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화해의 탑' 제막식(사진=오충윤 독자위원)
‘신축항쟁 화해의 탑 제막식’이 16일 하논성당 터에서 열렸다.
천주교 측에서는 제주교구장 문창우 주교를 비롯해 성직자, 수도자, 남부지구 성당 회장단 등이 참석했다. 그리고 신축항쟁기념사업회 송재호 공동대표 등이 참석했다.
화해의 탑은 신축교안 120주년을 맞아 지난 5월 당시 민란군의 주둔지이자, 천주교 희생자들의 묘역이 있는 황사평 성지에 세워졌다. 16일에는 신축교안의 또 다른 발원지인 하논성당 터에 화해의 탑이 추가로 건립됐다.
조선에서 19세기는 민란의 시대였다. 1811년 홍경래의 난과 1862년 임술민란, 1894년 동학농민형멱 등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제주도에선 1862년 강제검의 난과 1898년 방성칠의 난에 이어 1901년에 제주민란(이재수의 난, 혹은 신축교안, 신축항쟁 등으로 불린다)이 발생했다.
조선의 천주교는 대원군 시대까지만 해도 많은 박해를 받았는데, 1886년 조선과 프랑스가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후 비로소 포교의 자유를 찾았다. 이후 천주교가 선교를 펼치는 과정에서 토착민과 충돌이 자주 발생했다.
탐관오리의 횡포와 과다한 화전세 징수 등에 불만을 품던 민중인데, 천주교라는 외래종교와 결등이 격화되면서 민심은 폭발했다. 민란의 규모가 전례에 없을 정도로 컸다는 특징이 있다.
1901년 5월 5일 대정현에서 봉세관의 조세 수탈과 천주교인들의 횡포에 저항한 민회(民會)가 열리면서 항쟁은 시작됐다. 이후 성난 민중은 제주성을 점거하고 신자들에게 피의 보복을 감행했다. 프랑스 군함이 해상에 출동하고 조정에서는 군대를 파견하고 6월 11일에서야, 민란은 진압됐다.
이 민란 과정에서 천주교인 309명(성당 신자 216명)과 민군 8명이 희생되었다고 공식 기록되어 있으며, 이재수의 난, 제주신축항쟁, 제주민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천주교에서는 신축교안이라 부른다.
천주교 제주교구와 신축항쟁 120주년 기념사업회는 화해의 탑에 공동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다.
‘이곳 하논 본당은 신축교안 전후 배경안에서 제주도민과의 충돌의 소용돌이에 있던 소중한 역사적 장소입니다. 신축교안 120주년을 맞아 다시금 과거 제주 역사 안에서 발생한 일에 대한 우리의 성찰과 서로간의 참된 화해와 상생의 마음을 기억하며 화해의 탑을 여기 세웁니다.’
화해의 탑에는 교회가 민란의 원인에 대해 깊이 성찰하면서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진정한 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가자는 의미를 담았다.
장태욱 taeuk30@hanmir.com
출처 : 서귀포신문(http://www.seogwip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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