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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성인 교황님(요한 23세, 요한 바오로 2세)

작성자 : 홍기선 작성일 : 2014-05-14 조회수 : 1903

평화의 사도, 보편 교회의 목자
- 요한 23세-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삶과 업적 -

□ 요한 23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삶

오는 2014년 4월 27일 시성식을 갖고 성인품에 오를 두 교황의 일생을 간략히 소개한다.

요한 23세(1881-1963, 재위 1958-1963, 본명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북부의 시골 마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제품을 받은 뒤 제1차 세계대전 때 군대에 징집되어 전쟁을 겪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교황청 외교관으로 일하며 유다인들의 희생을 막으려 노력했다. 소박하고 유쾌한 성품으로 신자들에게 사랑받았고, 교황직 중심의 경직된 교계제도를 완화했으며, 미국-소련의 냉전 중재와 종교 간 대화에 힘썼다. 교황 최초로 1962년에 타임(TIME)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으며, ‘착한 교황’(이탈리아어 il Papa Buono)이라는 애칭으로 유명하다. 2000년 9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 재위 1978-2005, 본명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 폴란드)는 하드리아노 6세 이래 456년 만의 비이탈리아인 교황이자 최초의 슬라브인 교황이다. ‘순례하는 회칙’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그는 교황직에 있었던 26년 5개월 동안 104회 129개국을 방문했다. 젊은 시절 연극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외향적인 성격과 인상적인 몸짓, 열정적인 연설로 가는 곳마다 뜨거운 화제를 모았다. 평화의 사도로 전 세계를 돌며, 방문 국가의 현실에 맞갖은 주제들을 환기함으로써 정의와 평화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원칙을 집대성했다. 2011년 5월 1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회의 장면.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행사에 참석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 다른 듯 닮은 두 성인 교황

한 날 한 시에 성인품에 오를 두 교황의 면모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 요한 23세는 오랜 관례를 잇는 이탈리아인 교황이었고,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드리아노 6세 이래 456년 만의 비非 이탈리아인 교황이자 최초의 슬라브인 교황이었다. 요한 23세는 77세의 고령에 교황으로 선출돼 5년간 재위했고, 요한 바오로 2세는 불과 58세에 교황으로 뽑혀 26년간 재위했다.

이렇듯 대조적인 두 사람의 면모에도 공통점은 있다. 두 인물 모두 세계 평화를 이루고 가톨릭교회가 세계 속의 명실상부한 ‘보편 교회’로 거듭나는 데 이바지했다는 점이다.

평화의 사도로서 요한 23세의 면모는 회칙 <지상의 평화>(1963년)에서 드러난다. 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몸소 겪었다. 그런 그가 위암으로 투병하며 유작처럼 남긴 이 회칙은 세계 평화의 기초인 인간의 권리와 의무, 정치-국제 공동체 안에서 인간과 공권력의 관계, 힘의 균형을 위해 지켜야 할 원리, 세계 평화 건설을 위해 가톨릭 신자들이 해야 할 일들을 제시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평화주의자들의 필독서로 사랑받고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세계 곳곳의 분쟁과 갈등 지역을 직접 방문하거나 외교 문제에 관여하는 식으로 평화에 대한 의지를 표현했다. 1983년에는 내란으로 분열된 중앙아메리카를 방문해 비폭력적 해결책을 촉구했고, 1990년에는 소비에트연방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르완다 내전과 중동 걸프전에 강한 우려를 표하며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두 차례 한국 방문 역시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에 평화를 촉구하는 행보였다.

두 교황 모두가 세계 속에 가톨릭교회의 보편적 성격을 각인시켰지만, 방법은 달랐다.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해 세계의 주교들을 로마로 불러 모았고, 세계의 목소리를 들으며 교회의 개혁을 준비했다. 후임자인 바오로 6세를 통해 마무리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교회가 세상과 소통하며 시대와 발맞추는 교회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위원회의 일원으로 총 4회기에 모두 참석했으며, 교황 선출 직후 추기경단과 함께한 미사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중하지만 온전한 실행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밝혔다. 공의회 일꾼인 동시에 수혜자였던 그는 전 세계를 찾아다니며 선교사의 면모를 드러냈다. 방문할 국가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릴 때마다 땅에 입을 맞추며 경의를 표하는 동작, 교황이 주례하는 대규모 미사는 매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 성인 교황들과 한국의 인연

교회 밖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요한 23세와 한국의 인연은 적지 않다. 1948년 겨울 프랑스 파리에서 UN 총회가 개최되고 한국 정부가 UN의 승인을 받을 때, 프랑스 주재 교황대사였던 그는 장면(요한) 박사를 필두로 한 대한민국 대표단이 외국 대표단과 만나 교섭하도록 주선했다. 교황으로 재위하던 1962년에는 한국 천주교회에 정식으로 교계제도를 설정, 교황청 관할이었던 대목구代牧區를 교구敎區로 승격시켜 교구장 주교가 지역 교회를 직접 다스리게 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수해로 어려움에 빠진 전남 순천시에 후원금 1만 달러를 기탁하기도 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 방문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1984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거행한 103위 순교자 시성식은 로마 밖에서 실시된 최초의 시성식이었다. 이후 교황청은 ‘가톨릭 올림픽’이라 불리는 세계성체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1989년 10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성체대회가 열림으로써 교황은 다시 한 번 한국 땅을 밟았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요한 바오로 2세 선종 직후에 거행된 추모미사에서 “당신이 나치 독일과 소련 치하에서 고통을 받으셨기 때문에 분단된 한국의 아픔을 당신의 고통처럼 느끼셨다”고 했다.

※ 참고한 자료
<옥스퍼드 교황 사전>, 분도출판사, 2014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 교황 요한 23세>, 바오로딸, 2014
<요한 23세 성인 교황>, 가톨릭출판사, 2014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 가톨릭출판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