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민 택 칼 럼 ] ‘ 테 스 형 ’ 과 함 께 외 치 는 철 학 을 위 한 항 변
지난 학기 때 ‘그리스도교 철학’이라는 과목을 처음 맡았다. 전공이 기초신학인 필자는 다양한 철학 사조를 접할 기회가 많기에, 학교로부터 이 과목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선뜻 응할 수 있었다.
강의를 수강한 분들은 신학을 공부하는 일반 신자들이셨다. 대부분 철학이란 학문을 처음 접했기에, 일반 철학도 아닌 ‘그리스도교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함께 암중모색하는 마음으로 임했지만, 학기말에 이르러서는 평소에 접할 수 없는 학문을 접했다는, 평소에 던지지 못했던 철학적 물음을 마주할 수 있었다는 만족감을 표현해 주셨다.
지금 시대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철학의 위기’ 시대라고 하면 많이 공감할 듯하다. 그만큼 철학의 위상이 땅에 떨어져 있다. ‘철학’ 하면 대부분 ‘철학관’을 떠올린다. 대학교에서는 취업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철학이 외면당한 지 오래다. 그런데 학문만이 아닌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이 인간을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게 한다면, 철학을 외면하는 문화적 흐름은 반드시 인간 자신의 위기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최근 철학에 다시 불을 붙인 노래가 있으니 바로 가수 나훈아 씨의 ‘테스형’이다.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아폴론 신전에 새겨져 있던 문구인 ‘너 자신을 알라’를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무지를 자각하라는 뜻으로 가르쳤다.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이 철학자에게는 보편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여정의 출발점이었다.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이 과학기술 혁명 시대에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결국은 철학적 질문들 앞에 설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가톨릭 신학 과정에서 철학은 필수적이다. 신학이 오랫동안 철학과 대화를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대마다 사람들이 던지는 인간 존재와 진리에 관한 물음을 도외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완성품으로 제공되는 소비 시대를 살고 있다. 원하기만 하면 그 욕구의 대상을 ‘사서 소비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형화된 답에 익숙해진다. 이는 ‘영지주의’(구원은 인간 안에 있는 신성의 ‘인식(영지)’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상)라고 부르는 고대 사상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사람들은 철학적 물음을 던지기 보다는, 이미 정해진 답, 진리를 인식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잃는 것은, 물음을 던지며 찾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이다.
전임 교황인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현대의 영지주의적 흐름을 경계하며 철학의 필요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앙이란 결코 철학을 위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영지에 대한 전적인 요구에 대항하여 철학을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철학을 지켜줍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철학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철학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묻고 찾는 인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을 가로막는 것은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이상 묻기를 원치 않으며, 진리란 도달할 수 없거나 추구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폐쇄성인 것입니다."(1984년 미네소타 주 성 토마스 대학에서 행한 강연 중)
인간은 철학적 물음을 던지는 존재이며, 물음을 던지는 것에서 인간의 위대함이 드러난다. 인간이 철학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다움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물음을 던짐으로써, 궁극적 의미를 추구함으로써, 인간은 그 자리에 멈추지 않고,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고, 시스템의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고, 살아 있고 유일무이한 역사를 실현해가며 발전하는 존재가 된다.
한민택 수원가톨릭대학교 교무처장 겸 대학원장
출처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http://www.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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