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토 16세 교황,
그리스도교 희망에 관한 회칙 「희망으로 구원을」(Spe Salvi) 발표
2007년 11월 30일, 그리스도교 희망을 주제로 한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두 번째 회칙 「희망으로 구원을」(Spe Salvi)이 발표되었다. 서론과 여덟 개 장으로 이루어진 이 문서는 바오로 사도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의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spe salvi facti sumus; 로마 8,24)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각 장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1. 신앙은 희망
2. 신약 성경과 초기 교회에서 신앙을 바탕으로 한 희망의 개념
3.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4. 그리스도교 희망은 개인주의적인가?
5. 현대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희망의 변화
6. 그리스도교 희망의 참 모습
7.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들’
1) 희망의 학교인 기도
2) 희망을 배우는 자리인 활동과 고통
3)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인 심판
8. 희망의 별이신 마리아
교황 성하께서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하는 ‘구원’은 당연한 기정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재에 맞설 수 있는 참된 희망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구원받은 것입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현재라면, 그리고 우리가 이 목표를 확신할 수 있다면, 또한 이 목표가 힘든 여정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위대한 것이라면, 비록 고달프더라도 우리가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는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표지는 그들에게 미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 그들의 삶이 헛되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 복음은 알 수 있는 것들을 그저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사건들이 일어나게 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시간의 문, 미래의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달라진 삶을 삽니다. 희망하는 사람은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느님, 참된 하느님을 알게 된다는 것은 희망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으나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던 에페소인들처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잘 이해했다. 교황 성하께서는, 오래 된 그리스도인들이 부딪치는 문제는 그들이 너무나도 복음에 “익숙해져서 …… 이런 하느님과 참된 만남에서 비롯되는 희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신다.
교황 성하께서는 예수님께서 스파르타쿠스처럼 “사회 개혁의 메시지를 전달하신 것이 아니며” 또한 “바라빠나 바르 코크바처럼 정치적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담으신 것도 아니었다.”고 지적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것, …… 곧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만남 …… 종살이의 고통보다도 더 강력한, 그래서 비록 외적인 구조는 달라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 삶과 세상을 안에서부터 변화시킨 희망과의 만남”을 가져다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신다. “우리는 우주의 노예가 아니며” “사물의 법칙과 진화의 법칙의” 노예도 아니다. “하늘 나라가 헛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주의 주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당신을 사랑으로 드러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참으로 누구인지, 참된 인간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참된 철학자”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 너머의 길”을 보여 주신다. “이를 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삶의 참된 스승뿐”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며, “이 미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현재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그 희망은 동시에 기대이며 현존이다.
교황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영원한 삶의 가능성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여 신앙을 거부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오늘날 신앙의 위기는 ……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 희망의 위기입니다. …… 잃어버린 낙원을 되찾을 희망을 더 이상 믿음에 기대하지 않고” 과학 기술의 진보에 기대함에 따라, “인간의 나라”가 나타나리라 믿는다. 그래서 희망은, “스스로 고유한 장점에 힘입어 새롭고 완벽한 인간 공동체를 보장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이성과 자유라는 두 기둥 위에서 “진보에 대한 믿음”이 된다.
교황 성하께서는 “이 희망의 정치적 실현의 두 단계”로 프랑스 혁명과 마르크스 혁명을 언급하신다. 프랑스 혁명에 직면하여 “유럽의 계몽운동은 …… 이성과 자유에 관하여 새롭게 성찰할 이유를” 찾았지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무시무시한 파괴의 흔적”만을 남겼다. 마르크스의 근본적인 오류는 “인간을 망각하고 인간의 자유를 망각했다는 점이었습니다. …… 그는 경제만 바로 잡으면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바로잡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결정적 오류는 유물론입니다.” ……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에게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 외적인 구조만으로는 “인간은 결코 구원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으로 구원됩니다.” “어떤 절망에도 굳건하게 남아 있는 위대하고 참된 희망은 오로지 하느님, 우리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계속 사랑하시는 하느님뿐이십니다.”
이어서 교황께서는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네 가지 “자리”를 밝히신다. 첫 번째 자리는 기도이다. “아무도 더 이상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나에게 귀 기울이십니다. …… 나를 도와 줄 이가 아무도 없을 때에도 …… 하느님께서는 나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기도와 함께 활동이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희망은 언제나 다른 이들에게도 희망입니다. 그것은 더 밝고 더 인간적인 세상을 향하여 …… 노력하는 적극적인 희망입니다.” 그러나 “내 삶과 역사 전체가 …… 스러지지 않는 사랑의 힘으로 지탱되고 있음을” 알 때에만 “언제나 계속 희망할 수 있습니다.”
고통도 희망을 배우는 또 다른 “자리”가 된다. “분명 우리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을 비켜 피하거나 고통에서 도망침으로써가 아니라, 고통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통하여 성장하며 무한한 사랑으로 고통 받으신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고통의 의미를 찾는 능력을 통해서 치유됩니다.” 다른 중요한 측면은 다른 이들과 함께, 다른 이들을 위해서 고통 받는 것이다. 교황 성하께서는 “고통 받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는 …… 무정하고 비인간적인 사회”라고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배우는 자리는 하느님의 심판이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희망입니다.” “육신의 부활이 있습니다. 정의가 있습니다. 지난날의 고통을 ‘없애고’, 모든 것을 바로잡는 보상이 있습니다.” 교황께서는 “정의의 문제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핵심 논거, 가장 강력한 논거가 된다.”는 확신을 말씀하신다. 실제로, “역사가 불의로 끝날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는 정의이시며 정의를 이루십니다. …… 그분의 정의 안에는 언제나 은총이 있습니다. …… 은총은 정의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결국, 악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들이 희생시킨 이들과 똑같이 영원한 잔칫상에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바티칸 통신(Vatican Information Service), 2007년 11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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