

11. 우리는 인간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상황들 그리고 역사적 한계들과 상관없이, 형제애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에 뿌리내려 있음을 믿습니다. 형제애는 존재를 더욱 아름답고 존엄하게 만들 수 있는 삶과 충만함에 대한 갈망과 열망과 염원에 대하여 말해 줍니다.

이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인의 임무가 나옵니다. 선의의 모든 사람과 함께 공동 연구와 새로운 대화의 길을 모색하는 의무입니다. 이것은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라고 단언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식하는 것에서 샘솟는 단순하면서도 큰 노력을 요구하는 의무입니다.





1. 상처 입은 형제애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창세 4,9)

   
12.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 이 말씀은 자기 아우를 죽인 카인에게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질문은, 아벨이 흘린 피의 울부짖음이 땅에서 올라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형제애에 대한 인간과 모든 피조물 본연의 소명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울려 퍼지는 질문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계획: 자녀이자 형제자매

13. 영원으로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양자 관계로 부르시어 한 형제자매가 되게 하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선물인 인간 상호 간의 선물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을 역사 안에 세우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1-2장 참조). 이러한 이상은 무엇보다도 구원의 계획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바로 그 도움 없이는 하느님께 ‘자녀’로 응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죄를 지어 그 사랑을 거부할 때조차도 인간에게 가닿을 정도로 위대합니다. 자녀 됨과 형제 됨에 대한 이 이중의 소명이 인간으로서의 우리를 정의합니다. 우리 존재의 정체성은 한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우리가 서로 형제자매가 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애는 하느님의 부성에 뿌리내려 있습니다.13) 이 부성은 일반적이고 구분되지 않으며 역사적으로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인격적이고 각별하며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말합니다(마태 6,25-30 참조). 당신 자녀들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이런 하느님의 계획에 인간의 응답이 따릅니다. “인간 하나하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으므로, 존엄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단순히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인격’이다. 인간은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주체가 되며, 자유로이 자신을 내어 주고 다른 인격들과 친교를 이룰 수 있다. 은총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창조주와 계약을 맺고,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신앙과 사랑의 응답을 드리도록 부름을 받았다.”14)

같은 아버지의 아들딸: 우주적 형제애

14. 모든 피조물은 완전한 일치 안에서 유지됩니다. 다시 말해, 온 우주의 공동체가 화합의 박동으로 함께 진동합니다. 창조된 모든 것은 각 피조물의 자유와 선함으로 짜인 관계의 네트워크 안에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거나 하지 않는 모든 일은 피조물 전체에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영향을 줄 것입니다.

창세기 이야기에서, 인간은 피조물을 돌볼 것을 위임받았습니다. 그러하기에 모든 남자와 여자는 이 선물을 환영하고 관상하며, 누리고 보호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창조주를 그분의 집인 피조물 안에서 찾고 발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이 집 안에서 스스로를 알고 이해해야 하며 이웃과 함께 형제애적이고 건강하며 공정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모든 피조물의 소명은 보편적인 형제애입니다. 그 안에서 구원의 계획이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죄: 하느님과 이루는 관계의 파괴

15. 그러나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심은 아담과 하와의 마음 안에 처음부터 심겨 있었습니다(창세 3,1 참조). 하느님과 자녀로서 나누는 대화는 의심과 멀어짐의 침묵이 됩니다. 에덴 동산은 더 이상 만남과 대화의 장소가 아니고, 몸을 숨기며 죄책감을 느끼는 장소가 됩니다(창세 3,10 참조).

분열된 형제애

16. 창조주의 계획에서 멀어진 이 최초의 소원함이 카인과 아벨의 형제애의 파괴를 촉진하는 도화선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벨은 인격을 가진 한 인간이 아닌 그저 하나의 개체로 전락되어 버립니다. 더욱이, 형은 자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동생을 경쟁자이자 위협으로 간주하기 시작합니다. 죄는 한 인격체를 한낱 개체로 전락시키고, 온갖 방식으로 피조물을 파괴하려 합니다.

죄는 하느님과의 친교와 형제적 친교 그리고 피조물과의 친교를 단절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이 구원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오늘날 그분의 교회 안에서 완수된 속량과 성사와 애덕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 이웃과 우리 공동의 집에 대한 책임감과 돌봄 안에서 친교의 충만함으로 향하는 인류의 길을 계속해서 이끌고 계십니다.15)

17.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건네신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가장 강력한 도전을 제기하는 바로 그 질문입니다. “네 아우는 어디에 있느냐?”(창세 4,9). 인류는 스스로 그 안에 형제애로의 소명을 포함하고 있으면서 또한 이를 저버릴 수 있는 비극적인 능력도 지니고 있습니다.16) 너무나 많은 전쟁과 불의의 토대가 되는 일상적 이기주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입증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형제자매라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형제와 자매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향한 돌봄과 책임감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형제자매인지 아닌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형제애는 우리가 자녀임이 드러나는 참된 방식이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참된 방식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일그러진 형제애: 형제자매에서 원수로

18. 형제자매의 사랑은, 이러한 유대 없이 그 어떤 사회도 존재할 수 없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가족으로서의 형제애는 그 지체들의 다양성 안에서 근원적 연대를 촉진하고 형제들 사이에 균형을 만들어 냅니다. 따라서 형제애의 근본적인 전제조건은 근원적 연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세상이 감수성과 연대성을 잃어버렸고 개인주의 또는 시선을 돌려버리는 일을 선호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키십니다.17)

교회는 사회적 형제애의 결핍을 무관심하게 바라볼 수 없습니다. 보편 교회가 된다는 사실은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고, 그러하기에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은 한 가정에 속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모든 민족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백성은 지상 민족들 안에서 구체화됩니다. 그러하기에 교회 자녀들의 고통과 상처에 함께 아파하며, 교회는 사랑이라는 연고로 이를 치유하기 위해 애씁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

19. 우리 사방에 상처 입은 인류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아물지 못한 상처가 많은데 새로운 상처들마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괴롭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상처들이 가려진다면, 결국에는 세균에 감염되고 말 것입니다.18) 그러하기에 두려움, 거부, 경멸과 무감각은 외국인 혐오, 폭력, 배척, 소외 그리고 태아와 노인의 제거로 바뀝니다. 요컨대, 이는 공동의 집의 파괴입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과의 이러한 거리두기가 인류 자체에 대한 경멸을 심화시키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해야 할 정도입니다. 곧, 버림과 죽음의 문화에서 비롯된 상처로 세상이 고통받고 있습니다.19)

교회의 몸은 이러한 상처들에 대한 면역력이 없습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그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단절되는 모습도 자주 보아 왔습니다. 오늘날 끔찍한 학대들에 대한 인식이 자라나고 있고, 그 가운데 많은 학대가 취약한 사람들에게 가해자가 아니라 ‘아버지들’이 되어야 하는 자들이 저지른 심각한 범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회 이데올로기의 ‘전염병’과 성직자와 평신도 안에 있는 성직주의의 ‘해충’, 그리고 ‘출세 제일주의’와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여성의 불충분한 참여에 대해 여러 번 강력히 비판하셨습니다.20) 이러한 고질적인 상처들은 교회 구성원들에게 계속해서 피를 흘리게 합니다.

화해로의 부르심

20. 우리 인간 역사의 가장 어두운 순간들에서 밤의 등대와 같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목소리, 몸짓, 역동적인 요소들 그리고 인간들이 언제나 다시 일어서고,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하는 그 길에서 절대 벗어나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예로, (엘살바도르의 수도인) 산 살바도르 대주교였던 오스카 아르눌포 로메로 성인(1917년-1980년)이 있습니다. 성인의 조국에서는 자유의 결핍으로 실제로 군대와 여러 반군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빈부격차는 심화하고 있었고, 소수에 의한 부의 축적은 스캔들이 되었습니다. 로메로 대주교는 인권 보호 위원회를 조직함으로써 목소리를 낼 힘이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자행된 불의를 고발함으로써 성인은 폭력적인 혁명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고, 실종자들(desaparecidos)의 어머니들과 학대받고 착취당하는 소작농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동행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그의 구체적이며 우선적인 선택은 신자 구성원과 교리교사, 그리고 사제들이 살해당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성인은 박해와 그의 강론에 대한 파렴치한 간섭, 그리고 그의 생명을 노리는 다양한 시도 등 온갖 시련들을 인내했습니다.

성인의 유명한 강론인 사순 제5주일(1980년 3월 23일) 강론 제목은 “불의 설교”입니다. 한 주 동안에 43명이 살해당한 학살 이후에 성인은 군인들, 국가 경호대와 경찰에게 말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국민의 일부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형제자매인 소작농들을 죽이고 있으나, 인간이 타인을 죽이기 위해 내리는 그 어떠한 명령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한 하느님의 법이 우선해야 합니다. 그 어떤 군인도 하느님의 법에 반하는 명령에 순종할 의무가 없습니다. …… 이제는 여러분의 양심을 되찾고 죄를 지으라는 명령보다 양심에 순종할 때입니다. …… 그 다음으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 고통받는 사람들, 하루하루 더욱 격동하는 비탄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이 사람들의 이름으로 여러분께 애원하고 여러분께 간청드립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명령합니다. 탄압을 멈추십시오!”21)

그 다음 날 천주 섭리 병원의 경당에서 미사를 거행하는데 소총 한 대가 밖에 주차된 차의 뒷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고, 이 총이 제대를 바라보고 있던 신자들의 눈에 띄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형제애의 성인 주교는 이렇게 말하며 마쳤습니다. “불태워진 이 몸과 인류를 위해 희생된 이 살이 우리에게 양식이 되어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몸과 피를 괴로움과 고통에 봉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국민에게 정의와 평화를 가져다주기 위해서입니다. …… ”22) 그 순간에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로메로 성인은 땅바닥으로 쓰러졌습니다. 탄환이 성인의 심장을 관통한 것입니다.

우리 세기의 도전 과제는 형제애

21. 형제애는 온 인류가 경험하고 있는 꿈입니다. 이상향은 아니고, 그보다는 각 개인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한 기회입니다. 곧 타인과의 만남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역사 안에서 모든 사람은 형제애라는 주제를 탐구할 임무가 있고, 그리스도교, 종교들, 정치, 철학과 과학의 깊이가 반드시 측량되어야만 합니다. 형제애에서 멀어지면 모두가 길을 잃을 수 있습니다.

교회와 우리 세상의 역사 속 예시들은 충분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 요세피나 바키타, 성 샤를 드 푸코, 성 마더 데레사, 성 오스카 로메로 등입니다. 그들은 개별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이익, 독재와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는 형제애에 대한 염원, 인간 마음 안에 뚜렷이 새겨진 그 염원에 대한 용감한 증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사람들 마음속에 형제애에 대한 인간 소명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은 주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성찬례를 거행할 때 다른 사람들, 특별히 가장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사람들과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지지받고 사랑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환영하도록 그리고 피조물을 보호하도록 부름받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여정이고 용서와 재일치의 여정이며 개인적이지 않은 형제애의 여정입니다.


13) 「모든 형제들」, 272항 참조. 

14)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8(제2판), 357항. 

15)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12항 참조.

16) 프란치스코, 제47차 세계 평화의 날 담화 ‘형제애, 평화의 바탕이며 평화로 가는 길’, 2014.1.1., 2항,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49호(2014), 19면 참조.

17) 프란치스코, 수요 일반 알현, 2020.9.2. 참조.

18) 프란치스코, ‘라틴 아메리카와 캐리비안 지역의 가톨릭 대학들’에 의해 주관된 회의 참석자들에게 한 연설, 2023.5.4. 참조.

19) 「모든 형제들」, 18-21항 참조.

20) 프란치스코, 라칭거 상 시상식에서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 재단’에 한 연설, 2018.11.17.; 평신도가정생명부 주관 회의 참석자들에게 한 연설, 2023.2.18. 참조.

21) 오스카 로메로, 「강론집」(Homilias), 섹션 6, (UCA 편집, 산 살바도르 2009), 453 – 대주교 로메로 신탁, (런던) - 온라인: http://www.romerotrust.org.uk/.

22) 「강론집」, 457면.





2.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형제애

“보라,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시편 133[132],1)

22.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순례 여정 중에 형제로서 함께 걸어가는 기쁨을 노래하곤 했습니다. 이는 풍성한 다양성을 지니는 인류의 일치가 바로 하느님에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양한 얼굴, 문화, 언어와 생각이 생명의 시작점이자 목적지인 하느님을 향해 ‘함께 걸어갑니다.’23)

성체성사: 역사의 총괄 실현

23. 상처 입은 우리 세상은 운명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상처에 필요한 치유보다 한없이 더 큰 치유를 받아 왔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치유하셨고 아드님 안에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심으로써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어 우리가 그분의 신적 본성에 동참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감탄하올 교환이여, 창조주께서 육신을 취하시어 동정녀에게서 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협력 없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를 그 신성에 참여케 하셨도다.”24)

죄의 상처가 죽음의 왕국을 이룩한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 난 상처에서 생명이 흘러나오게 만드십니다(요한 19,34 참조). 역사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열린 상처는 사랑의 상처입니다. 곧, 우리 삶을 일그러뜨리고 자녀이자 형제자매인 우리 정체성을 앗아가 버리는 증오와 폭력의 또 다른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의 상처인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느님 존재의 이유는 창조하고 구원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빠!’ 성자 예수님 안에 있는 자녀들의 형제적 외침

24. 예수님의 온 존재는 그분께서 “아빠”라고 부르시는(마태 6,9-13; 루카 11,1-4 참조) 하느님과의 친밀하고 신뢰하는 관계로 특징지어집니다. “아빠”라는 표현은 당시 유다 영성에서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친밀감의 표현입니다. 뱀이 에덴 동산에서 사랑이신 하느님 모습을 일그러뜨리고 죄가 아담과 하와의 생명의 대화를 깨뜨리게 만들었다면, 이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의 생명을 온전히 성부께 바치시어 이 불순종과 자만, 그리고 배반의 상처를 치유하십니다.

이와 동시에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방식은 언제나 형제애적 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저희 아버지”(마태 6,9)라고 부를 것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이고, 그러하기에 형제자매입니다. 이 “우리”는 형제애의 태도를 인식하고 키우며 함양하도록 부름받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성찬례: 형제애의 원천이며 정점

25. 부활의 열매이자 주님과 그분 나라의 증인인 교회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반드시 온 인류를 아울러야 하는 형제애의 구체적인 표지입니다. 우리가 교회이신 그리스도의 몸과 한 몸이 되게 하는 첫 행위는 바로 세례성사입니다.25) 우리가 주님과 또 우리 서로 한 몸이 되는 특권적 자리이자 그 새로운 토대가 되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전례 행위이고, 성찬례 거행, 특별히 주일 성찬례 거행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사랑 안에서 표현되는 관계의 진리를 지키고, 인간다운 형제애의 구체적인 실현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립니다.

26. 이처럼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마지막 만찬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갈라놓고 형제자매가 되지 못하게 했던 증오와 적개심의 벽을 파괴하시고 이를 단 한 번에 영원히 봉인해 주신 것입니다(에페 2,14-15 참조). 그래서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는 역사를 그 운명에, 침묵에, 또는 익명으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하나의 목적, 한 목소리, 하나의 얼굴, 한 몸, 곧 나자렛 예수님과 결정적으로 결합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그 나자렛 예수님의 현존을 성찬례 거행 안에서,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형제자매로 한데 모으신 그리스도인을 위한 생명의 말씀과 생명의 빵의 식탁에서 알아봅니다.26)

27. 성찬례가 거행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회중 안에서, 또 그리스도를 대신하여(in persona Christi) 희생 제사를 봉헌하고 거룩한 백성에게 예식을 집전하는 교역자 안에서, 그리고 거룩한 책의 선포 안에서,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안에서 탁월한 방식으로 직접 현존하십니다. 이 현존의 각 방식들은 형제들의 친교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한 몸에 대한 성사적 표현이며, ‘우리’가 바로 세례 때 받은 우리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27) “전례는 ‘나’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합니다. 이 ‘우리’의 범위를 축소시키려는 모든 제한은 언제나 악마적입니다. 전례는 하느님의 신비에 대하여 저마다 추정해서 개인적인 지식을 찾아내도록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례는 우리를 모두 한 회중으로 끌어안아, 말씀과 성사적 표징들이 우리에게 밝혀 주는 신비 안으로 우리를 깊숙이 이끌어 들입니다.”28)

성찬례 거행은 경쟁심과 폭력과 이기심의 모든 벽을 무너뜨리고 경계를 허물어뜨립니다. 하느님 나라, 곧 아드님 안에 있는 자녀들의 나라,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화해시키신 형제들의 나라, 생명과 형제애 그리고 화해의 상징인 말씀과 빵을 나누고 하느님의 그 실재에 참여하며 감사를 드리는 자녀들의 나라를 바라봅시다. 

말씀의 식탁에서

28.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인류에게 말씀하시고 그들과 소통하십니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이셨으며, 때가 찼을 때에 사람이 되시어 은총이 가득하신 여인에게서 나셨으며, 당신 파스카를 통하여 인류가 성령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살아가도록 이끄셨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전례 주년에 걸쳐 특히 주일마다 성찬례를 거행하며,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의 식탁 둘레에 모여 말씀을 듣고 기념하며 선포하고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교회의 생활 전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비에 결합됩니다.29)

하느님 백성이 모이는 말씀의 식탁은 ‘사랑의 언어’를 늘 새롭게 거행할 수 있도록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이 사랑의 언어는 이를 듣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이들을 형제자매로 이루어지는 한 백성으로 결합시켜 줍니다. 이것이 거룩한 교회의 친교입니다!

성체성사: 실현된 형제애

29. 우리의 구원이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십니다. 성체성사는 항구한 형태의 파스카 현현이고, 지나가 버리는 이 세상에서도 지속되는 것의 현존입니다. 이는 주님 재림(Parousia)의 첫 번째 시작입니다. 성체성사는 궁극적 사건인 새 하늘 새 땅을 미리 맛보게 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성찬례 기념제를 통하여 역사를 그리고 순례하는 인류를 완성으로 이끄십니다. 그 때에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가 되고 형제애의 상처는 하느님의 자녀 됨으로 치유될 것입니다. 이처럼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 오심으로써 우리는 역사 안에서 그 궁극적인 성취를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고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분과 친교를 맺게 됩니다. 부활하신 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내어 주시어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곧 당신 말씀, 당신의 몸과 피, 말하자면 당신의 인격과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을 화해시키시어 우리 존재를 하느님의 충만으로 들어 높이신 성자의 인격과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30) 

빵의 식탁에서

30. 형제애에 상처를 입은 세상을 성체성사가 치유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서로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모르고 대립과 경쟁의 관계 안에 놓인 세상에서, 성체성사는 우리가 같은 아버지의 자녀로서, 또한 그에 따라 서로 형제자매로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이루어진 한 식탁에 둘러앉도록 초대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성찬 제정 축성문을 낭송한 뒤에 화해 감사 기도 제1양식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인자하신 아버지, 성자의 제사로 저희를 아버지께 결합시켜 주셨으니 저희를 너그러이 굽어보시고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받아 모신 저희가 성령의 힘으로 온갖 분열을 이겨 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게 하소서.”

31. 회중 전체는 감사 기도와 영성체 사이에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의 기도는 성찬 거행에서 노래한 모든 찬양과 전구를 종합하고,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가는 문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성사적 친교는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맛보여 주는 것입니다.

32. ‘주님의 기도’는 친교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본질적으로 가족 관계로 살아가는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로 인식함으로써 예수님의 제자들과 모든 인간 사이에 세워진 새로운 유대를 선포합니다. 하느님의 부성은, 우리가 평화의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알게 되는 그 형제애를 낳습니다.

33. 그런 뒤, 제대로 행렬을 지어 나아가 성체를 받아 모실 때에 우리는 성찬의 친교를 통하여 우리가 받아 모신 그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인식하며,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의 몸에 ‘아멘’이라고 응답합니다.31)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이 ‘아멘’과 영성체는 그리스도의 몸을, 바로 주님의 자비하신 현존의 몸짓과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형제들의 백성인 교회를 역사 안에 가시화한다는 의미를 띱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영성체는 우리를 그리스도께 결합시키면서 우리의 이기심을 벗겨 내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모든 이에게 우리가 마음을 열고 일치하게 해 줍니다. 이것이 영성체의 경이로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아 모시는 분이 되는 것입니다!”32)

성체 신심과 대중 신심: 형제애의 표현들

34. 이러한 성찬의 형제애는 미사 거행 자체에서 드러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미사 밖에서 드리는 성체 공경을 통해 이어가고 심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성체를 보존하는 첫째 목적은 노자 성체를 통하여 아픈 형제와 형제애를 이루는 데에 있습니다. 아울러 성체 보존은 “성당에 모신 이 천상 양식을 흠숭하는 아름다운 관습”33)으로 하느님 백성을 이끕니다. 성령의 열매인 성체 조배는 그 기원과 목적을 언제나 미사 거행에 두며, 구원과 일치의 신비 앞에 있음을 인식하는 사제다운 백성의 형제적 인식을 표현합니다.34)    

이러한 성체 신심과 더불어 다양한 형태의 대중 신심이 여러 지역 교회들, 특히 라틴 아메리카 지역 교회들을 풍성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생활과 세례로 받은 사제직의 이러한 표현들은 지역 교회 문화 나름의 표현을 사용하여 신자들이 기도와 찬미, 증언과 거행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제애를 간직하도록 도와줍니다.35) 대중 신심은 믿는 이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표지이며 특별한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을 세대를 이어 전달합니다.36) 예를 들어, 이 대중 신심은 쿠엥카, 푸힐리, 키토 등에서 하는 음악, 춤, 색색의 전통 의상, ‘성채’(castles) 불놀이37), 성체 행렬을 위해 꽃 양탄자로 장식한 거리에 반영되었습니다.

대중 신심을 통한 형제애의 풍성한 증언은 수많은 순례지에서, 특히 성모 순례지에서 뚜렷이 드러납니다. 성모 순례지들은, 성부의 가장 위대한 성전인 공현하신 그리스도처럼,38)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와 형제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의 천막이 드넓혀진 것입니다. 키토 대교구의 경우, 킨체 국립 성모 성지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이 당신 집에서 해마다 11월 21일만이 아니라 날마다, 예수 성탄 대축일 성야에 하듯이, 당신 아드님을 보여 주시려고 부유한 이도 가난한 이도 모두 반갑게 맞이하십니다(루카 2,16-17 참조). 그 밖에 다른 모든 대중 순례지에서도 순례자들은 세속적인 모습을 벗고 성찬례 거행에 신실하게 참여합니다. 아무 차별 없이 모든 이가 열린 문과 차려진 식탁을 만나며, 함께 걸어온 여정과 함께하는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창조 계획이며 그리스도 신앙의 선물인 형제애를 체험합니다.  

가장 작은 이들이 빠진 형제애는 형제애가 아닙니다

35.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이 형제애가 참된 것이 되려면 보편성을 띠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속에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자리가 있습니다.’39) 강생의 신비는 우리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이 우선적 선택을 알려 줍니다. 구원은 겸손한 젊은 여인의 “예”라는 응답 덕분에 실현되어, 가난 안에서 구세주가 탄생하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꼴찌”(마태 20,16)에 관하여 우리의 양심을 뒤흔드는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배척당한 이들, 희생자들, 가난한 이들, 여성들, 토착민들, 젊은이들과 노인들, 병자들, 사회나 교회 안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거나 들러리로 여겨지는 나머지 대중들, 고통받는 얼굴들, 중요하지 않은 이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과 동일시하시는 이들이며 마지막 날에 우리의 재판관이 될 작은 이들(마태 25,31-45 참조)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교회: 모든 이를 위한 천막

36. 최후의 심판에 관한 복음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소외된 이들이나 꼴찌가 된 이들, 굶주린 이들이나 헐벗은 이들, 병자들이나 죄수들을 신비하면서도 실질적인 방식으로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셨음을 말해 줍니다(마태 25,31-45 참조). 요한 복음서에서, 성찬 제정에 관한 설명 대신에 발을 씻어 주신 이야기를 전하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요한 13,1-20 참조).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형제적 섬김을 실천하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성찬례의 심오한 사회적 의미를 잊은 채 그저 예식의 동작을 재현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섬김을, 곧 다른 이들을 위하여 당신 생명을 내어 주신 그 섬김을 계속해 나가게 하신 것입니다.40)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가난한 이를 위한 그분의 선택과 연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습니다(2코린 8,9 참조).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빵 쪼갬은 가난한 이들을 향한 연대와 관련됩니다.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이 식탁 나눔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개하며, 그들의 모임은 주님의 만찬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1코린 11,20 참조). 

37. 라틴 아메리카 신학과 사목 활동은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외치며, 그 신앙 체험을 통하여 성찬례와 애덕과 정의 사이의 연결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는 대신덕과 대인덕에서 출발하여 확고한 인격주의의 시각으로 현실을 변화시키는 행동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수용하고 포기하는 선택이 아니라, 인간과 생태 환경을 위협하면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방해하는 모든 현실을 뿌리 뽑고 극복하기 위하여 헌신하고 규탄하며 거부하는 때를 포함하는 선택입니다. 

몬테시노스의 호소

38. 히스파니올라 섬에서 거행된 성찬례에서 라틴 아메리카 교회 역사상 최초로 토착민을 위한 예언적 부르짖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1551년 대림 시기에, 도미니코 수도회의 안토니오 데 몬테시노스(Antonio de Montesinos)는 “나는 ……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라는 세례자 요한에 관한 복음 말씀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소리는, 여러분이 이 무죄한 사람들에게 저지르는 잔악함과 폭정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모두 대죄 가운데 있으며 대죄 속에서 살아가고 죽는다는 외침입니다. 말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무슨 권리로 또 어떤 정당함으로 이 인디오들을 그처럼 잔인하고 끔찍한 노예 상태에 잡아 둡니까? 여러분은 무슨 권한으로 자신의 땅에서 온유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 사람들을 상대로 이 가증스러운 전쟁을 벌였습니까?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들어본 적 없는 살육과 학살로 전멸당했습니다. …… 그들은 인간이 아닌가요? 그들에게 이성을 갖춘 영혼이 없나요? 여러분에게는 그들을 여러분 자신처럼 사랑할 의무가 없나요? 이해가 안 되나요? 느끼지 못하나요? 어째서 이처럼 깊고 무기력한 잠에 빠져 있나요?”41) 

스페인 식민지 감독관(comendero)42)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훗날 그는 불의한 자들을 통렬히 비난하는 집회서 34장 21-22절의 말씀을 묵상한 뒤 자기 노예들을 풀어 주었고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가 되었으며 주교 임명을 받았고 토착민들의 위대한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39. 성찬례 거행은 당연히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더 이상 어떤 개인도 차별하지 않는 형제들의 잔치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2007년 아파레시다 최종 문서가 말했던 새로운 문명이 샘솟습니다. “이 대륙을 토착민들과 그 문화들의 친교와 소통의 공간으로 만들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여성들, 토착민들,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인들, 농촌 사람들과 대도시 주변 지역 거주자들 등 내몰린 분야들이 가진 주인의식에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께 기초하고 그분께 속량받은 우리 백성들의 모든 삶은 희망과 기쁨으로 미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43) 최근에, 교황청 문화교육부와 온전한인간발전촉진부의 공동 선언 「발견의 교리」(Doctrine of Discovery)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께 받은 명령에 충실한 가톨릭 교회는 보편적 형제애와 모든 인간의 존엄성 존중을 증진하고자 노력합니다”(1항).

23)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49-53항 참조.

24) 「성무일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1(제1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첫 저녁기도 중 첫 응송.

25) 프란치스코, 수요 일반 알현, 2018.4.11.; 『가톨릭 교회 교리서』, 1213항 참조.

2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um Concilium), 1963.12.4., 56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8(제1판), 28항 참조.

27) 전례 헌장 7항;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5항 참조.

28) 「나는 간절히 바랐다」, 19항.

29) 「미사 독서 목록 지침」(Order of Readings for Mass),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8(제1판), 5.60항 참조.

30) 베네딕토 16세, 세계주교시노드 후속 교황 권고 「사랑의 성사」(Sacramentum Caritatis), 2007.2.2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8(제1판), 89항 참조. 

31) 프란치스코, 수요 일반 알현, 2018.3.21. 참조.

32) 수요 일반 알현.

33) 「미사 밖에서 하는 영성체와 성체 신비 공경 예식」, 5항 참조.

34) 「사랑의 성사」, 68항 참조.

35) 교황청 경신성사성, 「대중 신심과 전례에 관한 지도서: 원칙과 지침」(Directory on Popular Piety and Liturgy: Principles and Guidelines),2001.12., 86항,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29호(200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7면 참조.

36)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013.11.2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제2판), 122-123항; 에콰도르 키토의 엘 킨체(El Quinche) 국립 성모 성지에서 한 연설, 2015.7.8. 참조. 

37) 역주: 갈대로 만든 이 구조물을 태울 때 장관을 이루는 불꽃놀이를 볼 수 있다.

38) 「대중 신심과 전례에 관한 지도서: 원칙과 지침」, 262항 참조.

39) 「복음의 기쁨」, 197항 참조. 

40) 「사랑의 성사」, 88항 참조.

41) Bartolome de las Casas, Historia de las Indias, t. III, cap. IV, (Madrid: Printed by Miguel Ginesta, 1875), 365-366.  

42) 역주: 엔코멘데로(encomendero)는 엔코미엔다(Encomienda)의 영주를 말한다. 엔코미엔다는 하나 또는 한 무리의 토착민 마을 주민들에게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이 현물 또는 강제 노역의 형태로 공납을 거두어들이도록 위임한 제도이다.   

43)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 지역 주교회의 총회, 「아파레시다 최종 문헌」(Concluding Document of Aparecida), 128항.





# 3. 세상을 치유하는 형제애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40.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빵을 많아지게 하신 복음 구절에서, 모든 이를 배불리고도 남은 풍성한 양식이라는 기적뿐만 아니라 한 공동체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곧, 스승님 주위로 모여든 회중으로 이루어진 한 공동체가 애덕의 명령을 받아, 가진 것을 나누고 함께 수고함으로써 맡겨진 군중의 굶주림을 해소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는 그저 교회의 친교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세상의 생명과 형제애를 위하여 쪼개어 나누는 빵이 되라고 주님께 파견받은 백성을 나타내는 성찬례의 예언자적 표징입니다. 

화해 그리고 폭력

41. 세상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의 활동은, 만연한 폭력이 우리를 모두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만든 역사의 비극적 현실과 대비됩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 신자들이 대다수인 에콰도르에서, 결백한 이든 죄지은 자든 거리에서 또 감옥에서 무차별적으로 목숨을 잃는 일들이 생겨 지난 몇 해를 최근 역사에서 가장 폭력적인 때로 만들었음을 생각한다면, 화해의 형제애를 말하는 것은 믿지 못할 말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구원이 실재하지만 그 궁극적 실현에 도달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치유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상황들이 우리 눈에 보이지만, 세상은 그 마음도 운명도 치유받아 왔습니다. 폭력 앞에서의 분노 그리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열망은 치유받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알려줍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분의 선교 제자가 되어,44) 우리가 서로 관계 맺는 ‘본성적’ 방식을 해치며 고조되고 있는 폭력에 복음적으로 새롭게 대응할 수 있었던 수많은 사람에게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용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42. 세상은 상처받았으며, 형제애의 길을 찾는 것이 시급하고 또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해치는 폭력에 우리가 굴복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이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 옛날부터 인류 안에는 형제가 자기 형제를 수많은 방법으로 살해하는 사회적 갈등이 언제나 존재합니다. 성경도 같은 이야기를 전합니다만, 하느님께서는 가해자 편이 아니라 피해자 편에 계신다는 사실을 확언합니다. 

그리스도의 계시는 폭력적 갈망의 수수께끼를 뒤집습니다. 그 계시가 사회를 건설하는 모방의 역동을 무효로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참다운 본받음으로 향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가해자나 복수심에 찬 피해자를 모방하는 것도 아니라 용서하시는 피해자 곧 하느님의 아드님이며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향하게 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일이면 언제나 성찬례 거행 때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곧 사랑으로 말미암아 당신 생명을 내어 주신 분, 쪼개어 나누어지시는 분, 앙갚음의 말 한마디도 증오의 몸짓도 없이 당신의 사형을 집행한 자들을 용서하시는 분 앞에 자리합니다. 

희생자의 목소리

43. 따라서 패배한 이들의 목소리는 폭력의 완전한 종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입니다. 그러한 사례들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교회 내 학대의 피해자가 된 이들 앞에서45) 그리고 그 밖에 수많은 인간 불평등의 희생자 앞에서46) 보여 주셨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희망에 대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가해자들이 승승장구해 왔다고 역사가 증언하지만 바로 그 역사 안에는 또 다른 항구한 특징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주는 참다운 익명의 성인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변화시키는 힘이 거기에, 특히 성찬례 안에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주신 길을 따라 걸어갈 임무, 곧 자기 목숨을 내주기까지 사랑하여야 하는 임무를 체험하고 공유하면서 살아갑니다. 

치유받은 형제애; 무상성

44.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에 대한 파스카 이야기는 더 이상 경쟁의식이 아닌 무상성의 관점에서 공동체를 건설할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 부활하신 분께서 수난의 상처를 보여 주시는 것은 굴욕을 겪으신 것에 복수하고 살해자들을 박해하시려 함이 아니라, 용서와 자비의 기쁜 소식을 믿도록 모든 민족을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그러하기에 부활하신 분께서는 무덤가의 비탄이 아닌 새 세상의 기쁨 안에서 성찬례를 거행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성찬례 안에서, 화해는 동족상잔의 관계를 형제적 공동체로 변화시키는 은총으로 기념될 수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절대적 거저 줌의 행위 덕분에, 우리는 하늘을 향한 희생자들의 피맺힌 절규의 슬픈 기억에서 벗어나, 모든 이를 화해시키는 보편 행위 안에서 형제애의 외침을 하나로 모으는 기쁨의 기억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죄지은 자들에 대한 단순한 사면이나 희생자를 소외시키는 안타까운 공모가 아니라 새 역사와 새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용서의 행위 안에서 타인의 불행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인 화해를 수반합니다.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ㄷ) 하고 이사야가 이미 선포하였듯이, 구원을 가져오는 선물이라는 성찬례의 논리를 온전히 보여 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하시는 예수님의 초대와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하시는 성찬의 기념제 안에 계시는 파스카의 그리스도의 초대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충실한 선교 제자로서 우리 목숨을 아낌없이 온전히 내어 줌으로써만 형제애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이는 만민의 그리고 모든 문화의 형제애를 향한 굶주림이 채워질 때까지 쪼개어지고 나누어지는 생명입니다. “우리가 서로 돌보고 서로 격려하며 서로 도움을 주는 것을 모든 사람이 보고 경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내어 주는 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룹니다. 우리는 ‘물건’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모든 주는 행위는 자기 자신을 준다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내어 줌’은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신 그 사랑의 모든 권능이 우리 삶에 뿌리내려 그 창조적 권능에 우리 마음을 열 수 있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47)

창조와 보편적 형제애

4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러한 동족상잔의 전쟁이 빚어낸 야만적 참상을 깨달은 모든 민족은 「세계 인권 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1984)을 마련했습니다. 이로써 지상의 민족들 사이에 벌어지는 살육의 폭력에 마침표를 찍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잇따른 역사적 사건들은 권력을 향한 갈증이 마치 저주처럼 벗어날 길 없어 보이는 온갖 형태의 폭력을 불러오며 인류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가운데 도사리고 있는 권력욕을 제어할 수 있습니까? 그 치료제는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겸손과 온유

46. 예수님 이야기는 우리에게 길을 일러줍니다. 바로 완전한 겸손을 보이신 예수님의 자기 낮춤과 다른 이들을 향한 ‘온유함’의 전적인 부드러움입니다. 겸손은 우리 인간의 터전인 흙(humus)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그 흙 안에서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찾고 우리가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흙으로 빚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흙에서 시작하여 우리는 모든 피조물과 온유하게 연결됩니다. 그러한 까닭에, 공동의 집을 파괴해 온 온갖 형태의 우월의식, 하느님이 결여된 인간 중심주의의 찌꺼기를 우리는 벗어버릴 필요가 있고 또 그것이 시급합니다.48)

나와 다른 이들 사이를 가로막는 모든 이해관계를 제쳐두고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형제로서 서로를 얼싸안기 위하여 가난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차이를 넘어 형제자매입니다. 우리의 가난을 깨달을 때, 우리는 모든 생명을 존중하면서 땅, 불, 공기, 물, 동물을 더욱 우리 형제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형제 관계는 이 우주적 형제 관계를 관통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를 온갖 것에 구속된 사람들이 되게 하고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에서 불평등과 장벽을 만들며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형제애를 파괴하여 우리를 남아도는 물건들 안에 빠져 죽게 하는 소비주의를 극복하고 검소한 삶의 양식으로 회귀하는 것을 수반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형태의 보편적 형제애를 일구어 나가지 않는다면 인간의 형제애는 끊임없이 위험해지는 환상으로 남습니다. 

보편 형제애는 가능하다

47. 보편적 형제애가 가능합니까? 그렇습니다. 보편적 형제애는 용서를 베푸시는 희생양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들 안에서 대항 문화적 생활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의 바다에서, 이러한 깨달음은 세상을 바닥부터 속속들이 재창조할 수 있는 성장의 파도를 일으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 신앙이 지닌 사회와 문화의 재건 능력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이 모든 능력은 우리를 같은 식탁으로 불러 모으시어 당신의 복음과 당신의 몸과 피로 양식을 주시는 유일하신 분의 힘입니다.

바로 크나큰 감사인 성찬 거행이 하늘과 땅을 하나 되게 합니다. 성찬의 거행은 우리를 형제애의 장인이자 공동의 집의 슬기로운 관리자로 만들어 줍니다. 이러한 까닭에, 성찬례는 또한 환경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꺼지지 않게 하는 빛과 동기의 원천이 되어, 우리가 모든 피조물의 관리자가 되도록 이끌어 줍니다. 이러한 선택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이 행성에서 살아가는 인간 공동체의 영속을 위한 필수 요건입니다.49)

교회: 세상 치유의 증인

48. “교회는 성체성사로 삽니다.”50) 그리고 성체성사가 세상을 치유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시선은 반드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교회를, 곧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 당신 말씀의 빵과 당신 몸을 모든 민족들에게 가져다 주라고 불러모으신 남녀들의 공동체를 향해야 합니다. 이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13) 하신 예수님의 겸손하고 자애로운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유한 부르심에 따라 빛과 소금과 누룩이 되라고 파견받아 이 세상 한가운데에서 이와 같은 치유의 기억이자 촉진제가 되라고 부름받습니다. 성체성사의 치유하는 힘은 그리스도인의 증언에서, 곧 그러한 형제적 공동체, 그리스도의 명령을 실천하며 밖으로 나가는 교회 됨에서 발휘됩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4)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모든 성찬례 거행 안에 울려 퍼집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을 말씀하시려 하신 것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바로 사랑의 기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 곧 당신 생명 전부를 내어 주실 정도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는 일은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사랑을 일깨워, 우리의 이기심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하느님의 논리로 들어갈 수 있게 합니다. 곧, 누구든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된다는 논리입니다(마태 16,25 참조).

이렇게 할 때, 일상의 삶이 바뀌고 나눔에 열리며 세상의 중심에서 용솟음치는 정의와 평화의 요구에 응답하게 되고 피조물 보호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의 날인 주일마다(묵시 1,10 참조) 모든 인종, 언어, 민족, 국가에서 나온 사람들이(묵시 7,9 참조) 모든 지역에서 주님의 제대 둘레에 모여 이 세상의 중심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일치할 것입니다.        

“평화로이 가십시오.”: 선교 명령

49. 미사 거행이 끝나면, 전례 회중은 천천히 흩어져 밭고랑에 뿌려진 씨앗처럼 사방으로 나아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경청하고, 같은 빵을 먹고 같은 잔을 마시고 난 뒤에 저마다 집, 학교, 직장, 가게, 휴양지 등으로 돌아가, 형제애의 관계망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새로운 길을 찾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종들이 신앙으로 받은 성사를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하고 노래하는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의 본기도가 이를 매우 적절히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신 다음에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이를 위하여 바쳐진 몸’이 되어 취약하고 고통받는 장소들에서 복음에 봉사하고 나눔을 하며 치유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기념제를 거행하는 자리를 종종 이주민의 비인간적인 시련, 도전을 제기하는 극단주의, 문제투성이 근로 환경까지 확장시켜,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세상의 죄를 낫게 하시고 형제애를 세우신 종의 복음을 되살리고 현존하게 합니다.     

삶, 미사의 연장

50. 참다운 주님 만찬 거행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성찬의 사람들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51)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제자 공동체 전체가 당신 삶의 역동적인 모습을 본받도록, 곧 온 인류를 위한 빵이 되게 “들어 올려지고” “쪼개어지며” “나누어지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심을 기념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께서 제자들과 우리 저마다의 발을 씻겨 주신 일을 그대로, 곧 우리 자신을 낮추고 우리의 형제들을 섬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형제들의 발을 씻기고, 얼굴을 닦아 주며, 우리의 사랑과 자비로 그들의 마음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형제들 사이에서 그분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랑의 기억은 사랑의 과제가 되어 우리에게 미래를, 파스카의 희망을, 충만한 행복의 희망을 열어 줍니다. ‘하느님과 함께 기쁘게 지내려고’ 미사에 참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험난한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형성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어머니 아버지가 가정의 식탁에서 일용할 빵을 나누며, 등이 굽도록 자녀를 길러 훌륭하게 키워 내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서 모든 이의 존엄, 특히 가장 가난하고 소외받으며 차별받는 이들의 존엄을 수호하고자 노력해 왔습니까! 이 모든 일을 해내는 힘을 그들은 어디에서 찾습니까? 바로 성체성사 안에서, 용서하는 피해자 안에서,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빵을 쪼개어 나누시면서 다음과 같이 거듭 말씀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의 힘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생명의 원천

51.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서 스승님 안에 통합되고, 모든 증언이 그분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최고의 증인은 주님이시기에 우리의 증언은 언제나 그분의 증언에 참여하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이웃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 주면서 봉사하는 형태를 띱니다. 이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상기시키는 친교의 교회론입니다. “성찬례는 모든 복음화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 …… 성찬례가 교회 생활의 중심이자 정점입니다.”52) 예식과 내적 영성 뒤에 숨어 이 현실을 벗어나려는 유혹이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가 거행하는 것에 진실하다면 우리는 이러한 위협을 즉시 거부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안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물론 가장 지독한 멸시도 보지만, 신앙은 사랑에 눈길을 모읍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말은 더 이상 증오가 아닌 다음과 같은 사랑의 말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로마 군사의 창이 사람을 죽이는 폭력의 마지막 찌름으로 범죄를 종결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피와 물, 곧 생명과 구원이 샘솟게 하십니다(요한 19,34 참조). 이는 예언과 행동을 통하여 증언됩니다. “이와 같은 위기의 순간들에 희망의 예언자가 됩시다. 희망의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고, 죄의 이데올로기와 죄의 구조를 규탄하며, 하느님의 양 떼를 지배하거나 소유하거나 조종하려는 의사를 모두 단념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읽고 풀이하는 법을 아는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53)

52. 이러한 증언은 모든 시간과 장소를 넘어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 생활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레오니다스 프로아뇨 빌랄바(Leonidas Proano Villalba) 신부는 1954년에 에콰도르에서 원주민 인구가 가장 많은 리오밤바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사목의 초점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영감을 받아 교육, 건강, 노동, 토지에 대한 권리를 빼앗긴 채 착취당하고 소외당하는 원주민 공동체의 수많은 구체적인 얼굴인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에 맞추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언어와 문화와 전통이 인정받도록 하였습니다.

타이타(taita, 케추아어로 ‘신부님’) 레오니다스는 형제애를 특징으로 또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뿌리내린 교회-공동체를 추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한 공동체를 방문했는데 …… 사람들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묘사하는 공동체에 관한 하느님 말씀을 독서로 전례를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만들었나요?’ 그들은 ‘그렇습니다.’ 하고 답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그 공동체를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되게 하는 특징을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그들은 공동체로서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고, 갑자기 남루한 옷차림을 한 여성이 손을 들어 발언을 청하고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주교님, 이곳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살아 있고 활발합니다. 제가 그 공동체가 한 일의 증인입니다. 제 남편은 중병에 걸렸고, 우리는 가난해서 리오밤바에 갈 방법도, 병원비와 약값도 없었어요. 정말 아무것도 없었지만 공동체가 저희를 보살펴 주고 남편을 문병 왔으며, 모금을 하여 남편을 진찰받게 하고 택시를 태워 주었으며 비싼 약값을 내 주었어요. 그분들 모두와 공동체 덕분에 저는 남편을 잃지 않았어요.”54)

53. 우리가 오스카 로메로 주교를 살해한 총격 이후의 침묵을 뼈저리게 느끼고, 우리에게 계속 도전 과제를 제시하는 몬테시노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형제애를 통한 세상의 치유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수많은 남녀의 증언을 우리 각자의 공동체 안에서 묵상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마태 23,8 참조)이기에 끊임없이 우리를 당신과 또 당신의 아버지와 하나 되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44) 「아파레시다 최종 문헌」, 28-29항 참조.

45) 프란치스코, 필립 푸렐라 씨와 발렌티나 알라츠라키 여사에 대한 비오 기사회 대십자 기사 서훈과 훈장 수여에서 한 연설, 2021.11.13. 참조.

46) 프란치스코, 캐나다 마스크와시스에서 열린 선주(先住) 민족인 메티스와 이누이트 원주민들과의 만남, 2022.7.25.; ‘가톨릭 대학 연구 연맹’과 교황청립 백주년 기념 재단이 후원한 모임 참석자들에게 한 연설, 2023.3.11. 참조.  

47) 프란치스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에서 한 강론, 에콰도르 키토, 2015.7.7.

48) 「모든 형제들」, 194항 참조: “‘온유함이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서로 가까이 다가가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사랑입니다. 이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눈과 귀와 손에 이르게 되는 움직임입니다. …… 온유함은 가장 용기 있고 강인한 사람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 ‘가장 작은 이들, 가장 약한 이들, 가장 가난한 이들이 우리 마음을 온유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호소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우리 형제자매이고,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49) 프란치스코,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2015.5.2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21(제2판), 161.236항 참조.

50)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 2003.4.17.,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제1판), 1항.

51) 프란치스코, 수요 일반 알현, 2018.4.4.

52)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22.31항.

53) 알프레도 호세 에스피노사, 사목 교서 “희망의 예언자”(Profetas de Esperanza), 키토, 2022.4.22.   

54) Luciano Bellini (c), Palabras de Liberacion. Discursos y Homilias de Mons. Proano, Quito, Abya Yala, 2009, 58-59.





결론

성체성사: 형제애 찬가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

54. 죄로 벌어진 상처란, 아담이 하느님과의 대화를 단절하고 형제애의 유대가 아벨의 피로 얼룩진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상처를 치유해 주셨고, 우리는 이에 대한 기념제를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파스카 식사인 성찬례 안에서 거행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아드님을 내주셨고, 아드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몸소 사랑의 선물이 되셨습니다(필리 2,8 참조). 사랑의 영원함이 역사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하느님의 눈을 피해 무화과나무 잎 아래로 숨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생생한 빛이 하느님께서 인류와 나누시는 대화와 친교를 회복시켜 줍니다. 파스카 식사는 인간이 마침내 참된 아들딸이 되어 하느님 나라의 식탁에 앉는 새로운 에덴을 열어 줍니다. 또한 성찬례는 형제애의 다락방으로 변화됩니다. 쪼개진 빵과 축복의 잔이 되시어 우리를 형제가 되게 해 주시는 성자께 우리를 결합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아담의 마음을 악으로 그리고 카인의 손을 피로 더럽힌 이기심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성찬의 잔치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손에 빵을 드시고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며 인류의 적으로 왜곡된 그 어떤 하느님 상(像)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빵을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심으로써 상처 입은 형제애를 치유하십니다. 성체성사는 참으로 우리 사랑의 길을 치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드리는 기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친교로 부름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참조). 이와 동시에, 성찬례의 이 새로운 ‘우리’는 다락방에서 폐쇄적으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곧, 성찬의 사랑이 흘러넘쳐 세상의 상처들을 치유하고 우리가 서로 섬기도록,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우리 이웃을 섬기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55.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 공동체들에서 성찬례의 역동성은 말씀을 ‘기념하며’ 듣기와 ‘빵 나눔’에서 그 활력의 중심을 찾아왔습니다.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확인과 친교와 선교의 표시로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악수하고 기도 안에서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갈라 2,10) 하였듯이, 오늘날에도 우리는 성찬례 때마다 이를 그대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형제애에 대한 염원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응답은,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시고자 사랑으로 생명의 빵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러한 까닭에, 교회는 꼴찌로 여겨지는 이들과 가장 작은 이들을 비롯하여 이웃의 학대받은 몸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인식하면서, 언제나 밖으로 나가 교회의 복음화 활동의 풍요로운 결실을 새롭게 일구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가장 작은 이들에게 보여 주신 바로 그 몸짓과 말씀으로, 곧 생명과 친밀감, 사랑과 존엄의 몸짓과 말씀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위하여 봉사합니다. 그리고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만 계속해서 성찬례가 역사에서 잊힌 가장 작은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생명의 말씀과 빵이 되는 것입니다. 

56. 교황께서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으로 재임하시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 시절에 성체성사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를 통하여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하여 새겨 주신 사랑의 인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쪼개진 빵이 저희의 빈손을 가득 채워 주기를, 자신의 재능을 관대하게 베푸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채워 주기를 빕니다. 성체의 달콤한 무게가 저희 손에 사랑의 인장을 새겨,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을 받은 저희 손이 가장 힘없는 이들을 환영하고 포용하는 손이 되기를 바랍니다. 축성된 빵의 온기가 우리 손 안에서 타오르기를, 빵과 정의에 굶주리고 하느님을 갈구하는 이들과 이 위대한 선물을 나누고자 하는 생생한 열망으로 타오르기를 바랍니다.”55)

57. 교회는 그리스도께 결합되는 만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보편적 성사입니다.56) 그리스도께서 친교이시라면 교회 역시 친교입니다. 교회는 민족들 사이에 이루는 친교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영원한 삼위일체 사랑과 이루는 친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심에서 태어난 교회는,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성찬의 사랑으로 이러한 새로운 형제적 관계들을 이루도록 파견됩니다. 또한 성찬례는 세상의 제대입니다. 이 세상의 제대에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모든 피조물의 생명과 돌봄을 위한 계약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58. “성찬의 여인”이신 동정 마리아와57) 우리 백성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 마리아니타 데 헤수스 성녀와58) 성체성사의 순교자인 에밀리오 모스코소 복자와59) 이루는 친교 안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과 하나 되어 모든 피조물의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형제애 찬가가 우리 공동의 집에서 울려 퍼지게 노래합니다.

민족들아, 백성들아, 땅들아, 겨레들아!
이웃이고 벗이며 가족인 너희가
상처 입고 비통해하며 분열되고 흩어진 것은
그토록 많은 살육을 하는 무기와
삶과 노래를 질식시키는 마약 탓이니.

주님, 저의 완고함을 용서하소서.
이는 흙에서 나온 저에게 맞갖지 않은 표징으로,
저를 인간적이고 신적인 것에서 멀어지게 하고
형제애의 유대를 깨뜨리며
빵과 포도주 안에 소리 없이 현존하여 계시는
주님께 슬픔을 안겨 드릴 따름이나이다.

사람들이 흘리는 인간의 피는
살기 어린 충돌로 흘리는 형제자매들의 피입니다.
너그러우시고 위대하신 주님,
혼란스러운 정신과 찢어진 마음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간청하는 이들을 굽어보시어,
그들이 주님 사랑의 성심 안에서 안식처를 찾게 하소서.

주님, 저의 이기심을 용서하소서.
온정을 가리고 있나이다.
저에게 닥친 그 고통을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 위에 짊어 지시고
빵과 포도주 안에 소리 없이 현존해 계시나이다.

주님, 저희가 교회가 되게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시노달리타스 여정에서
언제나 형제자매로 함께 걸어가고
미움도 이기심도 원한도 이제 떨쳐 버리며
친밀한 대화와 사랑의 평화를 맛보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상처를, 당신께 울부짖는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향유이시나이다.



부록

1. 세계 성체 대회 기도문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의 성심 안에서
오늘 주님께 찬양과 경배와 찬미를 드리는
이 백성을 굽어보소서. 

주님께서는 저희를 한 식탁에 불러 모으시어
주님의 몸으로 저희를 기르시니
저희가 온갖 분열과 증오와 이기심을 이겨 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요
참된 형제자매로 일치하게 하소서.

주님 사랑의 성령을 저희에게 보내시어
저희가 형제애와 평화, 대화와 용서의 길을 찾으며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협력하게 하소서.
아멘.

 

2. 로고

십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로 벌어진 상처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세상이라는 살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인류는 하느님의 어린양에게 최악의 폭력을 저질렀으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열린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의 표징 안에 세상을 향한 당신 사랑을 넘치게 부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신 분께서는 모든 이를 아버지와 화해를 이룬 형제자매로 품에 안으십니다. 

마음
십자가 위에 계신 그리스도의 열린 마음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는 사랑의 샘입니다. 그분의 상처는 생명과 화해의 원천입니다. 부활하신 분의 열린 상처는 인류를 괴롭히는 미움과 증오, 폭력과 죽음의 상처들을 치유하는 사랑의 상처입니다.

제병
제병은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정점이며 원천인 성찬례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인류 역사에 새로운 방향을 가리켜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쪽에서 서쪽에 이르기까지 당신 백성을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말씀과 살아 있는 빵 주위로 계속 모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성찬례는 형제애의 유대입니다. 죄가 이 유대를 끊어 놓으면, 성찬례 거행이 우리를 한 식탁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로 다시 하나가 되게 해 줍니다. 

키토
키토는 지구의 중앙, 적도에 자리한 도시로 그 천막을 넓혀 거대한 성찬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 키토에서 모든 이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받는 형제애의 꿈을 이룩하도록 초대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역사적 순간에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

 

3. 공식 주제가

주님 식탁으로

(후렴) 세상을 치유하는 형제애,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이를 보여 주시어,
주님 식탁으로 우리를 하나로 불러 모으시고
형제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네.

1
주님께서 당신 몸과 피로, 하느님의 신비로,
제대 위에 현존하시어
빵과 포도주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화해와 생명과 평화를 주시네.

2
하느님의 말씀, 우리의 벗인 주님,
우리를 형제애로 초대하시어
우리가 여기에 함께 모이게 하시고
주님 친히 우리의 양식이 되시어
치유하는 사랑으로 우리를 채우시네.

3
형제애는 말보다 더 크고
분노를 잊게 만드는 포용이며
가난하고 힘없는 이를 도와주고
고통받는 형제를 위로하네.

4
주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네.
“너희는 모두 한 형제이니 하나가 되어라.”
우리는 에콰도르에서 온 세상을 향하여 선포하네.
“예수님, 당신께서는 생명이시나이다.”

“En torno a tu mesa”
(Rit.) Fraternidad para sanar el mundo
eso nos muestras, Senor, desde la cruz.
Tu nos congregas en torno a tu mesa
y nos ensenas al hermano a amar.
(Rit.) Con tu cuerpo y sangre, misterio divino,
te haces presente aqui en el altar.
Tu estas con nosotros en el pan y el vino
que reconcilian, que dan vida y paz.
(Rit.) Senor amigo, Palabra de Dios,
tu nos invitas a ser fraternidad.
Por ti aqui estamos y eres alimento
que nos llena de amor para sanar.
(Rit.) Fraternidad es mas que una palabra,
es un abrazo olvidando el rencor,
es dar la mano al pobre y desvalido,
es consolar al hermano en la afliccion.
(Rit.) Tu nos ensenas a amar al mas pequeno,
ustedes son todos hermanos, sean uno.
Desde Ecuador, para el mundo entero,
anunciamos: Tu eres la vida, Jesus. 

작곡(Musica) Marco Antonio Espin Landazuri
작사(Letra) Marco Antonio Espin Landazuri y Solideo

 

4. 성체 대회의 모습

《로마 예식서》의 『미사 밖에서 하는 영성체와 성체 신비 공경 예식』에서

기도와 사명을 위한 멈춤

109. 성체 공경의 매우 특별한 표현으로 현대에 와서 교회 안에 도입된 성체 대회는 최근 하나의 ‘집회’이다. 곧 이 집회에 하나의 공동체가 온 교회를 초대하거나 하나의 지역 교회가 같은 지역이나 같은 나라 또는 전 세계의 다른 교회들을 초대하여 성체 신비의 어떤 주제에 대하여 다 함께 깊이 깨닫고, 사랑과 일치의 유대 안에서 성체 신비를 공적으로 공경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대회들은 믿음과 사랑의 참다운 표지가 되도록 그 지역 교회가 모두 온전히 참여하고 다른 교회들도 함께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회 준비

110. 성체 대회의 장소와 주제, 일정을 정할 때에는 그 지역 교회와 다른 교회들이 잘 검토하여, 신학 연구를 진전시키고 지역 교회의 선익을 돕는 데에 참으로 필요한 것을 찾아내야 한다. 이러한 검토를 위하여 신학, 성경, 전례, 사목 분야만이 아니라 이른바 ‘인문학’ 분야 전문가들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111. 대회를 준비하는 데에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중요하다.
ㄱ) 성체에 대한 집중적인 교리 교육, 특히 교회 안에 살아 계시고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관한 교리 교육. 이는 다양한 신자 집단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ㄴ) 거룩한 전례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하느님 말씀을 경건하게 듣고, 공동체의 형제애를 키우도록 해야 한다.
ㄷ)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범을 따라, 마땅히 현세 재화까지도 나누며 인간 발전을 촉진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사회적 활동을 펼쳐야 한다. 그리하여 현세 사회를 세우는 원동력이며 미래의 보증인 복음의 누룩이 성찬의 모든 식탁에서 부풀어 퍼져 나가야 한다. 

대회 거행

112. 성체 대회는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거행되어야 한다.
ㄱ) 성찬례 거행은 참으로 모든 활동과 신심의 중심이고 절정이어야 한다.
ㄴ) 하느님 말씀 예식, 교리 교육, 공개 토론은 제시된 주제를 깊이 탐구하고 실현하는 실천 방향을 더욱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ㄷ) 성체 신심 행사에 알맞은 성당들을 지정하여, 현시되어 있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앞에서 공동 기도나 긴 성체 조배를 할 수 있는 알맞은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ㄹ)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행렬을 하면서 공공연히 찬미가를 부르고 기도를 바치며 도시의 거리를 지나갈 때, 그곳의 사회적 종교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성체 행렬에 관한 규범을 지켜야 한다.

 

5. 에콰도르의 복음화

라틴 아메리카의 발견과 복음화는, 가톨릭 신자였던 스페인 국왕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도의 후원 아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범선들이 과나하니 섬(바하마)에 상륙하여 미래의 복음화를 알리는 의미에서 이 섬을 산 살바도르라고 부른 상징적인 날짜인 1492년 10월 12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화는 콜럼버스의 두 번째 탐험으로 신세계에 도착한 열두 명의 사제와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대목구장 베르나르도 보일 수사가 이끈 이 사제 무리는 1494년 1월 6일에 아메리카에서 첫 장엄 미사를 거행하였습니다. 이에 관한 연대기에는, 한 세기가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인류가 나아가는 길의 방향을 바꾼 라틴 아메리카 대륙의 복음화에 대한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건들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복음화 활동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에콰도르에서의 복음 전파는 아타우알파의 암살(1533년) 이후 멸망한 잉카 제국의 식민지화 과정과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군대 원목 사제들로 오늘날의 에콰도르에 도착한 프란치스코회, 자비의 메르세다리아스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의 회원들 가운데 다수는 이미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지역들에서 선교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 덕분에, 그들은 무엇보다도 키토 지역 주민들과 그들의 언어, 사회 구조, 신앙, 생활 방식, 풍습을 잘 알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장 좋은 복음화 방법이 부족 공동체 추장들인 카시케(caciques)의 자녀들부터 시작하여 토착어로 복음화하는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초기의 강압적인 어조의 의사소통은 설득하는 어조로 점차 바뀌어 나갔습니다. 곧, 신앙의 수용은 강요로 이루어질 수 없기에, 즉각적인 개종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토착민들이 자유롭게 믿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정보에 따르면, 산 프란치스코 데 키토 시의 인도-히스패닉 재단은 그러한 지역들의 교회 역사를 나타내는 준거점이 됩니다. 이 도시가 설립된 지 이 년 뒤에, 에스코리알 데 로스 안데스(Escorial del los Andes)라 일컫는 건축 단지로서 산 프란치스코의 성당과 수도원의 건설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토착민들이 소중하게 기억하는 그 장소에서, 리케 신부와 그의 동료들은 새 성당 앞 마당에 밀 씨앗을 심었습니다. 에콰도르의 비옥한 땅에 처음으로 밀 씨앗을 뿌리고, 이와 더불어 복음의 좋은 씨앗을 키토에 맡긴 것이었습니다. 

1545년에 키테나(quitena) 공동체는 리마 관구 관하의 교구로 승격되었고, 미래 본당들의 핵인 ‘독트리나스’(doctrinas)의 수가 수도회들의 활동에 힘입어 늘어남으로써 키토의 레알 아우디엔시아(Real Audiencia)의 정치적 탄생(1563년 8월 29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예수회 회원들도 복음화 활동에 동참한 다음, 식민지 교회는 산 풀겐치오 대학교와 산 그레고리오 대학교의 설립으로 이어진 학교들의 네트워크로 활기를 띠게 되었고 예술과 공예는 키토 학파의 걸작품들 안에서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표현들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복음은 그 나라의 아마존 지역까지 뚫고 들어갔습니다. 

주교들은 선교 활동을 지도하고 토착민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며 이미지와 음악과 노래를 활용하여 토착 언어로 교리 교육과 설교를 하도록 장려하고자 관구 평의회들과 관구 시노드들을 소집하였고, 주교들의 이러한 지지를 받아 복음화가 도시 환경에서부터 시작하여 빠르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대중 신심의 위대한 모자이크가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 교회의 귀중한 보화로 발전되어 나갔습니다. 

오류에 침묵하지 않으면서도, 식민지 시대에 교회가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토착민의 존엄성을 증진함으로써 ‘민족 정서의 기틀’로 여겨졌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통합과 사목적 봉사 활동의 이정표는 바로, 1812년 키테나 교회 회합의 사제들이 작성한 에콰도르 공화국 최초의 기본 헌장인 키토 교구장 주교 알론소 데 라 페나(1687 선종)의 인디오 본당 사제들을 위한 ‘여정’(Itinerary) 그리고 국립 대학교와 최초의 종합 기술 학교의 예수회 총장들이 제시한 사회적 과학적 지침입니다. 에콰도르 공화국에서는 주교들, 교구 신부들, 남녀 수도자들, 뛰어난 평신도들이 이 나라의 그리스도교적이고 문화적인 모습을 이룩해 왔고 오늘날에도 그 모습을 거듭 다져나가고 있습니다.

에콰도르의 하느님 백성은, 복음이 다양한 문화와 언어와 전통의 사람들과 풍성하게 만남으로써 이루어진 결실입니다. 그들이 살아온 신앙은 수많은 남녀의 성덕 안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눈부신 성덕을 보여 준 이들로는, ‘키토의 백합’ 마리아니타 데 헤수스(Mariana de Jesus, 1618-1645년) 성녀, ‘바바와 과야킬의 장미’ 메르세데스 데 헤수스(Mercedes de Jesus, 1828–1883년) 복자, 많은 독실한 신자를 위한 ‘니냐 나르시사’(Nina Narcisa), 나르치사 데 헤수스 마르티요 이 모란(Narcisa de Jesus Martillo y Moran, 1832-1869년), 성체성사의 순교자 에밀리오 모스코소(Emilio Moscoso, 1846-1897년) 복자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네스코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선언한 키토 시의 성당들, 눈부신 예술 작품들, 교육 기관들 안에서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유산은 가정과 사회, 공적 사적 삶에 스며들어 있는 가치들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바로, 승리와 패배에 대한 역사적 기억에서 비롯되는 지혜, 그리고 문화와 예술, 장인 정신, 축제와 휴식, 탄생과 죽음에 영감을 주는 위대한 종교적 주제들의 생생한 힘에서 우러나는 지혜입니다. 그 어떤 지독한 적대감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닌 진실한 형제애의 정신이 ‘밍가’(mingas, 전통 품앗이)의 기쁨과 열정에서, 여러 축하 행사에서, 이방인을 향한 인정에서, 어려운 시련의 때에 연대하는 마음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구세주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메리카의 이 땅에 도달하여 1874년에 이 땅이 예수 성심께 봉헌되고 기쁨과 슬픔 속에서, 살아 있는 교회라는 진정한 열매로 무르익었습니다. 이제 이 살아 있는 교회는 자신의 생명력을 제53차 세계성체대회의 거행을 위하여 전 세계 곳곳에서 키토로 오는 순례자들과 나누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원문 Pontifical Committee for International Eucharistic Congress, Basic text for the 53rd International Eucharistic Congress “Fraternity to heal the world ‘You are all brothers’ (Mt 23:8)”, 2023, 이탈리아어도 참조> 

각 언어:
http://www.congressieucaristici.va/content/congressieucaristici/it/Quito2024/DOCUMENTOBASE.html




< 내용출처 - 한국천주교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  https://cbck.or.kr/Notice/20242171?gb=K12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