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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방송[전라도 섬을 가다]일제 만행·한센인 한 서린 고흥 소록도

작성자 : 문화홍보국 작성일 : 2020-08-04 조회수 : 515

[전라도 섬을 가다]일제 만행·한센인 한 서린 고흥 소록도
<36>역사를 품은 섬-소록도
녹도 아래 있는 작은섬…조선시대 국가 말 사육 목장 역할
문둥병자 유언비어 퍼뜨려 보호심리 자극…통치수단 활용
학대·강제노역·불임수술 등 자행…"다크투어 공간 조성해야"


2020. 08.03(월) 17:53



녹동항에서 바라본 소록도의 모습
반인륜적 격리와 차단이 자행됐던 소록도 입구의 수탄장
검시실 건물
소록도에서 바라본 녹동항
소록도의 천사라고 불리는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수녀를 위한 기념관이 녹동에 세워지고 고흥군을 중심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을 청원하는 각계각층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소록도를 나타내는 붉은 사슴이 그려진 벽화
일제의 만행을 그대로 보여주는 해부실



전남지역에는 모두 2165개의 섬이 있다. 이 가운데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은 279개이며, 소록도는 가장 ‘서글픈 섬’이라고 할 수 있다. ‘사슴의 사는 작은 섬’이라는 뜻의 소록도가 어떻게 애달픈 섬이 됐을까.


소록도(小鹿島)는 오랜 역사를 가진 섬이다. 고흥반도 끝단의 녹도와 구별하기 위해 이름 붙여진 것이 소록도이다. ‘녹도 아래 있는 작은 섬’이라는 뜻이다. 우리 역사에서 녹도는 아주 신성한 이름이었다. ‘삼국사기’에도 뿔이 하나인 사슴이 잡힌 지역으로 거론되고 사슴은 하늘의 뜻을 전하는 사자로서 용(龍)의 뿔도 사슴뿔일 정도로 신성시하는 동물이다. 1406년부터 녹도라는 이름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며,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방어시설로 녹도진이 설진됐다.


또한 1726년 ‘승정원일기’에는 “사나운 호랑이가 소록도 목장에 들어와서 연일 말을 물어 죽이자, 흥양 현감이 포수로 하여금 총을 쏘게 해 역시 붙잡았습니다”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소록도는 사람이 사는 섬이 아닌 국가의 말을 키우는 목장이었다. 그리고 군사적 필요에 부응한 소록도는 녹도진에서 직접 관할했으며 임진왜란 때 절이도와 함께 그 역할을 확실하게 했다.


전라도의 평화로운 섬 소록도가 가장 애닯고 서글픈 섬이 되기까지는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에서 시작됐다. 바로 ‘문둥이’에서 시작된 차별과 억압과 폭력, 감금과 강제노동의 대명사가 되면서부터이다. 나라에 풍년을 가져다주는 하늘의 뜻을 전하는 사슴이 산다는 소록도가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에 의한 우생학적 황국신민을 강요하면서부터 비극은 시작됐다.


문둥병의 역사는 오래됐다. 우리 역사에서 나환자들은 별 탈 없이 일반인들과 혼합돼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지도 않았다. 세종실록이나 광해군일기에 문둥병(癩疾)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문둥이들이 사회문제를 야기했다는 기록은 없다. ‘동의보감’에서도 대풍창(大風瘡)이라고 해 치료법을 소개하고 있을 정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그리고 치명적이지 않는 질병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의료시설이 형편없다고 하는 사회에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질병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산림경제, 의림촬요, 의방유취 등에서도 치료법까지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문둥병을 군국주의 논리인 대동아공영권의 정당성을 입증시키는 방편으로 이용했다.


한반도에서 문둥이 소동을 일으켜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사람은 격리하고 차단하는 것이 옳다고 강요하는 비인간적 지배논리였던 것이다. 명분상으로는 문둥병자들을 격리 차단해 질병을 치료한다고 했지만 당시 언론을 통해 문둥이가 사람을 잡아먹는다, 간을 빼먹는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 소동을 일으키고 사람들에게 보호심리를 일제에 기대게 하는 도구로 이용한 것이다.


나병에 걸리면 얼굴이나 코와 귀, 손 등의 형체가 ‘문들어진다’고 해 ‘문둥이’라고 했다. 1873년 노르웨이 의학자 ‘한센’이 대풍창은 유전적으로 전해지는 질병이 아닌 한센균에 의한 전염병임을 알아냈고 이후 그의 이름을 따서 한센병으로 명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국내에서는 지난 2000년부터 개정된 ‘전염병 예방법’에서 ‘한센병’이라 했다. 지금도 경상도에서는 일종의 친한 사이의 표현으로 ‘문디가시나’, ‘보리문둥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국가무형문화재 제6호인 통영오광대놀이에서는 문둥이양반이 등장해 놀이로 이용될 정도로 일제 이전까지는 문둥이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동정적이었다.


그러나 소록도는 차별과 인권유린의 장소였다. 이청준의 소설 속에서 표현되듯 ‘그들만의 천국’이었을 뿐, 나환자에게는 비극과 고통의 장소였다. 마치 살인을 하고 인육을 먹는 범죄자로 낙인 찍고 또한 그러한 것을 막고자 하는 일제는 천국을 만드는 사람으로 격상시킨 하나의 상징으로 소록도는 전락했다. 연일 당시 언론에서는 문둥이에 대한 공포를 조장했으며 소록도는 천국, 낙토 이상향으로 포장됐다.


야만과 차별로 ‘천국’이라는 성을 쌓은 소록도, 한센인에게는 고난과 고통과 아픔과 눈물의 섬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라져 갔다. 일제의 만행이 그대로 드러나는 눈물의 섬이었다. 소록도는 병을 치료하는 공간이 아닌 일제가 공포를 조장, 비인간적인 격리와 반인륜적 폭거를 자행한 공간이었다. 일제의 지배와 압제를 정당화하는 선전도구로 소록도를 이용했다. 한반도에 설치한 731부대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한센인을 격리수용할 장소로 소록도가 선정됐고, 자혜의원이 1917년 개원해 환자 73명을 수용하면서 시작됐다. 문둥이 소동 속에서도 1927년까지는 250명 수준을 유지하다가 1931년 만주사변과 함께 800명대로 증가하고 1937년 중일전쟁에는 4793명, 1940년 태평양전쟁 발발 시에는 6136명까지 폭증했다. 국가총동원령을 시행하고 한센인들을 전쟁물자 생산에 강제노역시키고, 개인당 국방헌금으로 217엔, 장병위문금으로 49엔을 염출했다. 일제는 이들을 보호하고 치료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감금 수탈하고 강제노역을

시켰던 것이다.


조그마한 섬에 6000명을 격리 차단시키고 반인간적, 반인륜적 온갖 만행을 자행했다. 감금, 학대, 징벌, 강제노역, 강제불임(단종)수술, 전쟁물자헌납, 신사참배강요를 자행하는 수용소로 전락했고 인권유린과 살인, 대규모 학살도 이뤄졌다.


일제패망 이후 소록도 수용자수는 1947년 6254명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한다. 1962년 ‘우리들의 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오마도 간척공사 이후 감소하기 시작, 1997년에는 985명으로 줄었으며, 100년이 지난 2017년에는 519명으로 줄었고, 앞으로 20년이면 한센인은 소록도에서 사라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1984년 로마교황이 방문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간호사가 소록도의 어려운 소식을 듣고 찾아와 2005년까지 봉사했다. 마리안과 마가렛 수녀이다. 현재 소록도의 천사라고 부르면서 두 수녀를 위한 기념관이 세워졌고 또한 고흥군을 중심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을 청원하는 각계각층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거룩한 희생정신으로 봉사한 두 수녀의 아름다움은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소록도에서 인권유린을 당했던 한센인들이 2004년 8월 16일 일본 정부를 상대로 도쿄지방재판소에 보상청구소송을 제기해 한 번의 패소 후, 2006년 3월부터 2016년 5월 12일까지 약 10년에 걸쳐 지루한 소송을 이어가던 중, 소송인 590명 전원이 각 800만엔을 보상받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2017년 2월 15일 우리 대법원에서도 한센인 단종·낙태조치에 대한 국가배상 판결이 확정됐다.


일제에 의해 시작된 소록도의 흑역사는 끝났다. 이제는 전라도의 아픈 섬이 아니라 치료를 빙자해 인권유린과 강제노역을 자행한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 다크투어(dark tour)라는 세계문화유산적 관점에서 소록도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광남일보
원문보기: http://www.gwangnam.co.kr/read.php3?aid=1596444791362687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