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

[장익 주교 장례미사/발자취]

by 문화홍보국 posted Aug 1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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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익 주교 장례미사/발자취] 

늘 낮은 자세로 주님의 종으로 살아온 참 목자
10개 국어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교회 용어·영성 서적 한국어로 옮겨
‘성서백주간’ 국내에 도입·전파
 지속적으로 대북 지원 사업 펼쳐

2020-08-16 [제3207호, 7면] 

8월 5일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간 주님의 종 장익 주교가 8월 8일 강원도 춘천 죽림동주교좌성당에서 엄수된 장례미사에서 관 속에 안치된 채 참례자들의 배웅을 받으며 성당을 나서고 있다.


한평생 주님을 믿고 따른 장익 주교가 8월 5일 오후 6시9분 암으로 선종했다. 반세기 이상 주님의 목자로 산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짙은 향기를 남긴 인물이었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 버린 그를 추모하기 위해 장 주교의 삶과 신앙·사목 발자취를 돌아봤다. 생전 고인과 인생길 여정을 함께한 동무들에게 고인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들어봤다.


■ 삶과 신앙, 발자취

‘유약무 실약허.’(有若無 實若虛) ‘가지고 있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여기고, 가득 차 있으면서도 텅 빈 것처럼 여긴다.’ 8월 8일 강원도 춘천 죽림동주교좌성당에서 거행된 장익 주교 장례미사에서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는 이 고사성어를 언급했다. 겸손한 성품을 의미하는 이 말처럼 장 주교는 생전 “자신을 과시하거나 드러내 보이는 것을 극히 꺼렸고, 오히려 자신의 학식과 덕을 감추고 언제나 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님을 닮으려 노력했다”는 뜻이다.

장 주교는 영어·독일어·이탈리아어 등 10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도, 이를 뽐내거나 내세우지 않았다. 장 주교는 “매일 얼마나 열심히 어학 공부를 하고 있고, 어렵게 배운 언어를 잊어버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지 사람들은 몰라준다”면서도 “어려서부터 이 나라 저 나라 전전하며 공부했고 말을 안 배우면 낙제하고 쫓겨나니까 그렇게 주워들은 것일 뿐”이라며 늘 자신을 낮췄다. 선종하기 얼마 전까지도 일본어 개인 교습을 받을 정도로 어학 공부에 열심이던 그는 그렇게 배운 언어를 교회 용어들을 한국어로 바꾸는 ‘신앙 토착화’ 도구로, 외국 성인들의 삶과 신앙을 담은 책을 우리말화하는 ‘영성 서적 번역’ 도구로 사용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4년 방한했을 당시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벗이 멀리서 찾아오니)하니 불역락호(不亦樂乎·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며 인사하게 도운 것도 장 주교 솜씨였다.

건축·조각을 비롯해 문화 예술에도 높은 식견을 가진 그였지만, 으스대지 않았다. 서울 가톨릭 미술가회 담당 사제와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지식과 견문을 교회를 위해 활용했고, 춘천교구장으로서 교구 문화사목소위원회를 신설하고, 퇴임 때까지 교구 성 미술 화보집 「주님의 집, 우리의 집」 발간에 심혈을 기울이는 등 문화적으로 풍성한 교구를 만드는 데에 힘썼다.

그렇게 장 주교는 늘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임했지만, 주님을 섬기고 사람을 보살피는 일만큼은 열정적으로 앞섰다. 신자들이 ‘주님 말씀’을 살도록 구·신약 성경을 모두 읽고 생활화하는 ‘성서백주간’을 국내에 도입·전파했고, “빵도 하나 우리도 한 몸”이라며 북한 동포를 돕기 위한 ‘한솥밥 한식구’ 운동을 펼쳤다. 분단교구인 춘천교구에 대한 고민을 담아 사목 표어까지 ‘하나 되게 하소서’로 정한 그는 북강원도에 감자와 북한 어린이 결핵 예방 주사 차량을 지원하는 등 지속적인 대북 지원 사업을 펼쳤고 그 진정성과 순수성·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 제1회 DMZ 평화상, 2009년 종교계에서 처음으로 제4회 일송상을 받기도 했다.

1995년 성소 동기를 묻는 가톨릭신문사의 질문에 “소명에 따른 순종이었다”고 말하고, 사제 수품 당시 신조가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라고 밝힌 고인은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도 자신은 오롯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임을 고백하며 유언했다.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구원의 잔을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시편 116,12-13)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반세기 이상을 부당한 사제로 살도록 허락하신 과분한 은총을 입은 주님의 종, 죄인 장익 십자가의 요한 나는 그저 더없이 고맙고 송구한 마음뿐입니다.”


■ 지인들이 말하는 “주교님은…”

- 메리놀 외방 전교회 한국지부 함제도(Gerard E. Hammond) 신부
(미국 메리놀 소신학교 때부터 70년 넘게 이어온 동갑내기 우정)

“형제 같죠. 제가 ‘내 남동생하자’고 농담하기도 하고. 한국에 온 것도 같이 공부한 장 주교님이 ‘꼭 한국에 오라’고 권했고 저도 한국에 지원했죠. 장면(요한, 장 주교 아버지) 박사님이 메리놀회를 잘 아시고 저도 주교님이랑 친하니까 메리놀회 집에 주교님 가족이 자주 오셨죠. 의식이 없을 때도 한 번 만나고 왔는데 의식이 있을 땐 7월 24일 마지막으로 만나고 왔어요. 그때 우리 손잡고 옛날에 학교 다닌 얘기하고 그랬죠. ‘이제 오래 못 사신다’고 하셨고 저도 같이 87세라 오래 못 살 것 같아 ‘나중에 천국에서 만납시다’하고 기도했죠. 

세상에 헤어지는 일 많지만, 70년 친구와 영원히 헤어지는 일이니 마음이 무겁고 눈물이 나죠. 주교님은 저희 어머니 회갑·돌아가실 때도 저고리 다 보냈어요. 우리 오래오래 친했죠. 장익 주교님, 우리 오랫동안, 70년 동안 같이했는데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겸손하고 검소하며 소박하고 열정적으로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로마 유학 중에 가끔 주교님은 저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다니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고인께서 타고 다니시던 차는 이미 폐차 직전의 상태였고, 비 오는 날에는 녹이 슬어 구멍이 난 자동차 밑바닥에서, 웅덩이를 지날 때마다 빗물이 올라와 그 구정물을 피하느라 다리를 들어 올리며 껄껄껄 웃으시곤 하셨습니다. 지난 6월 주교님 댁에서 주교님을 뵙고 기력이 회복되면 광주에 한번 모시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렇게 뵙게 되니 더욱 애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교님께서는 우리 가슴속에 커다란 울림으로 남아계십니다.”


- 광주 무각사 청학 스님
(서울 세종로본당 주임 시절 만나 30년간 인연 이어와)

“은사 같은 분이었습니다. 돌아가시기 보름 전에도 통화했는데 제가 기도 중이어서 못 왔어요. 

이달 말까지 계실 줄 알고, 건강 회복하시면 광주에 오시기로 했는데…. 마음이 먹먹하죠. 주교님은 스님인 제가 봐도 ‘제일 본받고 싶은 그런 수도자 상’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요. 성직자·구도자의 모습을 행동으로 실천하시는 모습, 늘 겸손하시고 말도 안 놓으시고 항상 염려해 주시고 자신을 낮추시고 그 모습은 정말로 잊혀지지 않아요.”


-춘천교구 사회사목국장 김학배 신부
(춘천교구장으로 부임한 해에 사제품을 받고 이후 20여 년 동안 장 주교를 가까이에서 보필하며 병간호하고 임종도 지켜)

“당신이 아주 작고 보잘것없다고 생각하고 사신 분이세요. 삶은 소박하셨고 외투도 한두 벌밖에 없으셨어요. 10년도 전에 사 드린 가벼운 점퍼가 있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산책하실 때나 가까운 곳 가실 때 그거 하나 입으셨을 만큼 검소하셨어요. 과일이 두 개 생기면 항상 하나는 내어 주셨고. 

한 번은 여행을 모시고 갔는데 80세가 넘으셨으니 당연히 가방을 들어 드리려니까 ‘힘이 없을 때 부탁할게. 내가 할 수 있을 땐 내 힘으로 하게 해줘’ 부탁하신 분이에요. 힘이 없어지셨을 땐 ‘이제는 내가 김 신부에게 조금 기대야겠다’면서 작아진 모습도 그대로 받아들이셨어요. 아버지 같은 존재셨죠. 자타가 제게 ‘아들 신부’라고 할 만큼….”


- 춘천 퇴계본당 한우석씨
(서울 세종로본당 주임 시절 연을 맺어 고인 선종 전 10년 동안 춘천 실레마을 공소에서 아침 미사를 평일 매일 함께 봉헌)

“부모님 같죠. 아버지 어머니 역할을 주교님이 한꺼번에 하셨죠. 누구나 왔다 가는 거지만 기억에 남는 순간이 너무 많으니까…. 스스럼없이, 편하게, 주교님이면서 동네 할아버지처럼 대해 주셨어요.”


- 춘천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임용순 회장
(2013년부터 ‘성서백주간’ 봉사자 모임 부회장·회장 등을 역임하며 7년간 교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날그날 그때그때 만족하는 분이었습니다. 2년여 전 저희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주교님에게 알리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성서백주간 팀이 저희 집에 문상을 오던 중 주교님 댁에 들러 얘기했나 봅니다. 그 말을 듣고 주교님이 장례미사 때 오셔서 집전해 주셨는데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당시 제가 회장도 아니고, 그냥 한 명의 평신도 신자였는데도 주교님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책을 읽다가도 좋은 글귀가 있으면 적어서 건네주시기도 하고 그렇게 소탈한 분이었습니다.”


8월 6일 오후 1시30분 위령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이 장 주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장익 주교의 70년 동갑내기 친구 함제도 신부가 장례미사에서 성체를 영한 후 고인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장례미사에서 사제들이 고인을 기리며 기도하고 있다.



2012년 팔순 기념미사 당시의 장익 주교.



■ 약력
1933.11.20. 서울 출생
1956.06. 미국 메리놀 대학 인문학 학사
1959.07. 벨기에 루뱅 대학 대학원 철학 석·박사 과정 수료
1963.03.30. 사제 수품(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1963.07.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 신학 석사
1967.04. 서울 대방동본당 보좌
1967.08. 서울대교구장 비서
1970.01.16. 서울 정릉동본당 주임
1973.08~1993.09. 서강대학교 강사·부교수
1974.03.~1975.03 국립 대만대학 대학원 중문계 수학
1978.04.~1985.04.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당시 비그리스도교사무국) 자문위원
1982.07. 교황청립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 대학원 철학 박사 과정 수료
1990.09.07.~1994.11.11. 서울대교구 세종로본당 주임
1993.09.~1996.01. 가톨릭대학교 부교수
1994.11.11. 춘천교구장 주교 임명
1994.12.14. 주교 수품
1995.03.23.~2002.10.17.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위원장
1995.09. 아시아 주교대의원회의 준비위원
1995.10.10.~2001.03.22. 2000년 대희년 주교특별위원회 위원
1995.12.11.~2000.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위원
1996.10.17.~2002.10.17. 주교회의 교리주교위원회 위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1997.10.~2005.10.13. 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위원
1999.10.~2002.10.17. 주교회의 상임위원
2000.05.15. 한림대학교 명예 철학 박사
2002.10.17.~2005.10.13. 주교회의 총무
2002.10.17.~2008.10.16.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위원장
2005.10.13.~2010.01.28. 주교회의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2005.11.21. 함흥교구장 서리 임명
2006.10.12.~2008.10.16. 주교회의 의장
2010.01.28. 춘천교구장, 함흥교구장 서리 사임
2010.03.20. 은퇴.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 공소에서 원로 사목
2020.08.05. 선종


생전 장익 주교의 뒷모습. 2010년 퇴임을 준비할 당시 인터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모습.가톨릭신문 자료 사진




























이소영 기자 lsy@catimes.kr
원문보기: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343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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