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창우 주교, 제5대 제주교구장 승계…첫 지역 출신 탄생’.
지난 11월 8일자 가톨릭신문 1면 톱 제목입니다. 여기서 ‘첫 지역 출신 탄생’이란 구절이 눈에 띕니다. ‘첫 지역 출신’이라니, 무슨 뜻일까요? 마찬가지로 지난 11월 21일 새 춘천교구장으로 김주영 신부가 임명됐을 때 현 김운회 교구장이 발표한 교구민에게 보낸 서신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80여년 교구 역사 안에서 처음으로 교구 출신 신부님께서 교구장 주교가 되셨다.” 새 제주교구장과 춘천교구장이 지역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문창우 주교는 제주교구의 제 5대 교구장입니다. 그 앞의 4대 교구장까지는 외지인이란 뜻이지요. 제주교구의 역사를 살펴보면 1971년 광주대교구에서 제주지목구(知牧區)로 나뉘면서 현 하롤드(1909~1976) 대주교가 초대 교구장을 맡았지요. 현 하롤드 대주교는 미국 출신의 성 골롬반회 선교사로 한국에 왔던 분으로 제주교구장 이전에는 광주대교구장을 지냈습니다. 이후 1977년 박정일 주교, 1984년 김창렬 주교, 2002년 강우일 주교가 차례로 교구장을 맡았습니다. 박정일~강우일 주교는 서울대교구(평양교구 포함) 출신이었죠. 그러다가 이번에 드디어 제주교구가 고향인 문창우 주교가 교구장이 된 것이지요. ‘외국인 주교-타 교구 출신 한국인 주교-지역 출신 주교’의 과정을 거친 제주교구의 사례는 한국 천주교가 걸어온 길을 보여줍니다.

신문사에서 종교 담당을 맡게 되면 낯선 용어 때문에 처음엔 좀 애를 먹습니다. 천주교에서 쓰는 ‘방인(邦人)’이란 용어도 그렇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그 나라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천주교는 한국인에 의해 자생적으로 시작됐지만 교회 제도는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만들어졌지요. 그러다 보니 외국인 입장에서는 ‘방인’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겠지요.
천주교 역사에서 처음 한국 선교를 맡은 것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였습니다. 1831년 당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대목구(朝鮮代牧區)를 설정하고 파리외방전교회에 선교와 사목을 맡깁니다. 초대 대목구장으로 브뤼기에르(1792~1835) 주교가 임명됐지만 조선에는 부임하지도 못하고 중국에서 병사했지요. 이후 일제시대인 1942년까지 조선대목구장(서울대목구장)은 파리외방전교회 사제가 맡았습니다. 그러다 1942년에 최초의 방인 교구장으로 노기남 대주교가 임명되지요.
신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 조선대목구는 계속 분리됩니다. 1911년 대구대목구가 가장 먼저 분리됐지요. 1920년에는 함경도와 간도를 담당하는 원산대목구, 1927년 평양지목구(知牧區), 1928년에는 황해도를 관할하는 감목(監牧)대리구, 1934년 전남 감목대리구 등이 분리됐습니다.
한국의 천주교가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외국의 여러 전교수도회가 한국에 들어옵니다. 독일 오틸리엔수도원에서 파견된 분도회(베네딕도회)는 원산과 함경도, 미국에 본부를 둔 메리놀회는 평안도, 아일랜드 출신의 성골롬반회는 전라도를 각각 선교 지역으로 맡았지요. 서울과 대구는 파리외방전교회가 담당했고요. 그 영향은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메리놀회는 평안도를 맡았다가 일제에 의해 쫓겨났지요. 태평양전쟁 때문입니다. 미국과 일본이 맞붙어 싸우게 되자 일제는 1942년 메리놀회 회원 전원을 추방했습니다. 성골롬반회도 마찬가지여서 1941년 일제는 미국, 호주, 뉴질랜드 출신 회원들은 다 추방했습니다. 반면, 2차대전 일본, 이탈리아와 함께 같은 추축국(樞軸國)이었던 독일 출신 베네딕도회는 좀 달랐습니다. 베네딕도회는 1945년 광복 후에도 덕원(원산 인근) 수도원을 유지하다가 6·25전쟁 직전 공산군에 의해 해산되고 수도자들이 만주까지 끌려가는 고초를 겪었지요.
어쨌든 일제시대에 한국에 온 외국의 수도회는 태평양전쟁과 6·25를 거치며 일단 모두 철수했습니다. 그러다가 종교의 자유가 회복되자 한국으로 돌아왔지요. 철수 전의 선교지로 돌아온 것은 성골롬반회였습니다. 평안도를 근거로 했던 메리놀회는 청주, 함경도 기반의 베네딕도회는 왜관에 정착했지요. 서구 선교회의 한국 지역 분담의 사례는 천주교 원로 정의채 몬시뇰의 케이스만 봐도 분명합니다. 평북 정주 출신인 정 몬시뇰은 이 지역을 담당하던 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님을 보고 사제의 길을 선택한 후 베네딕도회가 운영하던 덕원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공산군에 의해 신학교가 문을 닫자 월남해 피란지 부산에서 공부를 마치고 사제가 됐습니다.

이후 한국 천주교의 교구가 나뉠 때에도 그 영향이 남았습니다. 성골롬반회는 광주대교구, 메리놀회는 청주교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교구장도 맡게 됐습니다. 광주대교구는 1971년 한공렬 대주교 이전, 청주교구는 1970년 정진석 주교 이전까지는 각각 성골롬반회, 메리놀회가 교구장을 맡았습니다. 그렇다면, 파리외방전교회는 언제까지 교구장을 맡았을까요? 아는 분도 계시겠지만, 전(前)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가 마지막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교구장 주교였습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한국에 올 때 항상 ‘어서 방인(邦人) 사제, 주교를 양성해서 사목하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 나라 사람’이 양떼와 함께 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 결과, 1970년대를 전후해 많은 교구에서 한국인 교구장이 탄생했고, 2002년 인천교구장이 미국 메리놀회 출신 나길모 주교에서 최기산 주교로 바뀌면서 모든 교구의 교구장을 방인이 맡게 됐지요.

한국 천주교의 그 다음 과제는 ‘교구 출신 교구장’이었습니다. 이또한 서서히 채워졌지요. 2010년 광주대교구장에 전남 목포 출신 김희중 대주교가 착좌하면서 서울대교구, 대구대교구를 포함해 3곳의 대교구장을 모두 지역 출신이 맡게 됐습니다. 이후에도 의정부교구, 춘천교구, 제주교구 등은 서울대교구나 광주대교구 출신 주교가 교구장을 맡아왔습니다만 이제 제주교구, 춘천교구도 각 고향 출신이 교구장을 맡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후 230여년, 1831년 최초로 조선대목구가 설정된 후로는 거의 190년만에 외국인 주교, 방인 주교를 거쳐 이젠 지역 출신 주교로 바뀌는 것이 큰 흐름이 됐습니다. 또 1970년대생 주교들이 탄생하고 있다는 점도 최근의 추세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교구에 교구장으로 전보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대부분은 선종(善終)할 때까지 그 교구에서 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뼈를 묻는 것’이지요. 외국인 사제가 한국에 파견될 때 ‘한국에서 선종하는 것’으로 생각하듯이요.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서울대교구 출신 정진석 추기경은 청주교구장으로 있던 중 김수환 추기경 후임으로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돼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대부분 주교는 발령받은 교구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두봉 주교는 안동교구, 서울대교구 출신 윤공희·최창무 대주교는 광주대교구 내에 거처를 마련하고 은퇴 후에도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제주교구장에서 퇴임한 김창렬·강우일 주교도 제주도에서 살고 있지요. 지난 8월 선종한 전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 역시 서울대교구 출신이지만 춘천교구장에 임명된 후 춘천으로 거처를 옮겼고, 은퇴 후에도 춘천에 살다 그곳에서 선종했습니다. 천주교 사제들이 교황청의 지시에 순명(順命)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