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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1738 ~ 18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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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블뤼 주교의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pp. 104~105.

서울, 1801년 음력 2월 26일


1801년 신유년 음력 2월 26일에 서울에서 천주교 신자 6명이 참수당했는데, 즉 홍교만 아우구스티노.

아우구스티노는 오래 전부터 (조선) 왕국에서 요직을 맡아 수행해 온 남양(南 陽) 홍씨 양반 집안의 자손이었다. 그는 1738년에 태어났는데, 그가 습득한 지식과 그의 재능에 겸비하여 그의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은 모두로부터 주목받고 또 존경받게 하였다.

수도 서울을 떠나 그는 그리 멀지 않은 포천(抱川) 고을에 정착하러 갔는데, 머지 않아 조선에 천주교가 도입되었고, 그는 아마도 그 당시 그의 집안과 인척 관계를 맺은 양근의 권씨 집안에 의해 (천주교 교리를) 배웠던 것 같다. 처음에 막연하고 피상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천주교를 택하지 않았으나, 조금 지나 모든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난 그는 천주교 (교리)를 열성으로 실천하기 시작했고, 주(문모) 신부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종교적인 일을 위한 열의가 배가되었다. 진사에 합격하였고,

게다가 눈앞에 화려한 미래가 있는데도 천주교인이 되자마자 그는 더 이상 인간적인 명예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그이 비신자 친구들과의 잦았던 교류도 단절하였는데, 이는 많은 이들로부터 비난과 질책을 불러일으켰으나 그는 거기에 거의 개의치 않았다.

가족을 가르치는 데 열중한 그는 가족들로 하여금 종교의 본문을 실천하도록 이끌었으며, 도처에서 쉬는 신자들을 권면하려 애썼고, 많은 비신자들을 입교시켰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그의 사랑은 외관상에 나타났으며, 생계 유지의 곤란함도 그로 하여금 평온하고 기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을 막지 못했을 만큼 그는 자신이 처한 모든 궁핍함을 기꺼이 감내하였다. 기도와 묵상에 전념한 그는 때대로 잠을 자거나 식사하는 것을 잊곤 하였다. 낮에는 서적을 베끼거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데 전적으로 열중하였으며, 저녁에는 모든 천주교인들을 모아놓고 설교하거나 끈기 있게 권면하였다.

박해가 크게 일어나자 그는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기를 기대 할 수가 없었으므로 우선 박해를 피하기 위해 도피하였으나, 이어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알고는 결심을 하고 자신의 집으로 나 있는 길을 다시 택하였다. (그러나) 그는 거기 도착할 시간조차 없었다. 도중에 포졸들을 만난 그는 동행하고 있던 아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어떠한 동요도 나타내 보이지 않았고 침착함을 온전히 유지하였다. 그의 아들은 포천으로 보내졌다. 그는 수도 서울로 인도되었고 거기서 신문과 혹독한 형벌들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그는 이것들을 용기 있게 견디어 냈으며, 재판 기록은 과연 우리에게 그에 대한 찬사문이 되어 있는데, 간단히 말해서 그 기록에는 아우구스티노가 기쁜 마음으로 죽기를 결심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12일 후 1801년 신유년 음력 2월 26일(양력 4월 8일)에 그는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64세였다. 신앙을 고백하는데 있어서 그의 항구심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2)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 pp. 101 ~ 102.

음력 2월 9일 위기에 처해 있던 당파의 주요 관료들을 체포하기 위해 서류를 갖추어 영장이 발부되었다. 〔포조들이 관료들을 체포할 수 없었고, 관료들이 기소되었을 때에는 기소된 관료를 담당하는 재판부의 하급 관리 한 명을 보내고 기소된 관료를 그를 따라가야한다.〕……

14일에는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그의 아들 (홍인) 레오와 함께 체포되었는데, 레오는 고향 마을인 포천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서울이나 지방에서 체포된 교인들을 모두 금부로 이송하였다. 거리마다 포졸들의 왕래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일 사이가 없었다. 금부와 좌우 양 포도청과 형조의 감옥은 모두 초만원을 이률 정도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3 ) 다블뤼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 pp. 107 ~ 110.

그리고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역시 붙들려 있었는데, 그 또 한 오래 전부터 대대손손 이 나라의 이 나라의 요직을 맡아 수행해 오던 남인 출신의 양반 가문 후손이었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에 학식까지 갖추어, 그는 모든 이로부터 존중되고 존경받았으며 진사급을 획득하였다. 그는 서울을 떠나 거기서 8~10리 떨어진 포천에 정착했고,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온 직후에 천주교에 대해서 배웠는데, 아마도 사돈 사이였던 양근의 권씨 가문으로부터 배웠던 것 같다. 그는 즉시 천주교에 입교하지는 않았으나, 좀 더 후에 아들 레오로부터 설명을 듣고 재촉을 받아 마침내 진리를 알아보고 열심히 실천하기 시작하였으며,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단 한순간도 변한 적이 없었다. 그는 비록 훌륭한 입지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인간적인 성공에는 더 이상 생각이 없었고 수많은 비신자 벗들과의 교류를 끊었는데, 그의 행동이 초래할 비난과 힐책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본문을 다하고 가족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면서도 그는 쉬는 신자들을 회개시키고 천주교를 전파하는 데 힘썼으며, 그 결과로 그의 집에 모인 이 지방의 교우들을 권면하느라 자주 밤을 지새곤하였다. 그가 천주교의 일에 전혀 관여한 적이 없었는데 적들은 한편으로 그의 이름에서 일종의 원죄를 보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종교가 가증스러운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1801년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찾으러 다닐 것이라는 것을 미리 내다본 그는 며칠 동안 숨어 있었으나, 오랫동안 피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하느님의 명을 기다리기로 결심하고 돌아가는 길에 포졸들을 만나 체포되어 서울로 끌려갔다. 그는 침착함과 고요함을 잃지 않고 꿋꿋하고 형벌을 감내했으며 사형 판결이 이내 내려졌다. ……

주요 인물들은 〔1801년 4월 8일〕 음력 2월 28일(26일)에 사형 선교를 받고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이승훈 베드로, 최필공 토마스, 최창현 요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홍낙민 루카,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홍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관한 세부 내용은 우리에게 전해진 바가 전혀 없지만, 그가 자신의 종교를 위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한결같이 죽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그를 신문했던 관리들 스스로 칭송한 흔적이 남아있다. 그는 64세였다.


4) 황사영의 <백서>

① 31행

이에 공경 회의에서 대역부도로 논죄하여 (1801년 2월) 26일 (정약종) 아구구스티노와 최(창현) 요한, 최(필공) 토마스,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낙민(루카), 이승훈(베드로) 여섯 사람을 모두 참수형에 처하였습니다.

② 40~41행

홍교만 하비에르는 권철신의 외숙으로 경기도 포천현에서 살았습니다. 젊어서 진사에 올랐고 뒤늦게는 경학을 좋아했는데, 권씨 집안에서 천주교를 믿자 그 역시 믿고 따랐으며, 벼슬할 생각을 끊어버리고 고향 이웃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그이 딸이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에게 시집을 간 일로 인해 평소에 남들의 비방을 받아왔는데 이때 체포되어 순교하였습니다.

5) 『 추안 및 국안』

① 신유(1801년) 2월 13일

같은 날 문초 죄인 정약용. 나이 40세.

다시 추문할 것을 아롭니다.……

공술하기를,

“교주는 진실로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데, 소문으로 말하자면 김백순(金伯淳)이라고 하는 이름이 또한 파다하며, 포천 홍교만 또한 유명한데 저의 형과는 사돈간이며 홍주만(洪周萬)의 동생입니다.”

② 신유 2월 13일

도사 윤지겸(尹之謙)이 죄인 홍교만을 붙잡아와서 가두었다.

③ 신유 2월 14일

같은 날 문초 죄인 홍교만. 나이 64세.

아룁니다.

“ 너는 사학의 소굴에 앉아서 사학의 연락책이 되었다. 사학 무리의 서책이 모두 너의 집에 모아져 있었고, 첨례에 쓰는 휘장과 도구들이 모두 너의 집에 숨겨져 있었으며, 예수〔耶蘇〕의 상본 또한 너의 집에 있었으니, 만일 사학의 주인으로 말하자면 네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그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의 무리가 신부 ․ 대부라 하고, 또 스스로 그 사람을 베드로〔伯多〕 ․ 하비에르〔沙勿〕 등 허다한 이름으로 구별하고 있음이 모두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다. 비록 숨기려고 할지라도 어찌할 수가 없을 것이니, 하나하나 바른 대로 고하라.”

고 추문하였더니,

“저희 집에서 압수당한 문서는 과연 저의 책자입니다만, 그것이 사학이라는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책자가 이미 너의 물건인데, 그중에서 사설을 자세히 베낀 것을 네가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느냐?”

하였더니 , 공술하기를,

“신해년 이전에 아직 금령이 내려지지 않았을 때, 아이가 이것을 옮겨 베낀 것이 있어 저 또한 그것을 보았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너는 이미 이런 책을 보았으니 사학의 도당이다. 네가 어찌 모를 리가 있겠느냐?”

하였더니, 공술하기를,

“정약용이 이 학문을 하였지만, 이 학문을 하는 자는 으레 숨기니 비록 사돈 사이라도 또한 어찌 이를 알겠습니까?”

하였다. 묻기를,

“네가 이미 이 책을 보았으니, 이 학문의 옳고 그름을 변별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대로 바르게 고하라.”

하였더니, 공술하기를,

“그 학문을 그르다〔邪〕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학문은 무릇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敬天畏天〕것을 위주로 하고 있으니, 어찌 그르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묻기를,

“너와 함께 이 학문을 한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하였더니, 공술하기를,

“따로 고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 밖에는 달리 아뢸 말씀이 없으니, 헤아려 처분하소서.” 하였다.

의계하기를……

“죄인 홍교만은 어리석고 미련하며 미혹됨이 심하여 사학을 그르다고 하지 않으면서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으며, 그의 도당 역시 지명하지 않고 단지 정약용만을 고하니, 그 정상을 살펴보건대 대단히 분하고 놀랍습니다. 청컨대 엄형을 가하여 사실을 밝혀내도록 하소서.”

④ 신유 2월 15일

같은 날 문호 죄인 홍교만. 나이 64세,

다시 추문한 것을 아룁니다.

“너는 앞서의 공초에서 이미 사학을 그른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소굴과 도당을 한결같이 바른 대로 고하지 않았다. 너는 약종의 친사돈으로 그와 번갈아 교주가 되었으니, 누구누구가 소굴이고 누구누구가 도당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너의 문서로 보더라도 (그 문서 중의 ) 언문 서찰에서 논한 것이 모두 사학의 말인데 이는 누구의 서찰인가? 그 밖에 사학에 대해 말한 글들이 한결같이 충분치 않으니 감히 전과 같이 속이지 말고 속히 바른대로 고하라.”

“천지는 곧 큰 부모〔大父母〕이니 큰 부모를 섬기지 않는다면 이는 부모를 부모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니, 앞서의 공초에서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비록 약종의 친사돈이지만 궁벽한 곳에서 애초부터 왕래한 사람이 없으니 누구누구가 소굴이고 교주인지는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언문 서찰은 남정네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묻기를,

“언문 서찰 중에 ‘병사(病死) ․ 형사(刑死)는 모두 천주의 은혜’라고 한 것이 있는데, 네가 어찌 이를 알지 못하느냐?”

하였더니, 공술하기를,

“ 저는 진실로 이 편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묻기를,

“임대인은 약종의 집으로부터 책롱(冊籠)을 가지고 너의 집에 와서 머물렀으며, 서울로 옮기다가 한성부에 체포되었는데 너는 이 일의 실상을 아느냐?”

하였더니, 공술하기를,

“저희 부자는 죽은 형님의 소상(小祥)에 참석하기 위해 정월에 서울에 머물렀고, 집에는 오직 부녀자만 있었을 뿐이었으니 임대인이 왕래한 일은 아직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묻기를,

“너는 끝내 이 학문이 그릇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였더니, 공술하기를,

“도리의 큰 근본은 하늘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고, 또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고 이르고, 또 오직 상제께서 백성들에게 올바른 성품을 내리신다 하여 함께 하늘을 공경하라는 뜻을 내셨으니 어찌 이를 사학이라고 하겠습니까? 이 밖에 따로 아뢸 말씀이 없으니, 헤아려 처분하소서.”하였다.

형문 한 차례에 곤장 20도를 치고 형을 정지하다.

⑤ 신유 2월 20일

문초 죄인 홍교만. 나이 64세.

다시 추문한 것을 아룁니다.

“너는 즐겨 사학을 하면서 감히 경전(經傳)으로 그 설을 꾸미면서 끝내 그 사학이 사학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제 사학을 소탕하는 시기를 맞이해서 너와 같이 흉악하고 미혹된 무리가 어찌 참수형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빨리 자복하고 네 집안의 언문 서찰의 내력 또한 바른 대로 고하라.“

고 추문하였더니,

“저는 일찍이 이 학문의 종지(宗旨)가 ‘(상제를) 존경하며 높이 받는다’는 뜻과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세상에서 이를 사학이라 하는 것은 아마 존경의 도리와 멀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므로 사학은 아니라고 생각하옵니다.”

하였다. 묻기를,

“이 학문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예수가 강생하였다’는 설에 가탁함으로써 혹세무민하여 이적 ․ 금수(夷狄禽獸)에 귀결되게 한 죄과 때문에 사학이라 하는 것이다. 네가 감히 ‘존경’이라는 두 글자를 어려움 없이 입 밖에 낼 수 있는가?”

하였더니, 공술하기를,

“저는 예수의 학문을 정학이라 하였는데, 이제 와서 만일 예수를 그르다고 하라면, 저는 감히 진술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겠습니다. 언문 서찰을 왕복한 일은 제가 지난해에 상경하였으므로 아직 그간의 곡절을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묻기를,

“이른바 ‘예수가 강생하였다’는 설을 네가 어찌 정확하게 알며, 이처럼 독실하게 믿는 것인가?”

하였더니. 진술하기를,

“‘예수가 강생하였다’는 설은 예로부터 중국의 성현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인데, 저는 이 책을 자세히 보았으므로 그 설을 독실히 믿는 것입니다. 그 지극한 이치의 소재를 말하자면 시(時) ․ 서(書 )․ 역(易)경의 말이 모두 이와 합치하니 이를 사학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묻기를,

“이처럼 이치가 없는 말은 천고에 성현이 말하지 않은 것인데, 서양 사람이 이를 말했다고 하는 것은 이적 ․ 금수의 도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너는 어찌 성현의 말을 믿지 않고 이러한 이적의 말을 믿느냐. 네가 사느냐 죽느냐는 뉘우치든가 뉘우치지 않는가에 결판나니 이쪽인지 저쪽인지 하나를 분명히 고하라.”

하였더니, 공술하기를,

“제가 이 학문을 수십 년의 세월을 허비하여 공부하면서 비로소 얻은 것을 이제 어찌 한마디의 말로써 억지로 뉘우친다고 하겠습니까? 저는 이미 강생한 예수를 알고 있으니 이제 갑자기 뉘우쳐 ‘예수가 그르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밖에는 달리 아뢸 말씀이 없으니 헤아려 처분하소서.” 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죄인 홍교만은 감히 예수의 학문을 가리켜 정학이라 하면서 한결 같이 뉘우침이 없고 달가운 마음으로 죽고자 하니, 양심의 함닉됨이 이처럼 심한 데 이르렀으니 다시 엄한 형벌을 가하여 끝까지 사실이 밝혀지기를 기다렸다가 형률에 의거하여 처단하소서.”하였다.

⑥ 신유 2월 25일

국청에서 아뢰기를,

“홍교만은 사술을 혹신하여 약종의 무리와 함께 어지럽게 결탁하였다고 세간에 지목되었습니다. 저의 당족(當族)과 지친(至親)들이 죽이려 한다고 모든 사람이 떠들어대는 것을 귀가 있으면 다 듣고 있으니, 이처럼 흉악하고 사악한 무리는 결단코 모두 일률(一律, 즉 참수)을 시행해야 합니다. …… 홍교만은 죽어도 뉘우치지 않고 달가운 마음으로 참수형을 받았습니다.”하였다.

⑦ 신유 2월 26일

죄인 홍교만 결안 정법

6) 기타 관력 기록

① 『순조실록』권2, 원년 2월 25일 신미

홍교만은 터무니없는 요설(妖設)을 주장하여 인심을 그르친 것이 실로 이미 남김없이 드러났는데, 추국하는 마당에 이르러서도 후회하는 마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하늘을 배척하고, 그 사학을 과장하면서 (이 학문에) 그르다〔邪〕는 글자를 가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러 차례 엄중히 형신(刑訊)하였으나 시종 완강하게 거역하였으니, 이와 같은 흉패한 무리는 또한 일률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② 『순조실록』 권2, 원년 2월 26일 임신

죄인 홍교만은 사학의 서책과 예수 상본 및 첨례 때의 장막과 도구 등을 모두 그 집에 모아 놓고 망령되게 경전을 인용하여 그럴 듯하게 꾸며 그 사학이 그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형륙을 당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으니, 요사한 말과 요사한 글을 퍼뜨리고 다니면서 대중을 미혹시켰다는 다짐을 받아 정법하였다.

③ 『사학징의』 권1, 이문질

1801년 2월 8일, (형조에서) 경기 감영과 충청 감영에 보낸 공문

통고사항 : 좌포도청의 비밀 공문에 근거하여 사학 죄인 임대인, 최창현이 이름을 댄 사람들을 다음에 적어서 비밀리에 보내니. 때를 기다리지 말고 체포하여 먼저 진술서를 작성한 후에 밤낮을 가리지 말고 본 형조로 압송하여 제때에 문초하고 다스리게 하라.

다음……포천 홍교만

④ 『사학징의』 권1. 내관질

1801년 2월 13일, 포천 현감의 보고서

이 달(2월) 10일 술시(오후 7시부터 9시)에 도착한 비밀 공문에 의해서 장교와 이졸(吏卒)을 특별히 정하여 사학 죄인을 수색하여 체포하였는데, 홍 진사(즉 홍교만)는 과연 본 고을의 청량면(淸凉面)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보령 홍낙풍(洪樂豊)의 9촌 조카로, 그의 아들인 덕소(德素수)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가 없으며 알아낼 길도 없습니다.

홍 진사는 이름이 교만(敎萬)으로 작고한 판서 홍주만(洪周萬)의 동생인데, 홍교만 가속의 말에 의하면 ‘큰집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난 연말에 상경했는데 내려오지 않았다’고 하니 홍교만이 상경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포도청에 공문을 보내 함께 체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보령 홍낙풍의 9촌 조카로, 그의 아들인 덕소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본 포천현 경내의 어느 방(坊), 어느 리(里)에 와서 살고 있는지 거듭 다그쳐 물어 다시 가르쳐 주면 거행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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