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다닐 때 기독교 동아리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동아리는 해방신학에 바탕을 두고 학생운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소외된 이들을 위해 싸웠던 인간 해방의 혁명가로 보더군요. 또다른 기독교 동아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인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온 구세주로 봤습니다. 학생 운동보다는 선교와 개인적 기도와 신앙 활동에 집중하는 편이었습니다.
졸업을 하고 나니까 사회에도 두 진영이 있더군요. 천주교는 주로 정의구현사제단이 그 역할을 합니다. 사회적ㆍ정치적 이슈에 대해 진보적인 목소리를 냅니다. 개신교에도 진보 진영이 있습니다.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NGO 단체들이 여러 이슈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내며 진보를 자처합니다.
이에 맞서는 보수 진영도 물론 있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입니다. 바깥 세상보다는 개인의 내면에 더 무게 중심을 두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군사 정권 하에서는 침묵만 지키거나, 오히려 정권에 동조했다며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반면 기독교 진보 진영은 보수 정권 하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진보 정권이 들어서면 침묵만 지킨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어느새 ‘정권의 2중대’로 전락했다”는 비판과 함께 말입니다.
진보와 보수, 두 진영에서 바라보는 예수는 다릅니다. 좌파에서는 예수의 왼쪽 얼굴만, 우파에서는 예수의 오른쪽 얼굴만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그게 예수의 전부야”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보는 것만 예수야, 당신이 보는 건 예수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저는 참 궁금합니다. 정작 예수는 어땠을까요. 예수는 “나는 왼쪽이야”라고 말한 적도 없고, “나는 오른쪽이야”라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좌파의 예수’라고 한 적도 없고, ‘우파의 예수’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시작이자 끝이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나는 가장 높은 자요, 가장 낮은 자다.” 저는 여기에 답이 있다고 봅니다. ‘예수의 눈’이 위치한 장소가 바로 여기라고 봅니다.
동양 종교에서는 진리를 가리킬 때 한자로 ‘중(中)’자를 씁니다. 그런 진리를 유교에서는 ‘중용(中庸)’이라 부르고, 불교에서는 ‘중도(中道)’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교도 출발은 서양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태어난 이스라엘은 중동입니다. 영어로도 ‘중동(Middle East Asia)’은 아시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아시아에서 태동한 종교입니다.
서양에서는 이원론을 말하지만, 동양에서는 일원론을 말합니다. 이원론은 선과 악으로 세상을 쪼개지만, 일원론은 쪼개진 선과 악을 하나로 합합니다. 예수 역시 이원론을 설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일원론을 말했습니다.
가령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경부선 철도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도(中道)는 어디쯤일까요? 사람들은 대부분 “대전이나 대전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라고 답합니다.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그건 서울과 부산을 둘로 쪼개는 기계적인 중도입니다. 이분법적인 중도입니다. 예수의 일원론, 예수의 중(中)은 그런 중도가 아닙니다.
그럼 어디일까요? 서울이 출발역이고 부산이 종착역이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예수의 중(中), 예수의 눈은 어디쯤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예수의 중(中)은 경부선 철도 전체입니다. 다시 물어봅니다. 남과 북이 있습니다. 예수의 중(中)은 어디일까요? 맞습니다. 남한도 아니고 북한도 아닙니다. 답은 한반도 전체입니다.
예수의 가슴은 이처럼 넓습니다. 포용적입니다. 조화롭습니다. 전체를 생각하고, 전체를 살립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의 눈’을 봅니다. 좌파나 우파에 함몰되지 않는, 거대한 그리스도의 눈을 봅니다.
우리 사회 그리스도교의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진영의 눈’을 허물고 ‘예수의 눈’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의 눈' 아니라 '예수의 눈'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