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헌신하고 기도하며 ‘큰 사랑’ 남기고 떠난 어머니
2020년 07월 13일
정계영(1929~2019)
경기 양평에서 태어나신 어머님은 아버님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시집은 강원 횡성의 갑천. 지금은 고속도로로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강원도 두메산골. 여기서 대가족의 맏며느리로서 집안을 모두 챙겨야 하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셨습니다. 6·25전쟁을 맞아 서울에서 피란 온 일가친척을 돌봐야 하는 막중한 책임까지 떠안으셨습니다. 어머님은 묵묵히 이 어려움을 이겨내며 가족의 버팀목이 돼주셨습니다.
늘 지아비를 그리워하며 6남매를 사랑으로 키워주셨습니다.
어머님은 자식 교육을 위해 1964년에 서울로 향했습니다. 정착한 곳은 서울역 뒤의 만리동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어머님은 6남매를 홀로 키우셨습니다. 당시 농협에 근무하셨던 아버님은 3년마다 발령을 받아 전국 각지에서 객지 생활을 하셔야 했습니다. 어머님은 날마다 아버님 저녁 진지를 아랫목에 따뜻하게 준비해놓고, 오실지 알 수 없는 아버님을 만리동 고갯마루에서 늘 기다리다 돌아오셨습니다. 청상 아닌 청상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시면서 중풍으로 쓰러지신 시아버님까지 돌보셨습니다.
아들의 석방을 위해 ‘투사’의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아들인 저는 민주화운동으로 오랫동안 수배를 당하고 긴 옥고를 치렀습니다. 셋째 아들 역시 국가보안법으로 두 차례나 투옥됐습니다. 어머님에게 고통이 극심했던 시기는 1986년 12월이었습니다. 저와 저의 아내 목혜정이 국가안전기획부에 연행되던 때였습니다. 아침이면 남산으로 면회를 오시고 낮에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서 “민주특사 석방!”을 외치며 농성을 하셨습니다. 열 명이나 되는 손주 하나하나에게 사랑과 정성을 쏟으셨습니다. 우정, 철희, 주현, 원재, 호석, 경희, 성원, 유나, 건우, 호준. 모두 사랑스러운 당신의 손주들입니다. 어머님은 손주들에게 한없이 푸근한 치마폭이었고 훈훈한 온기였습니다. 그 따뜻함을 받아 손주들은 모두 늠름한 모습으로 자라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청년으로서 우리 시대의 아픔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6·25전쟁 중에 실종되신 당신의 아버님을 찾아 서울까지 오셨습니다. 그때 운명처럼 명동성당에서 성모마리아 상을 보고 천주교에 귀의하셨습니다. 이후 가르멜재속회, 전교회, 울뜨레아 활동을 하면서 늘 기도하고 온 가족을 신앙생활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덕분에 집안에서 수도자가 배출되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투병 생활 속에서도 기품을 유지하고 큰 사랑을 남겨주셨습니다. 어머님은 아들이 투옥된 뒤 당뇨병을 앓으셨습니다. 30여 년 몹쓸 병은 어머님을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게 했습니다. 2015년부터는 삼육병원 내 요양원에서 휴식과 투병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지아비에 대한 걱정, 자식들에 대한 염려, 손주들을 위한 기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님은 희생하는 삶, 기도하는 삶을 보여주고 떠나셨습니다. 저희 자손들은 어머님의 가르침을 늘 새기며 살아가겠습니다.
민병두 전 국회의원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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