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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방송“천주학 평등사상, 조선 뒤흔들어… 정약용은 배교후에도 신앙생활”

작성자 : 문화홍보국 작성일 : 2022-08-09 조회수 : 146

“천주학 평등사상, 조선 뒤흔들어… 정약용은 배교후에도 신앙생활”



정민 한양대 교수가 지난 1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 연구실에서 최근 출간한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선규 선임기자


■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출간한 정민 교수


정조시대 남인 내부 분열 불러
되레 세도정치 날개 달아준 셈

천주교도 지식인들 탄압 피하려
배교 철저히 가장하고 기록삭제

종교 태동기부터 신유박해까지
순교·박해로 가려진 역사 추적


“서학이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그동안 너무 과소평가됐다. 서학을 빼놓고는 조선 후기 사회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정민 한양대 교수의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김영사)는 1770년대 중반 서학 태동기부터 1801년 신유박해까지 초기 천주교회 역사를 집대성한 학술서다. 서학은 조선에 전파된 서양사상과 문물을 포괄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가톨릭을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천주학’을 지칭한다. 책은 연대기순으로 전개되는 통사가 아닌 사건 중심의 모자이크식 서술을 통해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학이 조선에 끼친 영향을 탐구한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고전학자인 정 교수는 철저한 고증을 토대로 “서학은 단순한 종교나 학문을 넘어 조선 후기 정치·사회 변화의 핵심 동인이었다”고 말하며 ‘순교’ 또는 ‘박해’로 이분화된 역사 해석에 입체성을 불어넣는다. 아울러 ‘다산 정약용 권위자’로서 정약용이 배교(背敎) 이후 신앙생활을 지속했다는 증거도 발굴해 제시한다. 정 교수는 다산의 청년기와 천주교 신앙 문제를 다룬 ‘파란’ 집필에 이어 천주교 수양서 ‘칠극’을 번역하면서 서학의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지난 1일 전화로 만난 정 교수는 “조선 후기 남인 내부의 첨예한 갈등 한복판에 서학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조는 80년 만에 남인 출신으로 재상에 오른 채제공을 중심으로 노론이 장악한 정국에 변화를 주려 했다. 남인들이 세력을 키워 노론의 대항마로 부상하면 당파를 초월한 개혁 정치가 가능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남인은 서학 추종 여부를 놓고 채제공 친위세력인 ‘채당’과 반(反)채제공 전선인 ‘홍당’으로 분화됐다. 채제공은 천주교도가 아니었지만, 채당 안에는 다산 정약용을 비롯해 천주학에 심취한 이가 많았다. 홍당은 ‘적(敵)의 적’인 노론과 손을 잡고 채당의 서학 문제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남인 내부의 분열로 정조의 정국 구상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중심 세력이 무너지면서 노론이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극소수의 권세가를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가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서학과의 접촉이 조선의 긍정적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 되지 못하고 위정척사의 명분 아래 세도정치에 날개만 달아준 셈입니다.”

조선 후기 많은 지식인은 평등사상이 핵심인 천주학에서 신분제 타파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들은 성리학적 질서를 내세운 국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배교를 가장하거나 기록에서 서학 관련 내용을 삭제했다. 정약용 역시 그런 지식인 중 한 명이었는데, 책은 다산이 배교 이후에도 신앙생활을 이어갔다는 정황을 보여준다. ‘조선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평가받는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조상의 신주를 태워 없애고 제사를 거부한 진산 사건으로 참수를 당했다. 윤지충의 고종사촌인 정약용은 이 사건 이후 제사를 거부하는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배교를 선언했다. 하지만 정 교수는 지난해 발굴된 윤지충과 권상연의 무덤에서 나온 지석 사발에 적힌 글씨를 정약용의 생전 필체와 분석한 뒤 “정약용이 윤지충 묘(墓)의 사발 글씨를 썼다”고 주장한다. 탄압을 피하기 위해 공식적으로만 배교를 선언했을 뿐 물밑에선 천주교인으로 적극 활동했다는 것이다.

이승훈의 문집 ‘만천유고’ 중 ‘만천시고’. 김영사 제공



이와 함께 정 교수는 다양한 기록을 교차 검토해 1795년 중국에서 온 주문모 신부가 밀고로 체포될 위기에 놓였을 때 재빨리 이를 알려 신부를 피신시킨 장본인이 정약용이었다는 사실도 밝혀낸다. “정약용은 배교 선언 뒤 문집과 기록에서 자신이 천주교도임을 철저히 숨겼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던 셈이죠. 정약용뿐 아니라 당시 천주교에 빠진 지식인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였습니다. 자료의 표면에 드러난 문맥만으로는 진실을 포착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훼손된 유심칩을 복원하듯 여러 자료를 겹쳐 봐야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책은 천주교계가 민감히 여기는 논쟁적 사안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주장을 편다.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이승훈의 문집 ‘만천유고’가 남의 글을 거칠게 모아 짜깁기한 가짜 책이라거나 정약용 형제와 교분을 맺으며 천주교를 받아들인 김범우의 유배지가 밀양 단장이 아닌 충북 단양이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이 때문에 천주교 일각에선 반발하는 움직임도 있지만, 정 교수는 “팩트에 어긋나는 역사 서술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일축했다. “천주교도와 교회사가들은 종교 바깥에 선 ‘외부자’의 시선으로 천주교 역사를 살피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하지만 서학이 조선에 남긴 영향을 총제적으로 규명하려면 내부자도, 외부자도 아닌 중간자적 시선이 필요합니다. 어느 한쪽을 대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을 밝힌다는 마음으로 연구에 매진할 뿐입니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문화일보 원문보기: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22080801032312348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