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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교회도 한 형제… 관심 갖고 어려움 파악해야”

by 문화홍보국장 posted Jun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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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 (20)교황청 특사 장익 주교 방북 비화



▲ 장익 주교가 1980년대에 이뤄진 자신의 방북 체험과 북한 신자들과의 만남, 북 신자들의 교황님 접견 등에 대해 정세덕 신부와 대담을 하고 있다.



25일로 한국전쟁 70주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는다. 남북관계는 여전히 혼미하다. 이런 때일수록 화해의 첫 마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전 춘천교구장 겸 함흥교구장 서리 장익 주교는 전후 최초로 1987년 바티칸 대표로 방북, 남북 화해의 물꼬를 텄다. 30여 년 전에 이뤄진 장 주교의 방북은 1990년대 중반, 북한 식량난 이후 한국 천주교회가 대북지원과 함께 교류협력을 하는 데 실마리가 됐다. 이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정세덕 신부는 1일 춘천교구 스무숲본당 실레마을공소 사제관에서 장 주교의 방북 체험에 관해 대담했다. 이를 동행 취재했다. 



-먼저 많이 편찮으시다고 전해 들었는데,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987년 주교님의 방북은 6ㆍ25 전쟁 이후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의 첫 방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로마에 본부를 둔 세계식량기구(FAO) 북한 대표였던 리종혁 대사를 알게 됐는데, 그가 바티칸과 접촉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과 국무원 국무장관님, 인류복음화성 장관님 등을 소개해 드렸어요. 리 대사는 북에서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을 지낸 충남 아산 출신의 월북작가 이기영(1895∼1984) 선생의 아들인데, 리 대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1987년 6월 7일 열흘간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했어요. 평양에서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비동맹경제장관 회의에 당시 제네바 유엔기구 교황청사절이셨던 주세페 베르텔로 몬시뇰(현 바티칸시국 행정원장 추기경)께서 가게 됐는데, 몬시뇰께서 혼자 가면 말이 안 통하니까, 함께 가자고 요청해서 같이 갔어요. 바티칸은 공식 회원국이 아니어서 옵서버로 참관했지요.” 



-당시 방북 때 북한 신자들과 만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바티칸 공무 여권을 받아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들어갔는데,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위대한 수령님 밑에서 지상천국에 사는 데 웬 천주교냐?’고 반문하더라고요. 그래도 이왕에 북한에 왔으니 만나게 해달라고 했더니, 출국 전날 당 간부들이 천주교 신자 5명을 모아놓았다고 해서 만났어요. 만나서 하나하나 물어봤더니, 틀림없는 교우들이에요. 말하는 투도 그렇고, 옛날 교우들이 교회에서 쓰던 말도 그렇고, 누구한테 영세했는지 얘기를 들어보니 신자는 틀림 없었어요.” 



-1988년 4월 주님 부활 대축일 당시 이뤄진 전후 첫 북한 신자들의 교황님 알현은 일부 내용만 알려졌는데요. 

“이 또한 리종혁 대사와 연관돼요. 1987년 6월부터 1988년 8월 15일까지가 역사상 두 번째 성모성년이었는데, 전년도 방북 때 만났던 북한 신자들을 1988년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에 초대하면 어떠냐고 했더니 교황님께서도, 성청에서도 좋은 생각이라고 해서 리 대사를 통해 초청했어요. 온다, 안 온다 하다가 성주간 수요일 밤이 돼서야 로마에 왔어요. 리진철(모이세)과 홍도숙(데레사)을 포함해 5명인데,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구교우인 건 확실했어요. ‘성주간인데, 성사를 볼 생각이 있느냐’고 했더니, 둘이서만 밀담한다고 안 된다는 거예요. 인솔한 당 간부들이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난리가 났는데, 결국은 성사를 보게 해주더군요. 성 안셀모수도원에서 성사를 봤는데, 마침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가 있어서 수도원장님의 배려로 리 모이세가 고해성사도 보고 발씻김 예식 참여자 12명 가운데 1명으로 뽑혔어요. 성금요일에 베드로 대성전에 갔는데 제대 바로 아래 외교관들이 앉는 귀빈석에서 미사를 봉헌했어요. 원래 교황님은 성주간에 아무도 접견을 안 하시는데, 북한에서 신자들이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특별히 만나 주셨어요. 접견 뒤 북 신자들은 귀국했는데, 그 뒤로는 아무런 소식도 못 들었어요.” 



-1988년 10월 9일 평양에 교우들도 모르게 세워진 장충성당을 찾아가 휴전 이후 첫 미사를 집전하셨지요.

“그때는 정의철 신부와 함께 갔는데, 교황님께서 전후 처음으로 사목방문을 하는 것이니 제의 일습(一襲)과 성경책, 성가책을 40㎏을 가져가라고 해서 가져갔어요. 갔더니 성당에 40∼50명 모여 있더군요. 그들 중 노인 몇 분은 표현은 못 하는데, 감동하는 표정이었어요. 30대들은 아무것도 모르고요. 공의회가 열린 것도 모르고, 전례도 잘 모르는 듯해서 정 신부가 1시간가량 강의를 하고 나서 성사를 줬어요. 정 신부는 제의방에서, 저는 성당 입구 쪽에 의자 놓고 양쪽에서 성사를 봤는데, 놀랍게도 전원이 성사를 보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성사를 보는 신자들이 녹음한 것처럼 똑같은 말을 하더라고요. 얼마나 연습을 시켰으면 이렇게 하나 싶어, 이거 성사를 줘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었지요. 그래도 성사를 끝내고 미사를 했는데, 미사가 끝난 뒤 교우들과 얘기도 한 번 못 해봤고, 그냥 기념 사진 한 장 찍고 헤어진 게 전부입니다.” 



-1980년대 이후에도 방북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물론이죠. 평양에도 다녀왔고요. 1997년부터 ‘한솥밥 한식구 운동’을 전개, 북강원도 감자 보내기, 구급차 전달 및 북한 어린이 결핵 예방 백신 접종, 옥수수 개발기금 전달, 연탄 40만 장 지원 등 교구 차원에서 대북사업을 꾸준히 했지요. 산이란 산은 다 벗겨지고, 민둥산이 된 금강산 아래 자락을 봤을 때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북녘땅 복음화, 이북 교회 재건은 가능할까요? 

“통일되면 북한 가서 성당 짓는 게 첫째가 되면 안 됩니다. 북녘 형제들의 아쉬운 것부터 파악하고 도와주는 게 우선돼야 합니다. 나서지 않고 도와야 합니다. 성당을 구경도 못 하고 산 세월이 수십 년이니까, 힘들더라도 생색내지 말고, 드러내지 않게, 소리 없이 돕는 게 중요합니다.” 



-일부 국민들, 또 젊은 세대들은 남북문제나 통일에 대해선 듣기 싫어합니다.

“듣기 싫어하기보다 부담스러워 하지요. 절박하게 다가오지 않을 테니까요. ‘따로따로 있는 게 낫지 않아요?’ 이런 말을 하는 지경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이고, 하나인 교회라는 것, 북한 교회를 위해 기도하자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관심을 두도록 해야 하는데, 관심을 가지려면 알아야 하고 그 앎이 내 삶에 상관이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한 집안, 한 형제라고 생각하도록 해야 합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원문 링크  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781095&path=20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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