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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춘천교구

교회사 자료실


우리 연구소의 상임연구원의 발표물입니다.

그리고 두번 째 첨부는 이 발표에 대한 우리 연구소 연구위원이신 방동인 선생님의 글입니다.


파일 다운로드:  포도청등록에 나타난 병인박해기 강원지역 인물 고찰.hwp



[포도청등록]에 나타난 병인박해기 강원지역 인물 고찰



이원희(강원대)


<목차>

1. 머리말

2. 병인박해 이전 강원지역 관련 인물

3. 인물에 대한 고찰

4. 맺음말



1. 머리말

1784년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이를 피해 지역으로 이주하는 이들을 발생시켰고, 지역으로 이주한 이들은 교우촌을 만들어서 생활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병인박해로, 1866년부터 1873년까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나 1879년까지도 그 여파는 이어졌다.

이 시기 천주교인의 신앙에 대해서 고찰할 수 있는 자료로는 병인치명사적, 치명일기(致命日記),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 박순집증언록 등이 있다.

포도청등록은 포도청에서 취급한 각종 사건에 관한 기록으로, 1775년(영조 51) 6월부터 1887년(고종 24) 4월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중에는 도피죄인 추포(追捕)에 관한 건, 향곡(鄕曲)에서 무리지어 요망한 말로 평민을 현혹한 자들에 관한 건 및 이양선(異樣船)과 몰래 통한 죄인들을 공초(供招)한 기록과 천주교를 신봉한 사학죄인(邪學罪人) 공초기록 등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한 심문기록이 실려 있다. 당시 천주교인들은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았고, 포도청등록은 그 신자들에 대한 자세한 심문 기록으로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기존의 박해기 인물에 관한 연구가 교회쪽 자료로 이루어진 것이 많은 것에 비해 포도청등록은 관(官)측 자료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포도청등록을 가지고 천주교의 탄압과 순교자에 대해 분석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포도청등록에 나타난 강원지역 인물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본고에서 참고한 포도청등록은 1985년 보경문화사에서 발간한 영인본이며, 주로 <좌포도청등록>14책 무진(戊辰, 1868) 4월부터 11월까지의 심문기록과 16책 경오(庚午, 1870) 2월의 기록이다.

2. 병인박해 이전 강원지역 관련 인물

강원지역의 천주교 전래는 1784년 조선에 수용된 이후 시작된 천주교 탄압과 관련이 있으나 이와 관련된 기록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신유박해 당시 용인에서 강원도로 이주한 신태보가 샤스탕(Chastan) 신부의 명에 따라 감옥에서 자신의 경험과 천주교인에 대하여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 전해지는데 그가 강원도로 가게 된 경위에 대해서 쓴 글을 아래와 같다.

「박해가 마침내 가라앉기는 하였으나 우리는 서로 뿔뿔이 헤어져 있었고, 모든 경문책(經文冊, 기도서)을 잃었다. 어떻게 신자 본분을 지킬 방법이 있겠는가. 나는 우연히 몇몇 순교자 집안의 유족들이 용인 지방에서 산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찾아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 결과 마침내 그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나이 먹은 여인들과 겨우 아이 티가 가신 몇몇 소년들뿐이었는데, 모두 합하여 서로 친척간이 되는 세 집안이었다. 그들은 아무 의지할 것도 없으며, 외부 사람들과는 감히 말을 건넬 생각도 못하고, 천주교 이야기만 나오면 너무 무서워서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 나는 거기에서 40리 되는 곳에 살고 있었는데, 그 때부터 8일이나 10일에 한 번씩 서로 찾아 다녔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한 집안 식구나 다름없이 서로 깊고 진실한 정이 들게 되었다. 우리는 성서를 다시 읽기 시작하였고, 주일과 축일의 의무를 지키기 시작하였다. … 우리는 모두 외교인들 가운데 살고 있었고, 외교인들의 눈이 사방에서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나는 저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40리 길을 밤에 몰래 걸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외교인들은 내 성명과 사는 곳과 누구와 상종하는지를 알려고 하였다. 이런 것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 우리는 함께 이사를 하여 다른 곳에 가서 외딴 조그마한 마을을 이루어 살 생각을 하게 되었다. … 내가 생각하고 있던 곳은 인적이 드문 강원도 산골이었기 때문이다. … 떠나는 날짜를 정하려 할 때에 다섯 집안이 저마다 먼저 가겠다고 하니, 그들은 이 지옥에서 하루바삐 벗어나 낙원을 찾아 가겠다는 일념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 우리의 차림은 매우 수상쩍었다. 그것은 양반의 행차도 아니고 평민의 행렬도 아니었다. … 어떤 자들은 입가에 조롱하는 듯 한 미소를 지으며, “저건 틀림없는 천주학쟁이 집안이다”하는 말을 뇌이기까지 하였다. … 8일 동안을 무척 고생스러운 길을 걸어 우리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

위의 글에서 신태보가 가고자 한 곳이 강원도이고, 용인에서 8일동안 말을 타거나 걸어서 도착하여 그들 나름의 생활을 영위하고 살았으나 그 곳이 정확하게 강원도 어디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이때부터 강원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고 통상 여기고 있다.

천주교 탄압을 피해 신자들이 전국으로 이주하였고 강원지역도 마찬가지이므로, 병인박해 이전 천주교 탄압과 강원지역에 관련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천주교 탄압에 강원지역에 대해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801년 천주교 탄압 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이다. 사학징의를 토대로 하여 1801년 박해로 강원지역에서 잡혔거나 강원지역으로 유배 온 사람들을 살펴보면 다음 【표 1】과 같다.

【 표 1 】 사학징의에 보이는 강원지역 관련자 명단

이 름

출신지

유배지

죄 명

기타

고윤득(高潤得)

고성

곽진우(郭眞宇)

삼척

형조 압송

구애(九愛)

간성

권철신, 이윤하의 婢女

김경노(金景老)

공주

통천

사학에 물들어 十誡를 입으로 외우고 다니고 다년간 깊게 홀린 죄

김연손(金連孫)

전주

인제

유항검의 婢夫, 꼬임을 당해 사학을 배운 죄

김희달(金喜達)

평창

김의호의 아들

방성필

낭천

옥과

사시룡(史時龍)

전주

양구

유항검의 婢夫, 꼬임을 당해 사학을 배운 죄

손동이(孫同伊)

금구

평창

유항검의 고을 사람으로 꼬임을 당해 사학을 배운 죄

염종득(廉宗得)

김제

낭천

유항검의 소작인, 유항검에게서 사학을 배운 죄

정복선(鄭卜先)

덕산

횡성

정산필에게 사학을 배운 죄

정분이(鄭分伊)

정선

김득호의 처

유중덕(柳重德)

전주

회양

유항검의 당질로 사서를 전해 익힌 죄

유한징(兪漢徵)

덕산

통천

정산필에게 사학을 배운 죄

윤종백(尹鍾百)

강릉

윤지승의 아들

이종화(李宗和)

고양

김화

사학을 성토하는 통지문을 찢어버리고, 여러 선비를 능욕하면서, 사학의 무리를 지지한 죄

1805년 풀려남

이항덕(李恒德)

연풍

강릉

이기연의 친조카로, 사학을 이어받은 죄

일선(日先)

김화

유항검의 奴, 꼬임을 당해 사학을 배운 죄

증분(曾分)

금갑도

(金甲島)

황심의 처, 관비로 삼음

채홍득(蔡弘得)

함흥

김화

사학괴수 이기연의 流配所와 서로 통하여 돈과 쌀을 주선해서 공급한 죄

최기인(崔起仁)

양양

최수천(崔壽千)

무장

횡성

숙부인 최여겸에게 사학을 배운 죄

황가록(黃可祿)

사도(蛇島)

황심의 아들, 관노로 삼음

5살

황오록(黃五祿)

남해

황심의 아들, 관노로 삼음

2살

황차돌(黃次乭)

이천(伊川)

【표 1】에 보이는 이들은 모두 26명인데 이중에서 강원지역을 연고로 하는 사람은 방성필과 곽진우 두명이다. 곽진우는 삼척 출신이고 방성필은 낭천 즉 지금의 화천 출신이다. 이들은 강원지역 출신으로 잡혔기는 하나 구체적인 죄명은 드러나지 않는다.

방성필과 곽진우를 제외하고 강원지역 출신이 아니면서 잡힌 사람으로는 증분과 황가록, 황오록 형제를 들 수 있다.

증분, 황가록, 황오록은 위의 표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황심(黃沁)과 관련된 인물이다. 황심은 1797년부터 3년간 세 번에 걸쳐 북경에 가서 조선 교회의 서신을 북경 주교에게 전하였으며, 1801년 8월 26일 춘천에 있다가 배론으로 와서 황사영을 만났으며,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그해 10월 23일 역모동참죄(逆謀同參罪)로 처형되었다. 사학징의에는 이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801년 11월 8일 의금부가 보고하기를,

춘천부사 조석중(曺錫中)의 보고서와 관계 문건을 받으니, 모역동참죄인 황심의 연좌죄인을 조사해 냈다고 합니다. 그의 처 증분은 전라도 진도군 금갑도에 연좌시켜 관비로 삼고, 그의 아들 황가록은 다섯 살이고, 황오록은 두 살이므로 모두 사형당할 나이에 이르지 않았으니, 형률에 따라 교수형을 면제시키되, 황가록은 전라도 흥양군 蛇島에, 황오록은 경상도 남해현에 모두 관노로 삼으십시오. 이 죄인들이 지금 춘천부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니, 형조에 명하여 각기 유배지에 압송함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지시하기를 “허가한다”고 했다.

1801년 11월 9일 본 형조가 보고하기를,

의금부의 보고서에 근거하여 모역동참죄인 황심의 처 증분의 사건에 관한 명령이 내렸습니다. 이들 죄인들이 지금 강원도 춘천부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니, 그들을 각기 유배지에 압송함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지시하기를 “알았다”고 했다.」

위의 의금부의 보고에 의하면 황심의 처와, 아들들이 강원도 춘천에서 잡혀 춘천부에서 추국을 당한 것을 알 수 있어, 당시 춘천부 북산 일대에 황심이 가솔들을 이끌고 숨어 있을 만큼의 천주교인이 살고 있었거나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방성필을 비롯한 5명을 제외한 21명은 각지에서 강원지역으로 유배왔고 이들의 유배지는 고성, 간성, 양구, 평창, 양양, 횡성, 김화, 강릉, 정선, 인제, 낭천, 회양, 통천 등 강원지역에 골고루 퍼져있으나 이후 이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신유박해 이후 강원지역에서 천주교와 관련되어 잡혀서 사형을 당한 사람으로 1815년에 잡힌 김강이(金鋼伊)를 들 수 있다.

1815년의 천주교 탄압은 지역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이 탄압은 경상도에서 시작되었는데, 경상도에서 교우들의 재산을 갈취하고자 한 배교인이 교우촌을 찾아다니다 교우들이 그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지 않자 관헌에게 밀고를 함으로써 발생하였다. 이 탄압은 안동과 경주, 대구 등지로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강원지역으로 도망한 교우가 많아지면서 탄압의 여파가 강원지역까지 번진 것이다.

김강이는 충청도 서산지방에서 태어나 1794년 이전에 교리를 듣고 입교하여, 재산을 노비들에게 나누어준 후 동생 김창귀와 함께 전라도 고산으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이곳에서 주문모 신부를 알게 되어 더욱 믿음이 강해졌다. 신유박해 당시에는 고산 지방 교우들의 지도자로 여겨졌고, 포졸들은 그를 잡기 위하여 인상의 특징을 그린 것을 가지고 1년 이상 찾아다니기도 하였다. 이에 김강이는 몸의 안전을 꾀하고 생계유지를 위해서 등짐장사를 하며 몇몇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생활로는 신앙생활에 진보가 없음을 깨닫고 아우를 데리고 경상도 진보군의 머루산으로 숨어들어가 몇 집의 교우들과 함께 조그마한 교우촌을 형성하고 비교인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곳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울진으로 들어가서 살던 중 1815년 경상도에서 탄압이 일어나자 그의 집 하인이었던 자가 밀고하여 4월에 안동 포교에게 잡혀 안동 옥으로 갔다. 안동 옥에서 여러 번 문초를 당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았고, 5월에 동생과 함께 원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동생을 비롯한 여러 교인들이 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나 김강이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배교하지 않은 채 사형을 언도받았다. 관습에 따라 김강이는 결안(結案)에 서명하였고, 이 결안은 임금의 윤허를 받기 위하여 서울로 보내졌고 윤허가 내려졌다. 그러나 갖은 형벌로 몸이 쇠약해진데다가 이질까지 겹친 김강이는 사형집행을 하지 못한 채 1815년 11월 옥사하였다.

이후의 박해로는 1839년의 기해박해를 들 수 있다.

기해일기(己亥日記)에 의하면 강원도에는 斬首致命한 자가 1명, 옥중치사자가 2명, 定配者가 2명이라고 언급되어 있으나, 기해일기에서 이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기해박해 당시 강원지역 관련 인물로는 최해성과 그의 고모인 최 비르지타, 그리고 조신철을 들 수 있다.

최해성(崔海成, 일명 양박, 1811~1839, 요한)은 기해박해 당시인 1839년 1월 말경 원주시 부론면 손곡2리 서지 마을에서 체포되어 원주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최해성은 최경환(崔京煥, 보명 永訥, 1805~1839, 프란치스코)의 먼 친척으로, 본래 충청도 홍주 다락골에서 살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그의 조부가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의 서지로 이주하였고, 이곳에 작은 교우촌을 이루었다.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21회의 심문과 18회의 고문을 당한 그는 옥에 갇힌 지 8개월 후인 그해 9월 6일(음 7월 29일) 29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최해성의 고모인 최 비르지타(1783~1839)도 조카를 면회하러 감옥에 갔다가 잡혀 갖은 형벌과 고문을 받은 뒤, 그해 11월 3일 순교하였다. ‘덕철’(德喆)로도 불리던 조신철은 강원도 회양(淮陽)의 상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또 아버지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탕진하자 출가하여 한때 스님이 되었으나 23세 때 동지사(冬至使)의 마부가 되었으며, 30세 쯤에 유진길(劉進吉), 정하상(丁夏祥) 등과 알게 되어 입교하였다. 북경에서 세례, 견진, 고해, 성체성사를 받고 계속 동지사의 마부로 일하면서 북경 교회와 연락을 취하며 나 베드로(모방) 신부, 정 야고보(샤스탕) 신부,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 등을 입국시키는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조신철은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6월 어느날 처가를 습격한 포졸들이 어린 젖먹이까지 잡아가는 것을 보고, 포청까지 따라가 자수하였다. 신문 중 그는 처가에 숨긴 성물과 성서 때문에 매우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고, 형리들은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며 그에게 더욱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9월 26일, 45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3. 인물에 대한 고찰

본고에서 참고한 포도청등록은 1985년 보경문화사에서 발간한 영인본이며, 주로 <좌포도청등록>14책 무진(戊辰, 1868) 4월부터 11월까지의 심문기록과 16책 경오(庚午, 1870) 2월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서 보이는 강원지역 관련 인물은 모두 19명이다. 이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표로 정리하면 다음 【표 2】와 같다.

【표 2】 포도청등록에 나타난 강원지역 관련 인물

성명

나이

출신지

입교 동기

입교 시기

심문 날자

비고

조사현

(曺士賢)

44

횡성

이계원의 권유

1845년 경

무진 4월

(1868년)

登村에 피하여 있다가 체포

김입돌

(金立乭)

20

자암

가족의 권유

1858년 경

무진 윤4월

강릉에 피신한 적이 있음

조종구

(趙宗九)

21

원주

권경원에게 배움

1857년 경

무진 윤4월

박도현

(朴道顯)

61

횡성

남상교의 권유

1843년

무진 윤4월

윤유근

(尹有根)

76

횡성

박성고에게 배움

1858년 경

무진 윤4월

윤경여

(尹敬汝)

37

횡성

부모에게 배움

1858년 경

무진 윤4월

윤유근의 자(子)

聖浩經 수학

박흥진

(朴興眞)

37

광주

당숙에게 배움

1864년 경

무진 윤4월

횡성으로 移接

김아기

(女)

21

횡성

시집(尹氏)의 권유

1865년 경

무진 윤4월

시아버지와 남편이 신자로써 처형당함

심아기

(女)

22

횡성

부모에게 배움

1858년 경

무진 윤4월

안아기

(女)

24

횡성

무진 윤4월

신자들이 살던 곳에서 잡힘

이유일

(李惟一)

50

연풍

아버지에게 배움

1838년 경

무진 5월

강릉 계촌으로 피해 있다가 잡힘

심능석

(沈能錫)

50

횡성

박성고에게 배움

1838년 경

무진 5월

강릉 계촌으로 피해 있다가 잡힘

전성렬

(全性烈)

47

강릉

박도현에게 배움

무진 5월

박성윤

(朴聖允)

50

횡성

박도현에게 배움

1853년 경

무진 11월

이의현

(李義賢)

35

횡성

박도현에게 배움

무진 11월

유소사

(劉召史)

56

안동

박도현에게 배움

1863년 경

무진 11월

배론 출가 후 횡성으로 이사

박소사

(朴召史)

56

횡성

박도현에게 배움

1848년 경

무진 11월

김석조

(金石祚)

65

양구

이치영 권유로 배움

1845년 경

경오 2월

(1870)

12단 공부

구원달

(具元達)

33

양구

이치영 권유로 배움

1852년 경

경오 2월

문답 1편 수학

위의 【표 2】에 나오는 인물을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사현은 횡성 태생으로 종기와 관련된 의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동네에 거주하던 이계원(李季元)의 권유로 교를 배우고 영세를 받아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을 가졌다. 또한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안주교를 만나 고해를 보기도 하였으나, 정부의 박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천주교에 관한 공부를 폐하였으나 잡힌 이후에는 배교하지 않고 물고(物故)당하였다. 조사현의 심문기록에서 나오는 인물로는 같은 동네에 살던 이계원과 서여심(徐汝心), 오치심(吳致心) 부자(父子)가 나온다.

김입돌은 자암 태생으로 10여년 전 어머니 생존시 정의배(丁義培)의 집에서 영세를 하고 세례명을 마두노(馬頭魯)라고 하였다. 정의배는 남종삼, 홍봉주 등과 연결된 인물이며, 김입돌은 정의배의 지휘로 안주교, 장주교를 만났고 강릉으로 피해 있을 때에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최가와도 만난 것을 되어 있으며 물고당하였다.

조종구는 원주 태생이며 같은 동네에 거주하던 권경원에게서 교를 배웠고 서양인 권신부를 만나 영세하고 세례명을 다두(多頭)로 하였다. 사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공부를 그만두었다.

박도현은 횡성 태생이며, 의업에 종사하고 있었고 계묘년(1843년) 제천에 거주하는 남상교의 병을 보러 갔다가 그의 권유로 입교하게 되었고, 제천에 거주하는 김천길(金千吉)의 집에서 영세하고 세례명을 베드로라고 하였다.

윤유근은 횡성 읍내 태생이며 박성고(朴性皐)에게 교를 배우고 영세, 세례명을 요셉(妖習)이라고 하였으며, 농업에 몰(沒)해서 공부를 폐한지가 오래되었다고 하였으며 교우나 양인(洋人)을 본적이 없다고 하였다.

운경여는 윤유근의 아들이며, 27세에 천안에 거주하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조가(曺哥)의 집에서 영세를 받고 세례명을 도마(道馬)로 하였으며 성호경 1편을 수학하기도 하였으나 그 후 10여년 동안 교(敎)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박흥진은 본래는 광주 태생이지만 15년전인 1853년경 횡성으로 이사하였고 1864년경에 이미 죽은 당숙인 명여(明汝)한테 교를 배웠으며 영세하고 세례명을 바오로로 하였다. 제천에 거주하는 정임여(丁任汝)의 권유로 서양인 박신부에게 고해를 하기도 하였으나 정부의 박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천주교에 관한 공부를 폐하였으나 후회한다고 말하고 있다.

김아기는 18세에 동네의 윤가(尹哥) 집으로 출가하여 교를 믿게 되었고, 천주경에 대해서는 한 구절도 알지 못하여 이가(李哥)의 집에서 말로써 성경을 배워 마다리(馬多里)라는 세례명을 받고 영세를 하였지만 수년전에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하늘과 땅에 배척을 맹세하였다. 금번에 시아버지와 남편은 신자로 처형을 받았다고 하였다. 동일 시기에 잡히고 윤씨 집으로 출가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윤유근의 며느리이자 윤경여의 부인으로 생각된다.

심아기는 횡성 마일(麻日) 태생이며 12세에 부모에게서 교를 배웠고, 14세에 동네에 사는 최원칠(崔元七)에게 출가한 이후에 배교하였다.

안아기는 횡성 태생이며 18세에 최원칠(崔元七)의 동생에게 출가하였고, 가부상(家夫喪)을 당한 후에 시숙(媤叔)인 원칠의 동네로 이사하였고 이곳에서 잡혔다.

이유일을 연풍 태생으로 소공동(小公洞)에 살고 있으며, 30세에 이미 죽은 아버지에게서 배웠고 이어 이미 죽은 이진녀(李辰汝)에게서 안토니오(安敦)로 대세작호(代洗作號)하였다. 10여년전에는 서양인 안주교를 장주교의 집에서 만나고 그에게 견진을 받았으며, 강신부를 장주교 집에서 만나 고해함이 10여 차례나 되었다. 병인박해 당시 겁이나 강릉 계촌으로 피했다가 잡혀 물고하였다.

심능석은 횡성 태생이며, 을사(1845)년경에 용인 산의실(山義室)에 이사하였고, 1838년 광주에 살던 박성고(朴性皐)에게 배우고, 양인 정 신부를 자기 집에서 만나 영세(領洗)ㆍ작호(作號)하고, 또 고주교를 자기 집에서 만나 견진하였으며, 그 후 강 신부, 김 신부, 장 주교를 각 처에서 만나 간간히 고해를 하였다. 임진(1862)년 경에 강릉 계촌으로 피했다고 잡혔으며 교인은 알 수 없다고 하고 물고하였다.

전성렬은 강릉 태생으로 횡성 매우실(梅于室)에 이사하여 7년여간 살았으나 이때 성교를 배우지는 않았다. 우연히 병을 얻어 생사의 지경을 오갈 때 같은 동네에 사는 박도현의 권유로 영세를 받고 세례명을 바오로로 하였다. 병 중에는 이 학문을 알지 못하였고, 병이 나은 후에는 선한 것인지 선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어 애매하다고 하였으나 물고되었다.

박성윤은 횡성태생으로 15년 전에 같은 동네에 사는 이미 죽은 박도현에게서 교를 배워 요안으로 세례명을 하였으나 집안의 권유로 이미 종교를 폐하였다고 하였으나 이제 잡혔으니 처분을 바란다고 하고 물고되었다.

이의현은 횡성 태생으로 박도현에게서 교를 배우고 바드리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나 친척들의 권유로 교를 폐한 것이 후회되며 지금 잡혔으니 처분을 바란다고 하고 물고되었다.

유소사는 안동 태생이나 17세에 제천 배론의 이가(李哥)에게 출가하였고 이후 횡성으로 이접하였다. 횡성으로 이사한 후에 박도현에게서 교를 배워 가타리나로 세례를 받았고, 박도현의 지휘로 제천에서 양인 박신부에게 1차례 고해도 하였으며 사형이 내려도 할말이 없다고 하고는 물고되었다.

박소사는 횡성 태생이며 20년전에 박도현에게서 교를 배워 바바라로 세례를 받았고 도현의 권유로 양인 권 신부를 횡성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윤가 집에서 만나 1차례 고해하고 견진을 하였으며 배교는 없다고 하고는 물고되었다. 박도현의 권유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윤가 집에서 권신부를 만났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윤유근의 집으로 추정된다.

김석조는 양구 후동면 태생으로 25년전에 광주에 사는 이치영의 권유로 천주교에 관한 책을 처음 공부하였고 12단을 2년 동안 공부하였다. 양인 권신부에게 영세하여 세례명은 요한(妖昻)으로 하였고 박신부에게 2차례 고해를 하기도 하였다.

구원달은 양구 후동면 태생으로 김석조와 같은 마을에 살고 있으며 15세에 천주서(天主書) 중 문답1편을 수학하였고, 광주에 사는 이치영의 지휘로 양인 권신부에게 3차례 고해를 하기도 하였다. 지금 공부를 폐한지는 오래이나 이미 죄를 범하였으므로 처분을 바란다고 하였다.

위의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잡힌 이들의 태생을 보면 대부분은 횡성이라고 되어 있어, 1886년 당시 강원지역에서 다른 지역보다는 횡성지역이 교세가 강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들의 입교 경위는 대부분이 박도현에게서 배웠다고 되어있다.

좌포청등록에 남아있는 박도현의 기록에 의하면, 본래 횡성 태생으로 의업에 종사하고 있다가 1843년경에 제천에 있는 남상교의 병을 보러 갔다가 그의 권유로 입교하였다고 되어 있다. 남상교는 병인박해의 원인이 되는 <방아책 건의문>의 양식을 갖춘 형태인 <새 건의문>을 작성해서 흥선대원군을 만난 남종삼의 아버지이다. 박도현이 제천에 있는 남상교에게서 교를 배웠다는 것은 당시 천주교인들간의 교류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위의 인물들 중 윤유근, 윤경여는 부자지간이며, 김아기는 시아버지와 남편이 신자로 처형되었다고 하고 윤씨 집으로 출가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가족으로 생각된다.

또한 박소사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윤가 집이라고 표현한 것도 윤유근의 집으로 생각되며, 최원칠과 그 동생은 표에서 보이지 않으나 그의 부인인 심아기와 안아기는 보이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이 종교를 갖지는 않았지만 교우들이 모여사는 동네에 살았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만일 이들이 교우들이 아니었다면, 병인박해 당시 횡성에 형성되었던 교우촌은 교우들만이 공간이 아니라 교우와 비교우가 섞여있는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4. 맺음말

포도청등록에 보이는 강원지역 관련 인물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 글을 통하여 밝혀진 사실 몇가지 만을 요약하면서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병인박해 시기와 관련하여 포도청 등록에 나타나는 강원지역 관련 인물은 모두 19명이다. 이들 중 11명의 태생지가 횡성으로 가장 많으며, 양구 2명, 원주 1명이다. 그리고 나머지 5명 중 3명은 강릉으로 도피해있다가 잡힌 사람이며 2명은 횡성으로 이사한 사람들이다.

이들 19명중 5명이 여성이며 나머지 14명은 남성이고 이들 중 포도청등록에 물고(物故)라고 명확히 기재되어 있는 인물은 9명이다.

강원지역 전체 중에서 횡성지역에서 잡힌 이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횡성지역의 교세가 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우선 포도청등록에 나타난 인물 자체에 대해서 고찰하였으나, 치명일기나 병인치명사적, 박순집증언록, 추안급국안 등의 자료를 통해 이들의 교유관계 및 다른 기록을 찾는 작업도 필요하다. 이 작업은 발표 후 보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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