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천주교 춘천교구

교회사 자료실

장정룡 선생님은 솔올 본당의 교우로서 지난 번 솔올에서 있었던 학술발표에서도 좋은 발표를 해 주신 분이십니다.


파일 다운로드:  강릉지역의 병인교난 천주교 순교자 고찰.hwp


강릉지역의 병인교난 천주교 순교자 고찰
                   

장정룡(강릉원주대 교수)



 - 차 례 -
 1. 머리말
 2. 강릉지역의 병인교난 순교자와 행적
    1) 이유일 안토니오의 순교 행적
    2) 심능석 스테파노의 순교 행적
    3) 김성렬 바오로의 순교 행적
 3. 맺음말
 [참고문헌]



 1. 머리말


 이 글은 조선시대 병인교난 때 강릉에 거주했던 이유일, 심능석, 김성렬 순교자의 행적을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근래 강릉 바우길에 순교자의 길로서 심스테파노의 길이 생기면서 강릉지역 천주교 순교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강원도 영동지역 천주교 전래는 병인박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천주교도들은 교난 중에 신앙의 자유를 얻고 지속적인 전교사업을 이루기 위해 영동지방에 이주해 왔다. 강릉 향토지에도 “구한말 19세기 말경에 지금의 명주군 구정면 금광리와 강릉시 내곡동 등지에 천주교인들이 몇 집 이주하여 저희 교인들끼리 모여 살면서 천주교 전교사업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하였다.
 그동안 강원지역의 천주교 전파 및 강릉지역 순교자와 관련한 것은 관찬사료인『좌포청등록』을 비롯하여 순교일기와 증언록, 1960년대 유홍렬의 연구 등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병인교난(1866~1878)때 강릉에서 순교한 횡성출신 심능석(沈能錫, 1819~1868) 스테파노가 있었으며, 같은 시기 강릉의 순교자 이유일 안토니오, 김성렬 바오로의 기록도 주목된다.
 심스테파노는 강릉 굴아위에 살았으며, 무진년(1868년) 음력 5월 5일 붙잡혀 5월 11일(양력 6월 30일) 50세에 순교하였다. 그의 행적에 대하여 “그러한 순교자가 이 지역사회에 있었다는 것이 오늘에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 …이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추하게, 그리고 욕되게 행동한 것이 아니고, 모범되게 순교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라는 평가가 온당하다. 
 우리나라에서 하느님을 신봉한 최초의 신앙인 강릉 출신 허균(1569~1618) 그리고 실천적 신앙인으로 강릉에 거주했던 순교자 연풍출신 이유일 안토니오(1819~1868), 횡성출신 심능석 스테파노(1819~1868)와 강릉출신 김성렬 바오로는 시간을 초월하여 2백년 만에 강릉하늘 아래에서 하느님 자녀로 다시 만났다.
 강릉시 임당동 성 콜롬바노 성당은 1921년 10월 10일 최초 설립되었으니 머잖아 한 세기를 맞이한다. ‘꿈을 키워가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은 임당동 성당 100주년 맞이 기도문이다. 이 성당 건물은 고딕양식을 변형한 장방형 건물로서 문화재청 근대문화유산에 등록되었는데 중국인 건축사 요셉이 설계해서 1954년에 착공하여 1955년에 완공되었다. 정면 중앙부 종탑과 성당 외곽이 원형으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 성당건축의 전형을 엿볼 수 있으므로 교인 뿐 아니라 교회사 연구자 등 많은 분들이 찾고 있다. 아래 사진은 1950년대 무렵의 임당동 천주교회 부근의 대로 사진이다.


 
 영동지역 천주교 발상지라 할 수 있는 강릉시 구정면 금광리 공소는 당시 원산본당에 소속되었으며, 1887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한다. 이전에는 구정면 여찬리 삼정평 공소가 있었는데, 영동지역 금광리 공소가 독립본당으로 등록된 것은 1921년 6월 12일 서품된 이방지거(喆淵, 永燮이라고도 함)신부가 같은 해 7월 금광리에 영동교회를 개설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던 중 1923년 6월 당시 경성교구 부주교인 빠리외방전교회 소속 유주교(Devred)의 지시로 주문진에 이사하여 당시 강릉군 신리면 교항리 133번지에 열 칸 상당의 가옥을 신축하고 11월에 본당으로 발족하였다. 1926년 2대 본당신부로 부임한 김인상(야고보)신부에 의해 1931년 강릉군 임정리로 옮겼고, 1934년 강릉시 임당동 성 골롬바노 성당으로 이주하였다. 1937년 자료에 의하면 강릉의 천주교 포교소는 2개소이며 신자는 남자 115명, 여자 114명이라 하였다. 1966년에는 강릉 천주교 1개소, 포교자 남자 3명, 여자 2명, 신자수 남자 1,100명 여자 1,400명으로 총 2,500명이었고, 1968년 12월말에는 강릉의 신자수는 2,692명으로 늘어났다. 1965년 전체 강원도 종교단체의 현황을 보면 천주교는 108개소 있었으며, 신자수는 무려 50,834명으로 가장 다수를 차지하여 기독교가 39,978명이었다. 두 번째는 불교가 34,485명으로 유교보다 다소우세를 보이고 있는 현상이라 하였다. 1950년대 강릉지역 천주교 실태에 대한 글을 살펴보자.

  지금으로부터 1956년 전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창설하신 교로서 其後 많은 희생을 받으며 其連綿한 전통을 계승하여 현재에는 세계 각민족에 전파되어 신도가 4억5천만인으로 오직하나인 정통교회로써 우리 한국에는 지금으로부터 173년 전(정조7년)에 중국 사신으로 이동욱을 파견할새 其의 子 승훈이 수행하여 북경에 체류 중 司敎 코베아에게 설교를 듣고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고 翌年에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가지고 귀국하여 포교함에 이르렀으니 其 李氏가 우리나라 최초의 신자이라고 고찰되며 그의 전교로 명문출신에서 많은 신자가 있었으나 당시 유교전성시대이며 따라 파당투쟁으로 政亂이 심한 때라 포교상 지극히 고난과 애로가 많은 중 반대파가 생기여 異敎滅倫的이라 하여 117년 전 기해년에 결국 박해를 당하고 뒤이어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병인년에 稀有의 대박해를 당하여 사교 사제 신도 등2만여 명의 순교자를 낸 참극이 연출되었으며 其後 사십년 후 즉 서기 1883년에는 세계사조에 따라 신앙의 자유를 마지하게(맞이하게) 되어 삼천리강산 방방곡곡에 전파되고 其後 지방별로 교구가 생기여 서울교구를 비롯하여 대구, 원산, 평양, 전주, 춘천, 광주, 함흥, 간도 등 교구가 설치되고 발전을 거듭하여 근 30만의 신도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우리 강원도 춘천에 佛人(프랑스인) 神父가 처음으로 교회를 창설하고 따라 원주, 강릉 등의 著名地에 교회를 설치하였고 일제 강점기는 발휘못하다가 해방후 발전되여 있든 중 6.25동란으로 인적 재적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던 바, 해외후원으로 정상화에 이르렀으며 其間 한민족의 문화교육 등에 믿이는(미치는) 영향이 심대하였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우리 도내(휴전선 이남)에는 27개소 교회와 1만8백인의 신자가 있다.   

 본고에서는 조선시대『좌포청등록』의 기록순서대로 병인교난에 치명한 이유일(李惟一) 안토니오와 심능석(沈能錫) 스테파노, 김성렬(金性烈) 바오로의 순교행적에 대해서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가톨릭 기도서의〈성인찬미가〉에 “박해는 전토를 덮어 유혈의 내를 이루고, 참수의 산을 이룰 때, 저항없는 약한 육체, 간난고초 거듭해도 끝까지 의기 충천, 주의 진리 증명”하신 것과 같이, 병인박해의 피 꽃을 몸에 피워 천당에 오르신 믿음의 선조들인 이들 신앙의 용사들이 영생을 얻기를 간절히 바라며 시복시성의 영광이 내리길 기원하는 바이다.

 
 2. 강릉지역의 병인교난 순교자와 순교


   1) 이유일 안토니오의 순교 행적

 순교자(殉敎者)는 하느님 가르침에 따르기 위해 목숨을 버린 천주교도를 말한다. 1868년 병인박해 당시 강릉지역에 거주한 이유일 안토니오는 심능석 스테파노와 당시 50세의 동갑으로 순교하였고, 김성렬 바오로는 강릉태생으로 47세에 순교하였다. 이들 강릉과 인연을 가진 세 명의 순교자에 대해서 그동안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연구도 크게 진행된 바 없었다. 이유일(李惟一) 안토니오는 『좌포청등록』에 우리 지역 순교자로서 부제(副祭)직함이었으며 심스테파노와 함께 강릉 굴아위에서 살다가 붙잡혔다.

 [자료] 좌포청등록

[원문] 戊辰五月十一日 罪人 李唯一 年五十 邪號 安敦 物故
 李唯一 段矣 身本以延豊胎生 數十年前上京 居接於小公洞 而聖敎則三十歲 始爲受學於已死之矣父處 仍爲代洗作號則已死之李辰汝處是白乎旀 十數年前 往見洋人安主敎於大平洞 張主敎所住處 又爲堅陳是白遣 安主敎以矣身 稱號曰副祭 故果爲隨行 而又見洋人姜神父於張主敎家 前後告解段 合爲十餘次是白遣 丙寅春獄時 㥘於威風 仍卽逃避於江陵季村是白加尼 今至現捉 無辭發明是白置

 [번역문] 무진년(1868) 5월 11일, 죄인 이유일, 나이 50, 사호 안돈, 물고
 이유일 저는 본래 연풍 태생으로서 수십년 전에 상경하여 소공동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주교는 30세 때에 처음으로 이미 죽은 아버지에게 배웠고, 이어 이미 죽은 이진녀에게서 대세 작호하였습니다. 십여년 전에 서양인 안주교를 대평동 장주교 집에 가서 뵙게 되었고, 또한 그에게서 견진을 받았습니다. 안주교께서는 저를 부제라고 부르셨고, 그런 연고로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또 서양인 강신부를 장주교 집에서 만나서 전후로 고해함이 10여 차례나 되었습니다. 병인 봄의 옥사시 위풍에 겁이 나서 인하여 강릉 계촌으로 도피하였다가 이제 잡혔으니, 발명할 말이 없습니다.

 이유일 안토니오가 좌포청에서 문초를 받아 순교한 때는 1868년 5월 11일(양력 6월 30일)이다. 상기의 진술 내용을 분석한 유홍렬은 “李唯一 安敦은 神學을 배우던 늙은 神學生으로서 一․二년 後에는 神父의 品位를 받게 될 副祭라는 階位를 얻게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한편 그는 上述한 바와 같이 南鍾三․洪鳳周들과 꾀하여 大院君에게 글을 올린 李安敦이었으며 달레의 敎會史에 보이는 李안또니오 그 사람이었음이 確實하다. 따라서 그는 이때까지 獨身을 지켜오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2) 심능석 스테파노의 순교 행적

 강릉 바우길에 이른바 ‘심스테파노길’을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순교자 심스테파노에 관심이 각계에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심스테파노는 『치명일기』에 기록된 강원도 유일의 순교자며 비교적 그 행적이 소개된 인물로서 그의 신앙관과 순교 행적은 우리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강릉 임당동 천주교회 신자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바우길 가운데 유일한 천주교 순교자의 길인 심스테파노길을 걷고 있으며 이 길을 통해 지역순교자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또한 1854년 충북 청주에서 박해를 피해 강릉홍제동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강원도 천주교회 도회장으로 활동하다가 1897년에 순교한 오광선 타대오도 기억할 분이다. 필자의 조사에서 속초시 도문동 옹기점마을의 천주교도 가운데 조상이 충북 충주에서 강릉 연곡 행정리에서 피신해 살다가 약 150년전에 도문으로 들어왔는데 당시 이곳 옹기점마을에는 양씨 성을 가진 천주교 신자가 있었다고 한다.
 영동지역 천주교 전파와 집단부락인 옹기점마을의 관계는 종교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이 있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배교자 유다가 배교의 대금으로 구입한 땅이 토기장이의 땅이었다. 그러므로 배교를 금하려는 의도에서 은둔 신자들이 옹기를 빚었다는 견해도 있으며, 초기 프랑스 신부들이 광명단을 가져왔으며 비밀리에 입국한 프랑스 신부들이 신자들의 생계를 위해 옹기굽는 기술습득을 권장했다고도 한다.
 병인교난의 혹독한 고문을 피하기 용이한 곳이 강원도 심산유곡이었으며, 이곳에서 은둔적인 집단신앙생활을 하였다. 이곳은 옹기를 제작하기 위한 흙, 나무, 물 등의 재료들이 풍부했다. 이들은 지속적 전교를 위한 경제행위로서 옹기를 강릉읍내나 바닷가의 농수산물과 물물교환 형식으로 생계를 꾸려나갔으며, 집단부락 생활은 옹기생산의 인력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었다. 병인교난 당시의 천주교는 내세중심, 서민중심의 신앙형태로 변모하는 시기로서 천주교 신앙이 부모나 가족공동체에 의해 주도되었으므로 영동지역에도 옹기점마을을 중심으로 천주교 집단이주촌이 형성된 것이다.
 천주교 순교자 감사송에는 “복된 순교자는 주님을 현양하려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피를 흘려 주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었나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연약한 인간에게,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을 증언할 강한 힘을 주셨나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시복시성 기도문에서는 “저희가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아, 악의 유혹이 끊이지 않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굳건히 지키며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성령의 은총으로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하듯이 모두가 순교자들의 정신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빛나는 얼굴을 만나기를 희망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강릉순교자 이안토니오, 심스테파노, 김바오로에 대한 행적은 몇 가지 기록상에 나타난다. 이를 간행연도순으로 보면『左捕廳謄錄』(1868년)『朴順集證言錄』(1888년)『致命日記』(1895년) 등이다. ‘치명’은 ‘순교’와 같은 뜻으로『좌포청등록』에는 이유일(安敦), 심능석(시되왕), 김성렬(바오로) 순으로 물고(物故)된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심스테파노는 여러 사료들에 생애사적 서술이 남아있고 신앙생활과 순교행적 등이 일대기적 형식으로 기재되었다. 이 기록들은 개인적으로 전해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 있으며, 직접 물고 당하기 전에 직접 심문당한 구술 내용을 필사로 기록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관청기록인『좌포청등록』제3책은 직접 심문할 당시 내용으로 파악되는바, 한자와 이두문을 혼용하였으므로 이를 당시의 구술체로 번역하였다.

 [자료1] 좌포청등록

[원문] 戊辰五月十一日 罪人 沈能錫 年五十 邪號 시되왕 物故
 沈能錫段矣 身本以橫城胎生 乙巳年分移接 於龍仁山義室 而聖敎則戊戌年 始爲受學於已死之廣州居朴成皐 處而伊時逢見洋人鄭神父 於矣家仍爲領洗作號 其後又見洋人高主敎 於矣家卽爲堅陳是白遣 洋人段姜神父 金神父 張主敎 逢見於各處 間間告解 而壬戌年 分又爲移接於江陵季村是白加尼 今至被捉焉 敢發明哉 背敎一歎 無可奈何是白乎旀 所謂敎友等 再昨春獄時 㥘於威風 求生逃避 則豈可知得乎 惟願速死是白置
 
 [번역문] 무진년(1868) 5월 11일, 죄인 심능석 나이 50, 사호 시되왕, 물고(처형)
 심능석 저는 본래 횡성 태생으로 을사년(1845년)에 용인 산의실에 거처를 잠시 옮겨 자리를 잡았습니다. 카톨릭교는 무술년(1838) 광주에서 이미 죽은 박성고에게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이때 그곳에서 서양인 정신부를 내 집에서 만나 영세받고 세례명을 받았고, 그 후 또 서양인 고주교를 내 집에서 만나 견진하였으며, 그 후 강신부, 김신부, 장주교를 여러 곳에서 만나 간간이 고해를 하였습니다. 임술년(1862)에 강릉 계촌으로 거처를 잠시 옮겨 살다가 이제 잡히었는데, 교리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재작년(1866) 봄 옥사에는 위풍에 겁이 나서 살고자 도피했으며 교인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오직 빨리 죽기를 원할 따름입니다.

 




 [자료2] 박순집증언록

 병인박해 때 순교한 강릉 심스테파노는 옥중에서도 “희희낙락하며, 웃음으로 지내고, 활동한 거동”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순교자의 모습은 오늘날 역사인식으로 보면 선각자요 개화사상을 보여준 인물이다. 1888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백 주교가 프와넬(박도행)신부에게 조선 순교자의 행적을 조사하라고 지시함으로써 작성된『박순집 증언집』이 나왔다. 이 증언집에도 심스테파노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술되었다. 그가 치명될 당시의 나이가 49세라고 하였다.

 沈스테파노 강원도 강능 굴아위 살더니 무진년 오월초오일에 본동 외인 친구들이 뎡에 모히여 쳥좌매 니안니로 더브러 노 즁에 참예였더니 뜻밧긔 경교 압잡이로 단니 놈이 여러 교졸을 리고 와셔 뎌 사이 이 안니라 즉 포교ㅣ 무르 안니 쥬인이 뉘냐니 스테파노ㅣ 나셔며 내가 쥬인이라 니 교졸이 일시에 달려드러 결박려 즉 스테파노ㅣ 말 우리 결박지 아니여도 도망 사이 아니니 내 집으로 드러가야 의게 진 빗과 샹관되 일을 쳐결 후 젹몰라 고 집에 도라와 쥬의게 진 빗을 보환 후 가산을 다 젹몰고 스테파노를 잡아 리고 포쳥에 가셔 갓치엿더니 하루 유직이 말이 스테파노 오 밤에 죽을 거시니 옷 밧고아 달나니 또 희락며 우으로 지내니 활발 거동이 옥즁에 여나니 과연 그날 치니라 나히 십구셰러라 이 졍은 그 옥즁에 갓치잇던 최로가 알고 살기 원쥬 풍슈원이오 스테파노의 아 오 츙돌람이 사니 이런 졍을 셰히 말러라.
 (沈스테파노는 강원도 강릉 굴아위에 살더니, 무진(戊辰, 1868)년 오월 초오일에 본동 외인 친구들이 정자에 모여 청좌(請坐)함에, 이 안토니오와 더불어 노는 가운데에 참여하였더니, 뜻밖에 경교(京校) 앞잡이로 다니는 놈이 여러 교졸(校卒)을 데리고 와서, “저 사람이 안토니오라.” 한즉 포교가 묻되 “안토니 주인이 누구냐?”하니, 스테파노가 나서며 “내가 주인이라.”하니 교졸이 일시에 달려들어 결박(結縛)하려 한즉 스테파노가 말하되 “우리는 결박하지 아니하여도 도망할 사람이 아니니, 내 집으로 들어가야 남에게 진 빚과 상관되는 일을 처결한 후 적몰(籍沒)하라.”하고 집에 돌아와 채주(債主)에게 진 빚은 보환(報還)한 후, 가산을 다 적몰하고 스테파노를 잡아 데리고 포청에 가서 갇히였더니, 하루는 유직(有職)의 말이 “스테파노는 오늘 밤에 죽을 것이니, 옷을 바꾸어 달라.”하니 또한 희희낙락(喜喜樂樂)하며, 웃음으로 지내니, 활달한 거동(擧動)이 옥중에 뛰어나니, 과연 그 날 치사(致死)하니 나이 사십구세더라. 이 사정은 그때 옥중에 같이 있던 최바오로가 알고, 살기는 원주 풍수원이요, 스테파노의 아들 바오로는 충돌람이 사니, 이런 사정을 자세히 말하더라) 


 [자료3] 치명일기

 1866년 병인교난 때 천주교 대탄압과 관련하여 치명한 877명을 기록한『치명일기』(뮈델, 민효식 주교 지음 1895년 발간)의 심스테파노 기록(강릉 832 심스테파노)은 다음과 같다.

 강릉 八百三二 심스테파노

 본 강릉굴아위 살더니 무진 오월에 경포의게 잡혀 지금 풍슈원 사 최로와 끠 갓치였다가 치명니 나흔 이십구셰된 줄을 아되 치명 곳은 자셰히 모로노라.
 (본데 강릉 굴아위에 살더니 무진 오월에 경포에게 잡혀 지금 풍수원 사는 최바오로와 함께 갇히였다가 치명하니 나이는 이십구 세 된 줄을 알되 치명한 곳은 자세히 모르노라)


 [자료4] 병인치명사적(제23권)

 심스테파노라  이 강원도 강능 굴아위 디방에 살다가 무진년을 당야 나히 십구세라.  오월초오일에 본동 외인 친구들이 뎡에 모히여 쳥좌매 리안도니로 더브러 노 즁에 참예였더니 뜻밧게 경포교 압잡이로 단니 놈이 여러 교졸 리고 와셔 져 사이 이 안도니라 즉 포교 물오 안니 쥬인이 누시냐니 스데파노 나셔며 내가 쥬인이라 니 포졸이 일시에 달여들어 결박려 즉 스데파노 말 우리 결박지 아니여도 도망 사이 아닌즉 내 집으로 드러가야 남의게 진 빗과 샹관되 일을 쳐결 후 젹몰라 고 집에 도라와 말던 일을 쥬의게 보환 후 가산을 젹물여 가지고 깃분 으로 포뎡에 가셔 갓치였다가 로 유직이 말이 스데파노 오날 밤에 죽을 것이니 옷을 밧고아 입쟈 니 또 희락며 우슴으로 지나니 활발 거동이 옥에 초월더니 과연 그날 치니라 이런 신통 일은 그 치엇다가 살어와 원주 퓽수원사 최로와 스데파노의 아 로 츙쥬 돈담이 디방이니 이런 셰말더라.
 (심스테파노라 하는 이는 강원도 강릉 굴아위 지방에 살다가 무진년(戊辰年, 1868)을 당하여 나이 사십구세라. 오월 초오일에 본동 외인 친구들이 정자에 모여 청좌함에, 이안토니오와 더불어 노는 가운데에 참여하였더니, 뜻밖에 경포교 앞잡이로 다니는 놈이 여러 교졸 데리고 와서, “저 사람이 안토니오라.“ 한즉 포교 물으데 “안토니오 주인이 누구냐?”하니, 스테파노가 나서며 “내가 주인이라.”하니 포졸이 일시에 달려들어 결박하려 한즉 스테파노가 말하되 “우리는 결박하지 아니하여도 도망할 사람이 아닌 즉, 내 집으로 들어가야 남에게 진 빚과 상관되는 일을 처결한 후 적몰하라.”하고 집에 돌아와 말하던 일을 채주에게 진 빚은 보환한 후, 가산을 적몰하여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포청에 가서 갇히였다가 하루는 유직의 말이 “스테파노는 오늘 밤에 죽을 것이니, 옷을 바꾸어 입자.”하니 또한 희희낙락, 웃음으로 지내니, 활달한 거동이 옥에 초월하더니, 과연 그 날 치사(致死)하니라. 이런 신통한 일은 그때 같이 갇히었다가 살아와 원주 풍수원 사는 최바오로와 스테파노의 아들 바오로는 충주 돈담이 지방이니 이런 자세한 말하더라)

 이외에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도 강릉지역의 심스테파노와 김성렬 바오로 두 명이 나온다. 심스테파노의 일은 함께 갇혔던 풍수원 사는 최바오로와 심스테파노의 아들 심바오로가 증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사실에 입각한 것으로 미화나 과장하여 서술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심스테파노가 살았던 굴아우와 계촌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힘드나 필자의 현지조사결과 강릉 인근 지역이라 추정된다.
 심스테파노의 순교와 관련하여『박순집 증언록』을 검토한 바, 그의 행적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긴 참되고 정직한 천주교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순교행적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에 대하여 “그러한 순교자가 이 지역사회에 있었다는 것이 오늘에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 …이 지역사회에 존재하는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추하게, 그리고 욕되게 행동한 것이 아니고, 모범되게 순교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증언록에 언급되었듯이 첫째의 평가는 그가 죽음을 불사한 순교자의 자세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굴아위에 이들을 잡으러 들어온 포졸이 안토니 주인이 누구냐고 묻자 자신이 이안토니오의 ‘주인’이라고 밝힌 점이다. 50세 동갑의 나이였지만, 그가 천주교 신앙으로 맺어진 이안토니오의 대부였음을 추정하게 되는바, 교졸들의 추궁에 조금도 주저없이 두려움에 떨지 않고 떳떳하게 “내가 주인이다”라고 밝힌 용기는 죽음을 불사한 신앙인의 자세이다.
 두 번째는 자신이 진 채무를 다 갚고 나서 스스로 감옥에 갇혔다는 점이다.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죽음을 직면하였고 자신의 재산을 몰수당하면서도 부채를 갚겠다고 한 것은 책임있는 신앙인의 자세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진 ‘빚’을 남기지 않고 우리들에게 참 신앙인의 ‘빛’을 남긴 인물이다. 이안토니오와 함께 “우리는 결박하지 않아도 도망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 한의연한 자세는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빚을 다 변제하고 난 다음에 스스로 붙잡혀간 것은 십계명 마지막에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함을 실천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세상의 빚을 다 갚고, 새 세상의 빛으로 남은 것이다. 그는 ‘내탓, 네덕’의 실천적 신앙인으로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참다운 자세를 보였다.
 마지막은 심스테파노가 참된 순교자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학을 믿어 하느님 나라로 불려 올라감을 기뻐한 것이다. 당일날 심문도 없이 참수형에 처할 상황임에도 오히려 웃음으로 지내고 활달한 거동을 보였다고 한다. 1868년 음력 5월 5일 단오날, 포졸에게 붙잡혀 5월 11일 감옥에서 심스테파노는 순교했다. 그러나 그곳에 함께 갇혔던 이안토니오, 충주 돌담이 지방에 살던 아들 심바오로, 그리고 원주 풍수원에 살던 최바오로는 죽음을 면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릉에서 개척하여 전국 3대 명품길로 손꼽히는 유명한 바위길은 무려 16구간이나 만들어져 있다. 이 가운데 제10구간이 ‘심스테파노의 길’로서 이 길에 대한 설명이 바우길 통신 10구간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박순집 증언록에 나오는 심스테파노의 거주지인 ‘굴아위’를 ‘골아위’로 파악하여 구간안내지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골아위’와 ‘굴아위’는 다른 지명으로 판단된다. 골아위는 ‘골바위’ 즉 경암(鯨巖)이며, 증언록에 기록된 ‘굴아위’는 ‘굴바위’ 즉 굴암(窟巖)이 아닐까 한다. 골바우 즉 경암은 강릉시 성산면 위촌2리 고을명으로서, 본래 고래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그와 같이 부른 것이라 하는데, 이는 ‘고래’에서 ‘골’로 음운축약이 된 것이다. 사천면 판교리 굴아위[현지명은 구라미이다]는 원형이 ‘굴바위’로서 ‘피밭골→피앗골’ ‘가배→가위’ 등으로 불린 현상과 같이 ‘ㅂ’음이 탈락되어 ‘굴아위’라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심스테파노에 대하여『디지털 강릉문화대전』‘심스테파노’와 「바우길 통신5」10구간 ‘심스테파노 길’(글 이순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정의] 강원도 강릉출신의 천주교인으로 1866년 병인교난때 순교한 인물
 [가계] 청송심씨로 정약용의 손자이며, 삼척부사를 지낸 정대무의 사위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활동사항] 강원도 강릉 굴아위에 살다가 1868년 5월 경포(京捕)에게 잡혀 풍수원에 살던 최바오로와 함께 갇혔다가 순교하였다. 나이는 29세였고 시신을 안장한 곳은 알 수 없다
 [의의와 평가] 병인교난에 순교한 최초의 강릉출신 순교자이다.
 [참고문헌] 치명일기(1895)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말 병인교난(1866~1878년)때 심스테파노라는 천주학자가 이곳 골아우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지방관아의 포졸들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아주 드물게 서울에서 직접 내려온 포도청 포졸들에게 잡혀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저로서는 정말 놀라운 자료였습니다.…제가 찾은 자료엔 그가 청송 심씨 사람이며 삼척부사를 지낸 정대무(정약용의 손자)의 사위라는 설이 있지만 그것까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과 출신이 확실하지 않아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그곳에서 한 천주교 신자가 자신의 기둥같은 믿음 아래 순교했다는 사실이지요.…제자는 박순집 증언록에 심스테파노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했습니다. 박순집은 병인박해때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듣고 목격한 것을 증언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발굴에 큰 기여를 한 분입니다. 그의 증언록은 박해의 피바람이 지난 후인 1888년에 작성되었는데 심스테파노에 대한 기록은 이렇습니다. (중략) 증언록엔 ‘굴아위’로 나와 있고 실제 마을이름은 ‘골아우’여서 혹시 다른 동네가 아닐까 강릉부근의 마을이름들을 샅샅이 뒤져봤습니다. 골아우든 굴아우든 비슷한 지명은 거기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증언록에 심스테파노는 골아우로 몸을 피해오기 전에 먼저 ‘주무’라는 마을에 살았다는데 이 마을 역시 골아우로부터 8㎞쯤 떨어져 있는 ‘즈므마을’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심스테파노와 삼척부사 정대무와 관계의 찾기 위해 청송심씨 대종회를 통해서 대동세보를 찾았다. 처음 바우길에서 심스테파노로 추정했던 인물은 청송심씨 안효공파 감사공 21세손인 심재식(沈在植)이며, 부친은 심희경(沈喜慶)으로 나타났다. 심재식은 조부 동량(東亮)-부친 희경(喜慶)으로 이어지는 가계의 4남 1녀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심동량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심재식의 부친 희경이고, 딸은 정대무(丁大懋)에게 시집갔다.
 정대무는 농가월령가를 지은 운포 정학유의 아들로서 삼척부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자(字)는 자원(子園)이며 1824년생으로, 1867년 북청현감, 1888년 신천군수를 역임하고 1888년 8월 삼척부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10월 이임할 때까지 14개월 동안 부사직을 지냈다.『삼척시지』에 의하면, “1888년 8월에 신천군수에서 부임하고 1890년 10월에 순안현령으로 전출, 사직단 중수, 객사중수, 향교중수, 지진이 있었다. 정대무 부사의 흥학비와 선정비를 세웠다.”고 하였다. 정대무는 장지연의 『대한강역고』(1903)에 발문을 썼다. 이 책은 정대무의 조부 다산 정약용이 쓴 『아방강역고』(1811)를 증보한 책으로 정대무가 발문을 쓴 것은 집안의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하겠다.
 심희경은 슬하에 4남1녀를 두었다. 아들은 재익, 재관 재식, 재민의 순이며 딸은 민재후에게 시집을 갔다. 심희경의 자(字)는 후중(候中)이며 경오생(庚午生, 1810년)이고, 경오(1870) 9월 15일 60세로 사망하였고, 전주 이씨, 파평 윤씨 부인을 두었다. 심희경의 아들 심재식(沈在植)의 자(字)는 치규(致圭), 경술생(庚戌生)이며 무술(戊戌) 10월 13일 졸하였다고 대동세보에 기록되어 있다. 묘소는 부친과 같은 용인 산의곡(山義谷)의 소내동(小內洞)에 있다 하였고 부인은 나주 정씨이다. 용인 산의곡은 산의실과 같은 지역으로 이곳에는 천주교도 심씨의 묘소가 있으며 좌포청등록에 기록된 심능석 스테파노도 1845년에 용인 산의실로 옮겨 살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용인 산의실과 청송 심씨 천주교도와는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청송심씨 대동세보』안효공파(安孝公派) 감사공(監司公) 20세손 심희경, 21세손 심재식 두 분과 심동량의 사위 정대무 삼척부사 내용이 수록된 원문을 전재하면 다음과 같다.

  ○ 二十世  子 喜慶 生父 東亮 字 候中 庚午生 庚午九月十五日卒 墓龍仁山義谷大
     谷子坐, 配 全州李氏…配 坡平尹氏(하략)
  ○ 女 丁大懋 序一 羅州人
  ○ 二十一世 子 在益 在觀 在植 在敏 女 閔載厚
  ○ 東亮-喜慶-在植 字 致圭 庚戌生 戊戌十月十三日卒 墓山義谷小內洞子坐 配 羅
     州丁氏(하략)


 
 그러나 상기한 바와 같이 심스테파노로 추정한 인물은 『좌포청등록』에 심능석이라고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만 용인 산의실은 심능석 스테파노도 이주해서 살았던 천주교도 심씨 가문의 신앙적 거주지로 파악되는 바다. 심스테파노가 거주했던 ‘굴아위’라는 곳에 대하여 한국성지자료실에는 아래 내용과 같이 강릉시 사천면 석교2리 ‘구라미’라고 소개하였다. 강릉지역의 지명인 ‘굴아위’ ‘골아위’ 두 곳에 대한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강릉 지역의 순교자로 교회 공식 문헌인 《치명일기》에 나타나고 있는 심 스테파노(1820~1868)의 고향이다. 강릉 굴아위에 살다가 무진 5월에 경포에게 잡혀 지금 풍수원 사는 최 바오로와 함께 갇혔던 그는 29세에 서울 포도청에서 치명하였다고 전해진다. 강릉에서 주문진 방면으로 14km 떨어진 구라미 마을은 강원도 동해안 일대에서 유일하게 순교자를 낸 곳이다. 이곳에서 살던 심 스테파노는 한학에 능통한 선비로서 일찍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문중의 반대를 무릅쓰고 홀로 열심히 수계하던 교우였다. 그는 29세(《병인치명사적》에는 49세로 나옴) 되던 1868년 무진년 5월에 마을 친구들과 함께 동구 밖 정자에서 상춘을 겸한 시회(詩會)를 즐기다가, 어느 외교인의 밀고로 경포(京捕, 포도청 포졸)에게 이유일(李惟一, ?~1868, 안토니오)과 함께 잡혀 서울 포청에서 치명하였다. 이 안토니오는 베르뇌 주교의 집주인으로 있었는데, 병인박해(1866년)를 피해 강릉 계골(강원 평창군 방림면 계촌리)에 숨어 있다가 심 스테파노와 함께 잡혔다(《병인치명사적》 23권 118~119쪽). 강원도 영동 지역에 천주교가 적극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계기는 고종 3년(1866) 대원군에 의해서 일어난 병인박해라고 할 수 있다. 박해를 피하여 이곳으로 숨어든 천주교인들이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은밀하게 전교를 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교회 공식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 강릉 지역의 순교자로는 《치명 일기》에 기록돼 있는 심 스테파노 한 명뿐이다. 《치명일기》에 나타나는 심 스테파노에 관한 내용을 보면 “본디 강릉 굴아위에 살더니, 무진 5월에 경포(京捕)에게 잡혀 지금 풍수원 사는 최 바오로와 함께 갇혔다. 치명하니 나이는 29세 된 줄은 알되 치명한곳은 자세히 모르노라.”고 기록돼 있다. 굴아위는 구라미 마을(현 강릉시 사천면 석교리)로 전해 오는데, 옛날에 청송 심씨 문중이 씨족을 이루어 살던 전형적인 양반 마을이었다. 청송 심씨 일족이 언제부터 이 마을에서 살았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으로부터 70년 전만 해도 심씨들이 10여 호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모두 타지로 떠나 한 집도 살고 있지 않다.

  1924년 구라미 마을(강릉시 명주군 사천면 석교리)은 옛날에 청송 심씨 문중이 씨족을 이루어 살던 전형적인 양반 마을이었다. 청송 심씨 일족이 언제부터 이 마을에서 살았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으로부터 50년전만 해도 심씨들이 10여호 살았는데 현재는 모두 타고장으로 떠나 한 집도 살고 있지 않다. 강릉에서 14km 떨어진 이 마을은 강원도 동해안 일대에서 유일하게 순교자를 낸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살던 심 스테파노는 한학에 능통한 선비로서 일찌기 천주교에 입교하여 문중의 반대를 무릅쓰고 홀로 열심히 수계하던 교우였다. 그는 29세 되던 1868년(무진년) 5월에 마을 친구들과 함께 동구밖 정자에서 상춘(賞春)을 겸한 시회(詩會)를 즐기다가, 어느 외교인의 밀고로 경포(京捕:포도청 포졸)에게 잡혀 강릉 감영으로 끌려가 옥에 갇히였다가 치명하였는데 그 치명 장소는 확실치 않다. 강릉 지역의 순교자로 교회 공식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 분은 치명 일기에 기록돼 있는 심 스테파노 한 분 뿐이다. 치명일기에 나타나는 심 스테파노에 관한 내용을 보면 "본디 강릉 굴아위에 살더니, 무진 5월에 경포(京捕)에게 잡혀 지금 풍수원 사는 최 바오로와 함께 갇히었다. 치명하니 나이는 29세 된 줄은 알되 치명한 곳은 자세히 모르노라."고 기록돼 있다.

 현재 강릉시 사천면 석교2리로 마을 전체를 ‘구라미’라 부르는데, 필자가 확인한 바 있는 마을 성황당축문 등에도 ‘굴암(窟巖)’이라 적혀 있었다. 굴암은 다른 말로 ‘굴바위’로서 'ㅂ'이 탈락하여 ‘굴아위’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필자는 굴아위에 대한 언어학적 분석을 통해서 지형지물설, 풍수지리설, 성씨유래설, 역사구전설 등 네 가지로 분석한바 있다.


  3) 김성렬 바오로의 순교 행적

 김성렬 바오로는 병인박해 때 희생당한 강릉출신의 천주교도다. 그는 횡성에서 7년간 살았다고 한다. 그는 이유일 안토니오, 심능석 스테파노가 무진년 5월 11일 물고되었으나, 이로부터 4일후인 5월 15일 죄인으로 죽음을 당했다. 그에게 신앙을 권유한 사람은 같은 횡성 매우실의 박도현이라고 하였다. 강릉출신이 횡성으로 이거한 배경에는 천주교 발상지인 횡성의 풍수원으로부터 평창, 강릉으로 이어지는 천주교 유입경로를 재확인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자료] 좌포청등록

[원문] 戊辰五月十五日 罪人 金性烈 年四十七 邪號 바오로 物故
金性烈矣身, 本以江陵胎生, 移接於橫城梅于室, 爲七年之間矣. 聖敎, 則本不受學, 而伊時矣身偶然得病, 幾至死境是乎所, 同里朴道顯爲 名漢慫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